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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에서 만난 힌두교인. 지하수 관정 작업을 하는 그는 이른 아침 길에 꽃을 뿌리고 신에게 경배를 올리고 있었다.
 산책길에서 만난 힌두교인. 지하수 관정 작업을 하는 그는 이른 아침 길에 꽃을 뿌리고 신에게 경배를 올리고 있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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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텀씨를 만나러 간디 아쉬람에 들어서는데 주방에서 일하는 사내가 뭔가를 쫓고 있다. 그의 손에는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영어 알파벳 '와이(Y)'자 모양의 고무총이 들려 있다. 고무총은 새가 아니라 원숭이를 향하고 있다. 원숭이들이 간디 아쉬람 정원을 꾸미고 있는 꽃들이 피기도 전에 꽃대를 톡톡 잘라 따 먹는다는 것이다.

원숭이는 인도 어디를 가나 극성이다. 다람살라에서도 그랬고 바라나시며 리쉬케시에서도 그랬다. 원숭이가 사람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사람이 원숭이 눈치를 봐야 할 때가 많다. 리쉬케시에서는 원숭이가 얼쩡거리고 있는 곳에서 먹을 것을 손에 들고 다니기가 힘들 정도다. 한 눈이라도 팔게 되면 잽싸게 다가와 낡아 채 가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사람이 원숭이 눈치를 본다

원숭이를 향해 고무총을 겨누고 있는 간디 아쉬람 주방에서 일하는 사내.
 원숭이를 향해 고무총을 겨누고 있는 간디 아쉬람 주방에서 일하는 사내.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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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어딜가나 원숭이들이 극성을 부린다.
 인도, 어딜가나 원숭이들이 극성을 부린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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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쉬케시 보다는 덜하지만, 북인도 코사니에도 원숭이들이 곳곳에 진을 치고 있어 문단속을 잘 하고 다녀야 한다. 요 며칠 전이었다. 원숭이가 숙소 앞, 집안에서 음식이 담긴 쟁반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뛰쳐나왔다. 프라이팬을 들고 원숭이 뒤를 쫓아 나오던 집 주인이 닭 쫓던 개처럼 우두커니 서서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도망쳐 나오던 원숭이가 손에 들려 있던 음식 쟁반을 휙 하니 집어 던지고 나무 위에 올라갔던 것이다.  

인도 원숭이 얘기를 주고받아가며 가텀씨와 함께 오후 산책길을 나섰다. 한적한 도로 저만치서 세 명의 아낙네들이 뜨개질을 하며 다가왔다. 인도의 아낙네들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한시도 일손을 놓지 않는 것 같다. 차마 그들 앞에 사진기를 들이댈 수 없어 머뭇거리고 있는데 가텀씨가 눈치를 채고 그 여인들에게 다가가 사진을 찍어도 괜찮겠냐고 양해를 구했다.

그중 한 아낙네는 부끄러운 낯빛으로 저만치 뒤돌아서 사진기를 피했고, 두 아낙네가 사진기 앞으로 다가왔다. 사진을 찍고 있는데 뜨개질 하는 아낙네들 옆으로 매끈하게 잘 빠진 승용차 한 대가 다가온다. 운전대를 잡고 있던 콧수염의 중년 사내가 가텀씨와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지나치자 가텀씨가 내게 말했다.

길을 걸어 가면서 뜨개질 하는 인도 아낙네들.
 길을 걸어 가면서 뜨개질 하는 인도 아낙네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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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사람은 코사니에 있는 작은 병원 의사라오. 저 승용차는 진통제로 구입한 것이라 할 수 있지요. 여기 시골 사람들이 아프면 독한 진통제 주사기를 꽂으니까."
"한국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시골 노인들에게 진통제를 만병통치약처럼 처방하는 의사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호텔 근처에 있는 빨래방으로 향했다. 가텀씨에게는 오래전부터 이용해 왔다는 단골 빨래방이 따로 있었다. 빨래방은 한국에서처럼 세탁기를 갖춘 곳이 아니다. 바라나시 강가에서처럼 모든 빨래를 온몸으로 해결한다. 수조 앞에는 호텔에서 나온 듯한 흰 침대 시트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다. 물 먹은 시트를 힘차게 내리치고 있던 빨래방 사내가 흰 치아를 내보이며 반긴다. 빨래방 사내는 열 두어 살쯤 돼 보이는 아들과 함께 빨래를 하고 있었다.

옆에서 보기만 해도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고된 노동일임에도 불구하고 빨래방 사내는 무엇이 그리 좋은지 내내 웃음을 내보인다. 사진기를 들이대자 창고나 다름없어 보이는 허름한 보금자리 앞에 서 있던, 갓난아기를 돌보고 있다는 그의 아내가 덩달아 환하게 웃어 준다. 이들 가족이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지 그 속내를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힘겨운 노동일을 하면서 뭐가 그리 좋은지 내내 웃고 있는 빨래방 사내와 그의 가족들
 힘겨운 노동일을 하면서 뭐가 그리 좋은지 내내 웃고 있는 빨래방 사내와 그의 가족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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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방이 딸린 방 한 칸에서 고된 노동으로 가난한 살림살이를 꾸려 나가면서도 환하게 웃고 있는 빨래방 가족에게서 오래전 우리 가족이 겹쳐 보였다. 도시 생활을 접고 다 쓰러져 가는 빈집을 수리해 가난한 산골 생활을 했을 때 우리 가족 또한 저들처럼 웃고 있었다. 하지만 허름한 시골집과는 비교도 안 되는 새로운 보금자리, 번듯한 목조주택에서 생활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집안에서 점점 웃음이 사라져 갔다.

우리 집 아이들은 비좁은 방 한 칸에서 네 식구가 잠들었던 그때 그 산골에서의 가난한 시절이 훨씬 더 행복했었다고 말한다. 새로 지은 번듯한 목조 주택에 맞춰 생활하려는 아내와 그러지 못하는 나와의 다툼이 끊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가텀씨의 빨래를 맡겨놓고 돌아서면서 빨래방 사내에게 '사진 찍게 해줘서 고맙다'며 공손하게 두 손을 모아 '나마스테' 인사를 나누고 다시 길을 걷는다. 저만치서 군용 트럭 한 대가 다가온다. 운전병이 멀리에서부터 나를 알아보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든다. 아침 산책길에서 거의 매일 같이 마주치는 운전병이다. 나는 그에게 늘 그래 왔듯이 합장으로 답례를 보내고 나서 사진기를 들어 보였더니 잠시 멈춰서 브이 자를 내보인다.

산책길에서 거의 매일 같이 마주치는 군용 트럭 운전병
 산책길에서 거의 매일 같이 마주치는 군용 트럭 운전병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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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길을 돌아 다시 코사니 상가 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는데, 구멍가게 앞에서 주름이 쭈글쭈글한 노인이 담배를 피워 물고 있다. 노인의 얼굴은 평온하지 않다. 무엇인가에 몹시 지쳐 있었다. 노인의 표정이 어딘가 모르게 밤마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나의 내면과 닮아 있었다. 

노인에게 다가가 사진기를 내보이며 사진을 찍겠노라 양해를 구하자 고개만 갸웃한다. 사진기를 들이대면 보통 사람들은 미소를 짓곤 하는데 노인의 표정은 그대로다. 사진을 다 찍고 나서 두 손 모아 합장하며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자 옆에 있던 가텀씨가 키득키득 거리며 말한다.

왜 아무에게나 인사를 하냐고?

길에서 만난 노인의 힘든 표정이 불면증에 시달리는 나를 닮았다.
 길에서 만난 노인의 힘든 표정이 불면증에 시달리는 나를 닮았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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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 송, 당신은 아무나 만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한다면서요."
"물론입니다. 내가 아무에게나 인사한 덕분에 여기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됐습니다."

카텀씨는 인도 카스트의 귀족 계급인 크샤트리아 집안이라고 한다. 그는 나처럼 음식값이 저렴한 노동자들이 즐겨 이용하는 식당을 찾는 소탈한 사람이었지만, 크샤트리아 계급이 몸에 배어 있어 그런지 길거리나 상가에서 아는 사람들을 만나면 먼저 인사를 하는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다. 그냥 가볍게 손을 들어 '헤이 잘 지냅니까?' 정도로 인사를 한다. 그런 그로서는 내가 남녀노소, 노동자, 농민 할 것 없이 길거리에서 만나는 그 누구에게든 공손하게 합장을 하며 인사를 하고 다닌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질 않는 모양이었다.

"코사니 사람들 중에 당신을 아는 사람들이 제법 있더군요. 당신이 보는 사람들 마다 인사를 하고 다닌다고... 코사니에 온 지 얼마나 됐죠?"
"한 달이 다 되어 가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온 중년 사내가 날마다 사진기 하나 챙겨 들고 할 일 없이 길을 걸으며 만나는 사람, 아무한테나 인사를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났던 모양이다. 가텀씨가 약간 비아냥거리는 듯한 말투로 킬킬거리며 그 말을 할 때 그가 명상가이기보다는 카스트 계급의 크샤트리아 귀족처럼 보였다. 나는 그런 그에게 분심을 내서 말했다.

"그렇습니다. 난 매일 아침 마다 산책을 나서면서 어른, 애, 여자, 남자, 별 볼일 없는 노동자에게 이르기까지 합장을 하며 나마스테 인사를 합니다. 하물며 개에게도 아침 인사를 합니다. 당신은 불교신자라고 했지요. 부처님께서 모두가 부처다 라고 말씀하질 않았나요?"

그가 내 영어를 알아들었는지 어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에게 건방을 떨어가며 했던 말에 얼굴이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그렇다고 내가 부처의 마음으로 사람들에게 공손히 인사를 하는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낯선 인도 사람들에게 인사를 나누는 것은 온전히 상대를 공경한다기보다는 당장 내가 편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그냥 멀뚱멀뚱 지나치는 것보다 서로 인사를 하고 웃음을 나누는 것이 마음 편하고 좋았기 때문이다.

문득 한국에서 낯선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허리 굽혀 합장을 하며 인사를 하고 다닌다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싶었다. 오래전에 세상을 떠난 덕망 높은 스님이 있었다. 사람들은 그 스님을 만나려면 불상 앞에서 삼천 배를 올려야 했다. 만약 그 스님이 법당에서 삼천 배를 하는 대신에 "애, 어른, 남자, 여자, 사람, 짐승 가리지 않고 길을 가다가 만나는 삼천 명의 생명에게 절을 하고 나서 나를 만나러 오라"라고 했더라면 어떠했을까라는 생각이 스친다.

상냥한 농촌 사람들과 달리 값비싼 호텔 이용객들은...

인도 사람, 특히 이곳 코사니 농촌에서 인사를 반갑게 받지 않는 사람은 열에 한두 명 정도다. 그들은 대부분 값비싼 호텔을 이용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건성으로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할 때 마다 조금은 기분이 상한다. 따지고 보면 나는 차별없는 불심으로 인사를 하고 다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서 웃음의 응답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었다.

뭔가를 바라는 만큼 괴로움이 찾아오기 마련이다. 뭔가를 바라는 마음을 털어내야 한다. 생각은 그리하고 있었지만, 막상 그런 상황이 닥치면 감정에 사로잡힌다. 작은 움직임에 일렁이는 호수처럼 내 마음은 금세 파동을 일으켜 반응한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은커녕 나 스스로 장막을 치고 있었다. 부처의 마음을 엿보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었다. 나는 나 자신의 안위에 갇혀 있었다.

나는 철저하게 이중적인 인간이었다. 겉으로는 공손하게 웃고 있었지만, 밤이 되면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에 대한 분노에 휩싸여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밤마다 찾아오는 불면증이 점점 심해지면서 몸이 쳐지고 눈조차 침침해지기 시작했다. 새벽 산책을 다녀오면 그나마 본래대로 눈이 회복되는가 싶다가도 밤이 되면 다시 눈이 침침해진다. 노트북 앞에서 돋보기안경에 의지하지 않으면 글씨를 읽어 내기 힘들 정도다. 거기다가 하루에 한두 끼, 그것도 채식위주의 식단이었기에 시력과 함께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요즘 불면증 때문에 몸이 약해졌어요. 고기를 먹어야겠는데..."
"고기가 먹고 싶다고요? 당신 채식주의자 아니었나요?"
"아닙니다. 체력이 떨어지면 가끔 고기를 먹습니다. 코사니에 닭요리 하는 식당이 없죠?"
"그런 식당은 없지만, 닭을 잡아 주는 곳이 있어요."
"요리 해 먹을 수가 없잖아요."
"철물점 부럼씨에게 부탁해 볼게요. 부럼씨 가게에 주방이 있으니까, 거기서 직접 요리하면 될 겁니다."

다음날 철물점 부럼씨가 앞니 빠진 얼굴로 씨익 웃으며 철물점을 비워놓고 자신을 따라오라고 손짓한다. 철물점 옆 건물의 계단을 내려가 보니 간이 침실과 주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다. 가스레인지가 갖춰진 기름때 묻은 그의 주방 선반에는 갖가지 양념들이 있었다. 그가 내게 물었다.

"닭 요리를 할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철물점 부럼씨네 주방에서 닭볶음탕을 요리했다.
 철물점 부럼씨네 주방에서 닭볶음탕을 요리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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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주방에 갖춰놓은 양념이며 재료들을 맘껏 써도 좋다며 닭을 잡아 주는 곳을 알려주었다. 코사니에는 돼지고기나 양고기를 판매하는 정육점이 없다. 고깃집은 노동자들이 즐겨 찾는 식당 옆에 자리한 두 평도 채 안 돼 보이는 생닭 집이 전부다. 나는 250루피 주고 닭 한 마리를 샀다. 그리고 식료품 가게에서 양파, 마늘, 감자, 질리(청양고추 보다 작고 매운 고추)를 사와 철물점 부럼씨네 주방으로 돌아왔다.

거의 매일 같이 만나는 락시미 아쉬람의 부럼 선생, 가텀씨 그리고 철물점 부럼씨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기 위해 잘게 손질한 닭 한 마리로 닭볶음탕을 요리했다. 감자를 큼직하게 썰어 놓고 우리의 마늘에 비해 그 크기가 네 배 정도 작은 마늘을 충분히 으깨어 넣었다. 인도 사람들이 좋아하는 카레도 넣었다. 카레를 너무 많이 넣었는지 온통 노랗다. 닭고기까지 그 노란 색감이 스며들었다.

거기다가 매콤한 인도 고추인 질리를 듬성듬성 썰어 넣었더니 칼칼한 맛이 났다. 내 입맛에 맞았지만 함께 먹을 인도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잠시 망설였다. 그들의 입맛에는 너무 매운 것 같아 작은 토마토 두 개를 썰어 넣었다.

닭볶음탕과 후 불면 날아갈 듯한 찰기 없는 인도 쌀을 안쳐 밥까지 해놓고 다들 불러들였다. 락시미아쉬람의 부럼 선생은 육식을 하지 않는 힌두교인이었고 철물점 부럼씨는 매운 고추가 너무 많이 들어갔다며 먹기를 꺼려했다. 가텀씨는 냄새가 아주 좋다고 해놓고 배가 불러 먹지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결국, 나 혼자 그날 저녁과 다음날 점심까지 두 끼를 먹었다. 그리고 다시 저녁 무렵에 부럼씨네 주방을 찾았다. 닭볶음탕을 했던 냄비가 설거지 된 상태로 말끔하게 비어 있었다. 철물점 부럼씨가 히죽히죽 웃으며 말했다.

이름이 같은 락시미 아쉬람의 부럼 선생과 철물점 부럼씨. 닭볶음탕으로 함께 식사를 하려 했는데 결국 혼자서 먹었다.
 이름이 같은 락시미 아쉬람의 부럼 선생과 철물점 부럼씨. 닭볶음탕으로 함께 식사를 하려 했는데 결국 혼자서 먹었다.
ⓒ 송성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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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다 먹었습니다."
"정말요? 매워서 먹기 힘들다고 했잖아요."
"맛있게 잘 먹었습니다."

닭볶음탕을 대접하겠다는 나의 성의를 무시할 수 없어서 먹었는지 아니면 몰래 버렸는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지만 나보다 영어 수준이 떨어지는 철물점 부럼씨가 자꾸만 히죽히죽 웃어댔다. 어쨌든 그 닭볶음탕으로 기력을 되찾았다. 새벽 산책길을 나서기 위해 몸을 일으킬 때마다 축축 쳐지곤 했던 몸에 힘이 생겼다. 기력을 되찾았지만, 식빵과 과일로 연명했을 때와는 달리 몸과 마음은 그리 개운치 않았다. 평소와는 달리 눈곱이 끼고 입안이 텁텁하고 머리가 묵직했다.

독으로 독을 치유한다는 말이 있다. 닭이 죽을 때의 독기가 내 몸속의 독소를 풀어낸 것인지 아니면 내 몸의 독기가 곱으로 쌓인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힘이 생긴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그 힘은 불면증과 분노를 이겨낼 수 있는 힘으로 작용하는 게 아니었다. 힘이 약할 때는 불면증에 지쳐 잠들곤 했지만 힘이 생기자 불면증과 분노는 더욱더 또렷하게 다가와 나를 괴롭혔다. 불면증과 분노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길은 육체의 힘이 아니라 마음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태그:#원숭이, #빨래방, #닭볶음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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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을 살리고 사람을 살릴수 있을 것이라 믿고 있는 적게 벌어 적게 먹고 행복할 수 있는 길을 평생 화두로 삼고 있음. 수필집 '거봐,비우니까 채워지잖아' '촌놈, 쉼표를 찍다' '모두가 기적 같은 일' 인도여행기 '끈 풀린 개처럼 혼자서 가라' '여행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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