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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아홉 살에 혼인한 하동선씨. 그는 결혼의 감격을 "안사람이 리아카 밀어주니까 좋지요"라고 표현했다.
 서른아홉 살에 혼인한 하동선씨. 그는 결혼의 감격을 "안사람이 리아카 밀어주니까 좋지요"라고 표현했다.
ⓒ 매거진군산 진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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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하동선씨도 안간힘을 써서 올라야 하는 말랭이(오르막길)를 힘들게 여겼다. 도로 포장이 안 되어 있던 시절, 군산에는 크고 작은 산말랭이(산동네)가 많았다. 동선씨는 내래백이(내리막길)이가 나오면, 속으로 '인자 살았구나' 했다. 그는 한일연탄공급소 사장 겸 직원, 리어카에 연탄을 싣고서 골목골목을 다녔다.  

"1973년이니까, 연탄공급소 시작하고 한 달쯤 됐을 때예요. 비료 한 포대, 명태 큰 놈 세 마리를 든 아줌마 한 분이 왔어요. 저 먼 백두개(지금의 나운동 CGV)까지 연탄 100장(400kg, 1장 4kg)을 싣고 가자고 하대요. 그때는 다 비포장도로예요. 고개를 올라가는데 동생하고, 동생 친구하고, 지나가는 사람들까지 밀어서 제우(겨우) 올라갔어요.

두 번째 고개 올라가서 보니까 내래백이가 50m쯤 돼요. 끄트머리에는 구루마가 있고요. '올라오느라고 고생혔응게, 이제는 편하겠다' 생각했어요. 그런데 리어카에는 브레끼가 없는데 막 내려가는 거예요. 가속도가 붙어서요. 그대로 갔다가는 죽게 생겼어요. 결사적으로 오른쪽 밭 둔덕에 리어카 발통(바퀴)을 부닥쳐갖고 스톱을 시켰어요. 리어카는 뒤집어졌고요."

리어카 위에 실린 명태는 배가 터진 채 새까매졌다. 비료 포대도 엉망이 됐다. 연탄도 물론 많이 깨졌다. 연탄을 주문한 아줌마는 '저 아저씨 죽었는 개비다'라고 생각했단다. 동선씨는 "암시랑도 안 해요" 하면서 일어났다. 아줌마는 "연탄은 깨졌을망정 사람이 살아서 천만다행이에요" 라고 했다. 그 뒤로 동선씨는 내리막길을 조심했다. 두려워했다.

학비가 없어 학교 끝까지 못 다닌 '영특한 소년'

하동선씨가 1973년에 시작한 한일연탄보급소. 1979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사왔다. 그는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이 더 조심하며 일했다.
 하동선씨가 1973년에 시작한 한일연탄보급소. 1979년에 지금의 자리로 이사왔다. 그는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이 더 조심하며 일했다.
ⓒ 매거진군산 진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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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6년, 동선씨는 전북 고창에서 태어났다. 일정(일제강점기) 때였다. 여덟 살 때 들어간 '국민학교'에서는 일본말만 썼다. 조선말을 하면 일본 선생이 보자기를 씌워놓고 막 때렸다. 아침마다 조회시간에 신사참배를 하고, 일본에 충성해야겠다는 맹세를 일본말로 했다. 산수나 국어, 체조도 일본말로 된 교과서로 배웠다.

"3학년 때부터 집에 있는 놋그릇이나 놋수저를 학교로 가져오라고 합디다. 그걸 녹여서 무기를 만들라고요. 마초(말먹이)를 베어서 말려 갖고 오라고도 하고요. 광솔(소나무 송진)에 불을 붙이면 기름이 나와요. 그걸 짜오라고도 해요. 공부는 뒷전으로 그러고 있는디, 미군이 일본에 원자탄을 투하하고, 우리나라 사람들도 독립운동을 해 가지고 해방이 된 거예요."

해방을 맞은 그해 11월, 동선씨네 식구들은 군산으로 이사 왔다. 외할아버지의 농사일을 돕기 위해서였다. 소년 동선은 군산 중앙초등학교를 졸업했다. 6년제이던 사범학교에 지원했다. 졸업하면 바로 교사가 될 수 있는 장점 때문에 경쟁률은 치열했다. 13대 1, 그는 합격했다. 그러나 입학금을 못 낸 소년은 학교에 다닐 수가 없었다. 

열네 살 소년은 집안일을 하고, 할아버지 병간호를 하며 1년을 지냈다.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등록금 없어서 학교 못 간 게 억울하니까 다시 사범학교 시험을 치라고 했다. 소년은 또 합격했다. 소년의 이모부는 경성고무, 한국합판 같은 기업체에 찾아가서 "사범학교에 두 번이나 합격한 아까운 사람입니다"라면서 입학금 3만 원을 모금했다.

"열다섯 살에 사범학교 1학년이 됐는데 6·25 사변이 터졌어요. 난리가 났어요. 인민군들은 해망굴에 있고, 학교는 피난민들 수용소가 됐어요. 공부도 제대로 못 했죠. 전쟁을 3년간 하고 휴전협정을 맺었는디 국가적으로 혼돈 상태였고, 저 자신도 그랬어요. 수업료를 못 내서 쩔쩔매고, 당장에 밥도 못 먹으니까요. 우선은 생명이 있어야 하잖아요. 3학년까지 포도시 댕기고는 학업을 포기했어요. 동생이 다섯 명인데 그 애들이나 잘 가르치자고요."

동선씨는 열여덟 살 때 북선제지(이후 고려제지로 이름이 바뀌었고, 지금의 페이퍼코리아)에 입사했다. 그때 북선제지는 전국에서 신문용지 생산을 가장 많이 하던 회사였다. 20년 이상 된 소나무를 산에서 채벌해 화물기차로 실어오면 빠르뽀(종이) 원료를 만들어서 신문 종이를 만들었다. 그걸 전국으로 보내기 위해서 기차가 분주하게 오갔다. 그 길이 지금의 구암동 철길마을이다.  

그는 종이 만드는 기계가 고장나면 고치고 수리하는 설계공작과에서 일했다. 13년간 회사 다니면서 번 돈으로 동생들 학비 대고, 생활비로 썼다. 저축은 못 했다. 북선제지는 군산에서 높이 쳐주던 회사, '결혼 제의'도 많이 들어왔다. 그러나 동선씨는 장남, 집안 형편을 생각했다. 동생 둘을 먼저 시집장가 보냈다.

"1967년도에 회사 사정이 어려워지면서 그만뒀어요. 그 뒤로 6년간 안 해 본 일이 없어요. 그러고 사는디 동생이 연탄 일을 하자고 해요. 그때는 석유 보일라 발명이 안 됐어요. 장작을 때니까 삼림이 다 훼손됐고요. 정부에서 삼림녹화 사업하면서 연탄 권장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다들 연탄만 의지하고 살던 때였어요. 군산에도 연탄공급소가 100곳이 넘었습니다."

고생했다고 점심상 차려주는 이도... "좋은 사람 참 많았죠"

팔순을 맞은 하동선씨가 그의 아내와 하고 있는 군산 한일연탄공급소.
 팔순을 맞은 하동선씨가 그의 아내와 하고 있는 군산 한일연탄공급소.
ⓒ 매거진군산 진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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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여덟에 한일연탄공급소를 시작한 동선씨는 '결혼지각생'. 서른아홉 살이던 1974년에 이길윤씨와 혼인했다. 그는 가정을 이룬 감격을 "결혼하고 안사람이 바로 연탄 밀어주니까 좋지요"라고 표현했다. 연탄 200장 주문이 오면, 동선씨가 100장(400kg), 길윤씨가 100장을 각각 리어카에 끌고 나갔다. 군산 시내에서 연탄 리어카 끄는 여자는 그의 아내뿐이었다.

길윤씨는 아기 낳기 전날에도 오후 9시까지 연탄 일을 했다. 그러고 나서 다음 날 오전 2시 반에 큰아들 성연을 낳았다. 산바라지는 일주일만 하고 연탄 배달하러 나섰다. 시어머니는 아기가 울면, 포대기에 싸서 가게로 나왔다. 며느리가 연탄 일 갔다 오기를 기다렸다. 동선씨가 리어카에 연탄을 싣는 틈에 길윤씨는 아기 젖을 먹였다. 

"큰애 낳던 해에 연탄 파동이 났어요. 정부에서 한 집 당 연탄을 200장 이상 못 주게 했어요. 옛날에는 지금보다 훨씬 추워서 더 난리였어요. 그 당시 연탄 한 장이 4kg, 구멍이 19개라서 19공탄이었어요. 정부에서 원료를 절약할라고 연탄 크기를 줄였어요. 구멍도 22개로 늘리고요. 구멍이 많을수록 원료가 덜 들어가니까요."

연탄의 최전성기인 1970~1980년대. 동선씨 부부는 아들 둘을 낳고 키웠다. 1978년에 태어난 둘째 복진이는 방에 가둬놓고 연탄 배달을 갔다. 연탄 떼러 온 손님들이 펄펄 뛰고 우는 아기한테 과자를 사주기도 하고, 동선씨 부부가 올 때까지 안아주기도 했다. 그런 운은 어쩌다 한 번씩만. 똥오줌이 짓이겨진 방에서 돌 넘은 아기 복진은 울다 잠드는 게 일상이었다. 

초등학생이 된 동선씨의 두 아들은 연탄 리어카를 밀었다. 동선씨 부부는 '어려서 챙피한 걸 모르는 개비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중고등학교 때는 친구들까지 몰고 왔다. 길윤씨는 아들 친구들이 배달 일을 도우러 오면, 라면부터 끓였다. 일 끝나고는 고기 구워 먹이고, 목욕탕 가라고 돈을 줬다. 솔직히 그런 날은 남는 이문이 없었다. 그래도 좋았다고. 

눈 오는 날, 질척이는 산말랭이(산동네)까지 연탄 대줬는데 돈 안 주고 미루다가 이사가 버리는 사람도 몇이나 됐다. 월급날은 멀었는데 연탄 떨어져서 너무 춥다고 외상으로 연탄 가져가는 사람들도 많았다. 때로는 돈을 더 얹어주는 사람, 고생했다고 점심상을 차려주는 사람, 씻으라고 비누를 주는 사람도 있었다. 좋은 사람이 더 많았다면서 동선씨가 말했다.

그는 40년 넘게 연탄 일을 했다. 한겨울에도 두 겹 이상 옷을 입지 않고, 장갑도 끼지 않는다. 겨울에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서 단련하기 위해서.
▲ 하동선씨의 손 그는 40년 넘게 연탄 일을 했다. 한겨울에도 두 겹 이상 옷을 입지 않고, 장갑도 끼지 않는다. 겨울에 일을 많이 하는 사람이라서 단련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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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날 평생 장갑을 안 끼고 일 해요. 눈보라가 쳐도 내복을 안 입어요. 연탄 일을 하면, 할 수 없이 날마다 목욕을 해야 할 것 아니에요? 따순 물로 씻으면 (연탄이) 싹 벗어져요. 헹굴 때는 냉수로 찌클어요. 우리는 추울 때 일하니까 막 단련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날 이때까지 감기도 잘 안 들어요. 피부도 튼튼하고요."

기름보일러가 대중화 되면서 연탄 주문은 팍 줄었다. 젊은 사람들은 연탄가스 무섭다고 꺼려했다. 동선씨는 시대가 바뀌고 있다는 걸 알았다. 리어카로 연탄을 갖다 주던 공급소가 시나브로 사라진 자리에는 5백장 이상만 주문 받아서 트럭으로 배달하는 연탄가게가 생겼다. 몇 십 장씩만 연탄을 주문할 수 있는, 골목길 사람들에게는 고통스런 변화였다.

"사람들이 '아저씨가 연탄 안 대주니까 춥게 지내요' 라고 사정을 해요. 수십 년간 거래를 했는디, 그렇게 안타까운 소리를 하면 갖다 줘야죠. 연탄은 겨울에는 생명이나 같으니까요. 그런디다가 연탄 일은 재미가 있어요. 내가 13년을 직장생활 했는디, 출·퇴근 시간 지켜야 허고, 기계 속에서 일 하니까 귀가 엥엥 거렸어요. 연탄 일은 얽매이들 안 해요. 전화 오면 갖다 주면 끝나니까요. 오래 둬도 썩들 않고요. 그런 재미가 있어서 못 그만뒀어요."

하동선· 이길윤 부부의 두 아들 성연씨와 복진씨는 "연탄은 집안일이니까 당연히 했죠"라고 했다. 부모님한테 손 벌리는 게 미안해서 고등학생 때부터 알바를 했고, 대학 등록금도 스스로 벌어서 다녔단다. 그들 형제는 "부모님이 손에 돈을 쥐어준 건 아닌데요, 보고 배운 게 다 유산이에요" 라고 했다. 그래서 일찍부터 자생력을 갖고 산다고.

가난한 사람들의 연탄 10장 주문도 마다하지 않아

65년 전, 동선씨의 노트. 이 영특한 소년은 학비가 없어서 학교를 끝까지 다니지 못했다.
 65년 전, 동선씨의 노트. 이 영특한 소년은 학비가 없어서 학교를 끝까지 다니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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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선씨는 40년 넘게 연탄 장부를 써 왔다. 둘째 아들 복진씨는 “몇 년도에 뭔 일 있었나 이거 보면 다 나와요”라고 했다.
 하동선씨는 40년 넘게 연탄 장부를 써 왔다. 둘째 아들 복진씨는 “몇 년도에 뭔 일 있었나 이거 보면 다 나와요”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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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진씨는 아버지 자랑을 하고 싶다며 작은 가방을 가져왔다. 65년 된 노트들, 교재 살 돈이 없는 동선씨가 친구한테 책을 빌려서 인쇄한 것처럼 지도를 그리고 글을 써 놨다. "몇 년도에 뭔 일 있었나 이거 보면 다 나와요"라는 연탄 장부는 동선씨가 40년 넘게 기록 중이다. 한가한 여름에는 늦잠도 자고, 깨를 털고, 점심으로 칼국수 먹은 동선씨의 생활도 보인다.  

"근래에 큰아들이 트럭을 하나 사서 도와줘요. 아들이 지게에다가 딱 20장씩 짊어져요. 지금은 천 장을 날라도 1시간이면 끝나 버려요. 그 전에는 안식구하고 둘이 하루 종일 걸렸어요. 연탄공장도 전라북도에는 전주에 하나, 정읍에 하나만 남았어요. 그 전에는 공장에서 연탄공급소에다 연탄을 가져다 줬는디, 지금은 다 가지러 가야 해요. 큰아들 트럭으로 댕기니까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건강이 허락하는 한은 계속 해야지요."

이제는 기름보일러를 쓰던 가정집에도 도시가스가 들어간다. 그래도 꽃집이나 미용실, 작은 사무실들은 여전히 연탄을 쓴다. 기름 값이 무서워서 보일러를 못 돌리는, 군산 외곽의 시골 사람들도 연탄이 있어야 겨울을 난다. 시내 말랭이에 다닥다닥 붙은 집에 사는 사람들은 연탄이 필수품, 10장도 주문한다. 동선씨는 타산이 안 맞는다고 거절하지 않는다.  

1979년, 동선씨 부부는 지금의 한일연탄공급소 집을 샀다. '딸라 돈' 30만 원을 얻어서 계약금을 치렀다. 슬레이트가 깨져나가서 별이 보이던 680만 원짜리 집. 부부는 헌 슬레이트를 주워서 지붕을 입히고, 담장을 쌓는 데 200만 원을 들였다. 거의 1천만 원이 든 집값은 오랜 세월을 두고 갚았다. 새색시 때부터 남편과 같은 길을 걸어온 길윤씨가 말했다.

"이날 평생 일해서, 이 집 하나 달랑 있는 거랑 애들 잘 키운 것 밖에 없어요. 그것이 보람이라면, 큰 보람이에요."

1985년, 하동선 이길윤 부부와 큰아들 성연
 1985년, 하동선 이길윤 부부와 큰아들 성연
ⓒ 군산 한일연탄공급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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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색시 때부터 남편과 같은 일을 해온 이길윤씨가 말했다. “이날 평생 일해서, 이 집 하나 달랑 있는 거랑 애들 잘 키운 것 밖에 없어요. 그것이 보람이라면, 큰 보람이에요.”
▲ 2013년 가을, 가게 앞에 선 하동선 이길윤 부부와 두 아들 새색시 때부터 남편과 같은 일을 해온 이길윤씨가 말했다. “이날 평생 일해서, 이 집 하나 달랑 있는 거랑 애들 잘 키운 것 밖에 없어요. 그것이 보람이라면, 큰 보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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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군산 한일연탄공급소, #하동선 이길윤 부부, #팔순까지 연탄 일을 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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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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