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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영란 글·그림 / 반달 펴냄 / 2015.09. / 1만4000원)
▲ <어떤 날> (성영란 글·그림 / 반달 펴냄 / 2015.09. / 1만4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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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바꼭질하고 술래잡기를 좋아하는 아이들은 어른이 손을 재빠르게 놀려서 뭔가를 숨기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하곤 합니다. 두 손을 써서 구슬 감추기를 할 적에도 잘 못 맞히지요.

따로 숨바꼭질이 아니어도 집안에서 아무 말을 않고 조용히 어디엔가 숨으면 집에 아무도 없는 줄 알기도 합니다. 퍽 어린 두어 살이나 너덧 살 아이들도 어머니나 아버지가 뒷밭이나 뒤꼍 같은 데에서 조용히 풀을 베거나 씨앗을 심어도 집에 아무도 없는 줄 알곤 합니다.

시골집은 뒷간이 집 바깥에 있습니다. 볼일을 보러 뒷간에 웅크리고 앉아도 사람이 없는 줄 여기지요. 일고여덟 살쯤 되면 집안이 조용할 적에 '모두 어디 갔지?' 하고 두리번거리면서 찾지만, 나이가 이 밑인 아이들은 으레 울음부터 터뜨립니다.

"다들 어디 갔지?" - <어떤 날> 본문 4쪽 중에서

혼자 놀아도 재미있지만... 역시 '같이'가 더 좋다

속그림. 그야말로 심심하고 조용한 하루이다.
 속그림. 그야말로 심심하고 조용한 하루이다.
ⓒ 반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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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영란님이 빚은 그림책 <어떤 날>을 조용히 읽습니다. 전라남도 해남에서 어린 날을 보냈다고 하는 성영란 님은 어느 '어린 날'에 겪은 '어떤 날' 이야기를 조용히 들려줍니다. 조용하게 흐르는 이야기이니 조용하게 책을 넘기면서 시골 어린이 삶을 들여다봅니다.

아마 해남이 아닌 서울이라면, 강진이 아닌 부산이라면, 장흥이 아닌 인천이라면, 고흥이 아닌 대구라면, 사천이 아닌 대전이라면, 통영이 아닌 광주라면, 이처럼 조용하게 흐르는 이야기는 매우 드물거나 겪기 어려우리라 봅니다. 자동차 한 대도 어쩌다가 지나갈 동 말 동하는 시골마을에서 노는 시골 아이 삶자락이니, 어느 날 문득 "다들 어디 갔지?" 하고 두리번거릴 만합니다.

"혼자 노니까 재미도 없고." - <어떤 날> 본문 19쪽 중에서

속그림. 혼자 그네를 타지만 재미없다.
 속그림. 혼자 그네를 타지만 재미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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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낮잠이라도 자고 일어났을까요? 책이라도 빌려서 읽다가 문득 둘레가 아주 조용한 줄 느꼈을까요? 숙제를 하다가, 아니면 공부를 하다가, 아니면 혼자 소꿉놀이를 하다가, 아니면 혼자 가위로 종이인형을 오리다가, 내 둘레에 아무런 소리도 움직임도 없는 줄 느꼈을까요?

다른 때에는 혼자 놀아도 재미있습니다. 다른 때에는 혼자 뛰고 달려도 재미있습니다. 다른 때에는 혼자 북 치고 장구 치고 마음껏 놉니다. 다른 때에는 동무 생각은 아예 하지 않습니다. 다른 때에는 어머니도 아버지도 생각하지 않고 지냅니다. 그런데 둘레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 '어떤 날'에 비로소 나는 깨닫습니다. 이 땅에, 이 마을에, 이 집에, 바로 이곳에 나 혼자만 있지 않은 줄 깨닫습니다. 다 같이 어우러져서 마을을 이루고 보금자리를 이루며 삶을 이루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무슨 소리가 들리나?" - <어떤 날> 본문 22쪽 중에서

속그림. 동무들을 괴롭혀서 동무들이 모두 어디론가 숨거나 사라졌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속그림. 동무들을 괴롭혀서 동무들이 모두 어디론가 숨거나 사라졌는가 하는 생각을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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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따라 나선 작은 모험

아무라도 만나려고 집을 나섭니다. 누구라도 찾아보려고 고샅을 걷습니다. 땅바닥에 엎드려서 귀를 댑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구름을 헤아립니다. 아무도 안 보이는 '어떤 날'에는 구름조차 안 보이고, 바람조차 안 붑니다. 그야말로 고요하다 못해 스산하기까지 합니다.

이러다가 문득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들어요. 어디 먼 데에서 어머니가 나를 알아보고는 부릅니다. 나는 나를 부르는 소리에 번쩍 넋을 차립니다. 어머니한테 달려갑니다. 이윽고 동무들이 나를 부르는 소리를 듣습니다. 나는 어머니 손을 잡고 걷다가 자꾸 고개를 두리번두리번 돌립니다. 어머니는 빙그레 웃다가 내 손을 놓고, 나는 동무들이 부르는 곳으로 땀이 나도록 달려갑니다.

"다들 어디서 나타났지?" - <어떤 날> 본문 32쪽 중에서

속그림. 마치 울음이 터질 듯하던 때에, 문득 둘레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나타난다.
 속그림. 마치 울음이 터질 듯하던 때에, 문득 둘레에서 모든 사람들이 다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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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별나라에서 우주선이라도 날아와서 나를 살짝 데려갔다가 이곳에 도로 데려다주었을지도 모릅니다. 나는 마음속으로 아주 먼 어느 곳을 나들이하다가 문득 바로 이곳으로 돌아왔을는지 모릅니다. 나는 아스라한 옛날이나 앞날로 날아갔다가 조용히 이 자리에 다시 왔을는지 모릅니다.

아무도 알 수 없어요. 아무도 알 턱이 없습니다. 그러나 나는 마음속으로 오늘 하루 이야기를 가만히 아로새깁니다. 아리송한 어떤 날 이야기를 가슴에 묻습니다. 알쏭달쏭한 어떤 날 하루를 가슴에 씨앗처럼 심습니다. 나를 다시 보고, 어머니와 아버지를 다시 보며, 동무들하고 이웃들을 다시 보던 어떤 날 이야기를 고이 되새깁니다.

그림책 <어떤 날>은 우리가 늘 맞이하는 하루가 '늘 같지'는 않은 줄 넌지시 보여줍니다. 우리가 날마다 맞이하는 하루는 언제나 '오늘 하루'뿐이면서 '내 삶에서 꼭 하루'뿐이라는 대목을 살며시 그립니다.

가을볕이 마지막으로 힘을 내어 샛노란 들녘을 어루만지는 시월에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오늘 누릴 즐거움과 재미와 웃음을 새삼스레 헤아립니다. 밥 한 그릇 맛나게 비우고 마실을 다녀와야겠어요. 자전거를 꺼내어 천천히 논둑길을 달려야겠어요. 들내음을 마시고 가을바람을 먹으면서 햇볕도 듬뿍 쬐어야겠어요. 새로운 '어떤 날'로 내 가슴속에 드리울 수 있도록.

덧붙이는 글 | <어떤 날>(성영란 글·그림 / 반달 펴냄 / 2015.09. / 1만4000원)

이 글은 최종규 시민기자의 누리사랑방(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어떤 날

성영란 글.그림, 반달(2015)


태그:#어떤날, #성영란, #그림책, #어린이책, #시골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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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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