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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 우리 가자"
"뭘?"
"어제 그거?"

아침에 눈 비비고 일어나는 나에게 아내가 말을 건네 온다. 어제 그거라니? 생각해보니 어젯밤에 아내가 내게 한말이 떠올랐다. 아하! 바로 그거를 말하는구나. 모처럼 휴일이라 잠자리에서 눈을 떠서 뒹굴뒹굴하려했더니, 나의 조그만 꿈(?)이 달아나버렸다. 난 아내의 명령(?)을 받자와, 화장실로 가서 간단히 세수만 하고, 마당에 있는 15인승(우리 집 자가용)에 시동을 건다.

그렇게 도착한 곳이 천년사찰 석남사(안성시 금광면 상중리) 바깥 주차장에 있는 은행나무 아래다. 석남사는 아내와 내가 평소 산행을 하는 서운산의 입구이기에 자주 지나가는 곳이다. 오늘 아내와 내가 '은행도'를 닦아야할 곳이다. 웬 '은행도'냐고? 조금 있으면 당신도 '아하'하실 게다.

천년사찰에서 아내와 '은행도'를 닦았다

천년사찰 석남사는 내가 사는 옆 마을 산중에 위치해 있어서 아내와 함께 산행하면서 자주 지나가는 곳이다. 아내가 그 절 바깥 주차장에 있는 은행나무를 평소에 봐둔 거다.
▲ 석남사 전경 천년사찰 석남사는 내가 사는 옆 마을 산중에 위치해 있어서 아내와 함께 산행하면서 자주 지나가는 곳이다. 아내가 그 절 바깥 주차장에 있는 은행나무를 평소에 봐둔 거다.
ⓒ 송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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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만반의 준비를 해왔다. 비닐을 크기대로 가져왔다. 장갑은 네 켤레를 가져왔다. 아마도 두 켤레는 실행용이고, 두 켤레는 예비용이리라. 그랬다. 아내는 그런 사람이다. 반면 나는 어젯밤에 "여보, 내일 우리 은행 주우러 석남사에 가자"고 한 말을 들었는데도 아무런 준비뿐만 아니라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남들은 절에 쉬러 오거나 불공 드리러 오거나 한다. 하지만 우리 부부는, 정확하게 말해 아내가 은행을 주우러 왔다. 나는 아내의 그 의지에 동원된, 한 명의 착한 인부다. 이런 형태의 작업은 23년째(결혼 23년차) 이루어진 일상이다.

우린 장갑을 끼고, 무슨 거룩한 수술대 앞에 서듯 은행나무 앞에 섰다. 이제 작업 시작이다. 아내는 아래쪽에서, 나는 위쪽에서 시작이다.

아무래도 의지가 강한 아내의 은행 줍기 속도와 의지가 약한 나의 속도는 차이가 난다. 아내의 비닐에 은행이 쌓이는 게 눈에 보일 정도다. 반면, 나의 비닐엔 "세월아 네월아" 소리가 들릴 정도다. 그렇게 느려도 아내는 아무런 눈총을 주지 않는다. '이렇게 따라와서 같이 줍기만 해도 아내가 그저 고마워한다'는 것을 서로가 잘 안다.

아내는 이미 은행줍기 삼매경에 빠진 듯하다. 나는 은행 줍다가 말고, 이렇게 사진이나 찍고 있는데, 아내는 전혀 흔들림이 없이 은행을 줍고 있다.
▲ 은행줍기 삼매경 아내는 이미 은행줍기 삼매경에 빠진 듯하다. 나는 은행 줍다가 말고, 이렇게 사진이나 찍고 있는데, 아내는 전혀 흔들림이 없이 은행을 줍고 있다.
ⓒ 송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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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신나게 은행을 줍고 있는 그때, 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린다. "탁탁탁탁". 그랬다. 석남사 스님의 아침 예불 소리다. 목탁소리가 주변의 고요함을 깨운다.

"여보! 저 소리가 이러는 거 같지 않아. '무상 무념 무욕.'"

그 거룩한 목탁소리에 토를 단 건 나였다. "이만큼이면 많이 주웠으니, 이제 그만 줍고 집에 가자"는 나의 투정을 담았다. "스님이 우리에게 무욕을 말씀해주시니, 은행에 대한 욕심을 그만 부리라는 계시"라며 내가 웃었다. 아내가 이 투정을 한방에 잠재우는 '촌철살인' 같은 한마디를 했다.

"여보! 난 못 들었어"

헐! 진짜 못 들었을까. 아니면 안 들었을까. 그것도 아니면, 못들은 척 한 걸까. 평소 아내의 스타일로 봐선 진짜로 못들은 듯하다. '못 들었다'는 말을 하는 아내의 얼굴이 '무상, 무념, 무욕'이었다.

그랬다. 나는 은행을 주우면서 잡생각을 하다 보니, 스님의 목탁소리가 들렸다. 반면, 아내는 이미 '은행 줍기 삼매경'에 들어간 거다. 그 일에 몰두하던 아내에겐 주변소리가 잘 들어오지 않은 거다. 평소엔 청력이 좋아 조그만 소리에도 반응을 잘하는 아내다. 평소엔 청력이 약해 주변 소리에는 둔감한 내게 오히려 목탁소리가 크게 들려왔던 거다.

은행나무 사이로 빛이 들어와서 아주 신비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오늘 아침 아내와 나는 이 나무 아래서 불도를 닦았다. 하하하하
▲ 은행나무 은행나무 사이로 빛이 들어와서 아주 신비한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오늘 아침 아내와 나는 이 나무 아래서 불도를 닦았다. 하하하하
ⓒ 송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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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를 보면서 '삼매경'의 경지를 새삼 실감해본다. '무상, 무념, 무욕'의 메시지는 사실 아내에게 필요한 게 아니라 나에게 필요한 메시지였다. '빨리 줍고 집에 가야지'란 생각에 빠져 현재에서 슬그머니 떨어져있던 나에게 말이다. 목탁소리를 듣던 내가 말을 바꿨다.

"여보, 저 목탁소리가 '으샤 으샤 으샤'라고 하는 거 같지 않아. 우리가 은행 줍는 거 힘내라고. 하하하하"

그렇게 생각을 바꾸니, 정말 그 목탁소리가 '으샤 으샤 으샤'로 들렸다. 목탁이 '무념, 무상, 무욕'이라는 말에서 스스로 '으샤, 으샤, 으샤'로 바꾸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심지어 그 목탁소리가 점점 빨라지기 시작한다. 스님 목탁소리에 맞춰 은행 줍던 우리의 손이 바빠진다. 아내가 빙긋이 웃으며 말을 한다.

"스님 머리에 잡념이 많으신가 보다"

우리는 아내의 '백만 불짜리 조크'에 한참을 배꼽잡고 웃었다. 내가 말을 시키기까지 '무념무상의 세계'에 있었던 아내가 이제 '중생의 세계'로 내려와 농담을 한 거다. 그러고 보니 바닥에 떨어진 은행도 마감되어가고 있다.

이런 생각이 우리 속에 흐르고 있을 즈음, 절에서 또 다른 소리가 들려온다. "댕 댕 댕" 그랬다. 범종 소리다. 아침 예불의 하이라이트일까.

"여보, 종쳤어. 이제 가자."
"그럼 종쳤으니 가야지"

나의 '조크'에 '응대 조크'를 날리는 아내. 우린 서로 조크를 날리며 또 한바탕 웃었다.

나의 바구니(비닐)에 들어 앉은 착한 은행들이다. 이 은행들은 까고 말려서 이웃과 친척에게 나누어질 예정이다.
▲ 은행 나의 바구니(비닐)에 들어 앉은 착한 은행들이다. 이 은행들은 까고 말려서 이웃과 친척에게 나누어질 예정이다.
ⓒ 송상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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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린 그렇게 가을산사에서 부처님의 은총(은행)을 한아름 안고 하산했다. "중생의 세계로 내려가 은총(은행)을 나누며 살아라"는 명을 받고서 말이다. 은행을 조금이라도 더 주우려는 아내의 본심이 그랬으니까.


태그:#은행줍기, #석남사, #아내, #송상호, #더아모의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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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서 목사질 하다가 재미없어 교회를 접고, 이젠 세상과 우주를 상대로 목회하는 목사로 산다. 안성 더아모의집 목사인 나는 삶과 책을 통해 목회를 한다. 그동안 지은 책으로는 [문명패러독스],[모든 종교는 구라다], [학교시대는 끝났다],[우리아이절대교회보내지마라],[예수의 콤플렉스],[욕도 못하는 세상 무슨 재민겨],[자녀독립만세]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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