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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들 앞에 놓인 문제들, 누가 안겨다 놓은 것일까?
 청년들 앞에 놓인 문제들, 누가 안겨다 놓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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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나한테 왜 이래요?"

우리 사회 청년들이 지닌 삶에 대한 태도가 비관을 넘어 달관에 이르기 시작했다는 신종 세대 담론의 등장에 대해 어느 청년이 꺼낸 첫 마디다. '한 달에 1백만 원이면 행복하기에 충분하다?' 청년세대 내에서 발화되지 않고 외부의 이해관계에 의해 발명되거나 수입된 세대 담론이 이제는 '자족'을 권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그러자 이렇게 저렇게 지명당사자들이 짜증 섞인 피로감을 토해내고 있다.

우리 사회는 청년들에게 질문을 허락하지 않는다. '88만 원 세대'부터 '삼포 세대'까지 여러 말로 청년의 존재를 규정하고 '아프니까 청춘이다', '천 번은 흔들려야 어른이 된다'며 조언하기 일쑤였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청년 스스로 질문에 직면할 기회에는 인색했다.

언젠가부터 청년은 끊임없이 재단되며 '○○세대'라는 이름표만 바꿔 달고 있다. 실상 세대 담론이란 청년을 주체로 동원하거나 대상으로 관리해야 할 필요 때문에 기획되는 것이다. 그렇게 탄생한 언어들은 정작 청년 세대의 자기 서사 안에서 양분을 얻으며 확대되지 못하고 세대 바깥에서 제기되고 유행처럼 소비된 후에 소멸해왔다.

'달관 세대' 논란 역시 그 연장선에 있다. 하지만 이 논란은 지금까지와 다른 양상으로 발전하고 있다. 세대 담론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할 계기를 제공했다. 성급한 담론 수입에 불과한가? 오히려 잘 준비된 표현으로 '달관(達觀)'은 근래 일본 청년들의 가치관을 담은 일본어 '사토리(さとり)'를 절묘하게 번역한 것이다.

설령 소수가 기존과 다른 삶의 방식을 추구한들, 그러한 '세대'는 실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청년들의 삶을 특정한 의도에 따라 재현함으로써 현상의 구조적 원인을 가리는 착시효과일 뿐이다. 속내는 얇은 지갑을 대신할 두터운 삶의 양식이 마련되지 않은 사회적 조건에서 적게 벌고 적게 쓰는 안분지족의 삶에 만족하라는 것이며 이제 그만 체념하라는 의미다.

'세대' 범주의 유효성과 허약성

2000년대 한국사회에는 노동자·농민·빈민 등으로 사회집단을 구분하는 전통적인 분석 범주만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그러나 이미 빠른 속도로 등장하기 시작한 '새로운 사회적 약자집단'이 존재했다. '세대'와 같이 기존과 다른 분석 범주들은 이 존재들을 조명하는 데 유효했다. 신(新) 사회적 위험의 발생에 따라 사회를 분획하는 방식 또한 변화하기 시작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신자유주의로 표현되는 시장경제 중심의 성장 패러다임은 대기업과 같이 시장에서 우월한 지위를 가진 소수에게로 이윤을 집중시켰다. 경제적 부의 배분으로부터 구조적으로 배제됨에 따라 사회경제적 약자의 지위에 처한 청년이나 경력단절 여성들은 양질의 일자리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2차 노동시장 불안정 노동'의 당사자로 자리 잡는다.

누구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볼 것인가? 세대나 젠더와 같은 범주들은 새롭게 발생하는 사회문제를 밝혀내고,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가 낳은 사회적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 '경제민주화'라는 시대적 과제를 도출하는 과정에 주요한 기제로 작용했다. 이들은 우선 시장 내 약자로 공공정책의 우선적 지원 대상으로 떠올랐다.

동시에 이들은 2003년 촛불시위 이후의 몇 차례의 대규모 시민운동을 거치면서 사회 변화의 희망을 담아 '뉴파워(New Power) 진원지'로 호명되며 새로운 성장 동력이자 사회적 투자의 대상으로 주목받았다. 그러나 사회적 불평등은 성별·연령·소득·자산·학력·지역 등 수많은 중심성과 주변성이 교차하는 중층적인 구조에 의해 계속 심화 되어왔고 사회 계층 간 이동 또한 단절되었다. 그 결과로 중산층은 파괴되고 사회적 약자의 존재 양상은 더욱 세분되어갔다.

문제는 그러한 변화를 반영하지 못하고 세대 범주가 파편화되어 가는 이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데 점차 허약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의 복잡성은 간명한 진단과 해법을 적용하기 어렵게 만들며, 구조를 분석하고 문제의 해법을 모색함에서도 단면적 시각이 아니라 다면적이고 총체적인 접근이 요구한다. 따라서 '○○세대'라는 지명만으로는 부족하다. 세대를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효과가 있었던 시점과 단계가 있었다면, 지금은 고정된 하나의 범주로서 세대만을 강조하는 것에 분명한 한계가 있다.

청년 세대는 균질하지 않다

구조적 인식에서 발생하는 세대 범주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다수 청년이 겪고 있는 삶의 문제가 사회의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인 것 또한 객관적 사실이다. 청년기의 가장 기본적 특징은 시장경제에 독립적 주체로 진입하는 최초의 단계라는 점이다. 연령이 낮다는 것은 노동시장에서 저 숙련과 짧은 경력으로 인한 취약함으로 이어지며, 주택 임대시장에서는 세입자의 불안정함으로 이어진다.

소득도 낮고 자산도 없는 청년들이 이제 막 사회의 출발선에 섰을 뿐이니, 사회적 보호 장치가 취약한 조건에서 경제위기의 충격이 그들에게로 집중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2008년 국제적 금융위기의 발발 이후 청년들의 상황은 더욱 나빠지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청년 문제에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가?

짧은 시간 동안 압축적 근대화와 경제성장, 급격한 사회변화를 겪어온 한국사회의 복잡성은 '비 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표현으로 함축된다. 비 동시적인 것들이 동시에 존재하는, 사회의 전근대·근대·탈근대적 요소가 공존하는 불안정성이 핵심적인 특성이다. 우리는 달력 위에 흘러가며 같은 시간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사회적 위치와 처한 조건, 상황에 따라 전혀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는 주로 '세대 간'에 두드러지는 모습이지만, '세대 내'에서도 존재한다. 세대 내의 비동시성은 계급·계층 간 격차의 모습을 띤다. 대다수의 청년이 88만 원 세대인 것은 분명하지만, 동시에 완전히 다른 게임에 참여하고 있는 극소수 88억 원 세대의 청년들도 존재하는 것이다. 서울 가로수길 건물 79채의 등기부 등본을 조사한 결과, 증여와 상속에 의한 소유가 27채로 그중 10~30대 청소년·청년 건물주가 17명이었다는 언론 보도가 새삼스럽지 않다.

같은 동네, 같은 고등학교 출신의 막역한 친구 사이였어도 대학 학벌과 직장 간판의 차이 때문에 관계가 소원해지는 씁쓸한 경험은 너무나 일상적이다. 대다수의 경우 태어남과 동시에, 그리고 수많은 삶의 갈림길에서 청년 개인의 삶은 분화하고 있다.

모든 청년이 '같은 지금'을 살고 있지 않다. 즉, "청년세대는 균질하지 않다." 청년이라는 세대집단이 코호트(무리)로서 사회적 경험·문화·가치관 등 많은 것들을 공유하더라도, 청년을 단일한 사회집단으로,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하게 되면, 현실의 구조적 원인을 자세히 밝혀낼 수 없다. 때때로 '청년'이라는 기준은 이분법적 결과를 낳는다.

오로지 청년이기 때문에 문제의 대상이 될 수 있고, 동시에 완전히 같은 이유로 문제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있다. 결국 세대 범주도 중층적이고 중첩적인 사회구조 안에서 의미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청년 문제를 다룸에 있어 사회구조의 수준에서 세분된 대상에 따라 현상에 접근하고, 그에 적합한 해법을 찾아야 하는 이유이다. 청년들이 처해 있는 구체적 현실은 기존 세대 담론의 진화를 요구하고 있다.

누가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

여러 가지 난점에도 불구하고 청년 세대는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고 사회를 바꾸어갈 집단으로서 여전히 유효한 힘을 가지고 있다. 앞서 논한 바처럼 각자의 처지와 다른 조건에서 서로 다른 시간을 살아가는 내부의 차이도 있지만, 결국 이들이 집단으로 행동할 수 있도록 하는 관계성과 사회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청년들은 오늘의 시대를 살아가는 같은 세대로서, 사회의 위기가 앞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이전되는 과정의 고유한 역사적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이것은 세대 내에서 체념, 냉소, 분노와 같은 공통의 감수성을 만들어 사회집단으로서의 지속성을 유지하도록 한다.

청년세대는 균질하지 않다. 하지만 동시에 청년세대는 관계와 문화, 경험과 감수성을 공유하며 하나의 사회집단으로 작동할 수 있다. 청년세대가 사회집단으로 기능하게 하는 토대(관계성과 사회성)는 세대 내에서 다양한 격차와 차이가 벌려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상적으로 개인의 수준에서 발생하는 위기를 관계 형성과 공동의 움직임을 통해 대응하는 문제 해결의 사회적 방법을 가능하게 한다.

문제 해결 주체로서 청년의 등장이 비록 지금의 '현실태(Actual)'가 아니라 미래의 '잠재태(Virtual)'로만 확인될지라도, 현재에서 미래를 이으며 살아갈 청년들에게서 가능성을 찾지 않는다면, 희망의 언어는 불가능할 것이다. 과연 청년은 안주할 것인가? 우리에게는 청년 문제 해결을 위한 주체적 접근이 필요하다. 변화 가능성을 부정하며 '그 정도에 만족하는 세대'라는 분석을 내놓는 '달관 세대' 담론의 기만성에 우리가 반론을 제기하는 다른 하나의 이유다.

세대 담론은 청년 세대가 처한 객관적 현실의 보편성을 찾아내기 위한 '사회 구조적 접근'과 동시에 청년의 집단적 존재로부터 문제 해결의 가능성을 찾는 '주체적 접근'을 엄밀히 분리하되 두 가지 모두를 포함해야 한다. 하나의 결과는 어떠한 원인으로부터 과정을 거쳐 이른 것이다. 청년 세대 내에 퍼져가고 있는 '계획할 수 없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무기력'이라는 하나의 결과 역시 어떠한 원인과 과정에 의한 것이다.

청년의 삶이 절벽 앞으로 내몰리고 있는 현실의 결과에 대해 첫째, 그 원인과 과정을 밝히는 작업은 사회 구조적 접근을 통해 초점을 선명히 하되, 둘째, 문제의 해법을 모색하는 작업은 청년세대가 오늘 만들어 가는 다양한 상상력과 새로운 움직임에 주목함으로써 더 풍부하고 다양하게 해야 한다. 그러한 이중적 숙제를 담아내는 것이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한 세대 담론이 나아가야 할 방향성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신윤정님은 서울시 청년허브 기획실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월간 <참여사회> 10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태그:#청년, #청년문제, #참여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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