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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복지정책, 사사건건 충돌하는 이유

추석 연휴가 끝나자마자 이재명 성남시장은 기자회견을 통해 '청년 배당' 정책을 공식 발표했다. 성남시에 3년 이상 거주한 만 19세~24세 청년들에게 분기별로 25만원씩 1년에 총 1백만원을 지급한다는 내용이다. 전국 최초로 지방자치단체에서 기본소득 개념의 파격적인 복지정책을 들고 나온 만큼 예산 확보부터 실현가능성 여부에 관심이 집중된다. 필요한 재원은 113억원 규모. 벌써부터 찬반여론이 뜨겁다.

먹고 살기 힘들어지면서 사회복지에 대한 관심은 높아졌지만 정책화되는 과정은 험난하다. 아이들 무상급식을 하려고 해도 엄마들이 데모를 해야 하고, 가까스로 정책을 도입해놨더니 정권 바뀌자 손바닥 뒤집듯 뒤집어버리기도 한다.

무상보육은 다 가능할 것처럼 공수표만 던지다가 현실적인 벽에 부딪치자 책임을 회피하고 정책을 후퇴시켜 결국 애꿎은 부모들만 속앓이를 겪었다. 연금정책은 어떤가. 노인세대와 청년세대의 복지 불균등을 해소하려는 정책적 논의는 온데간데 없고 '세대간 전쟁'이라는 레토릭에 갇혀버렸다.

성남에서 추진하려는 청년 배당도 가능하기 위해서는 조례 제정부터 복지부의 동의까지 넘어야 할 산이 많다. 심지어 성남에서 조례 통과된 무상 공공산후조리원, 무상교복 정책도 복지부의 '불수용' 방침 때문에 시행되지 못하고 있지 않나. 하여간 뭐 하나 쉽게 되는 일이 없다. 

이재명 시장은 청년 배당 정책의 실현가능성 여부에 대해 "결국 철학과 의지의 문제"라고 강조했다. 철학과 의지의 문제? 그렇다. 한정된 예산을 투입하기 위한 정책의 우선순위를 결정하는 문제도 그렇거니와, 복지정책을 설계하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부닥치는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철학적 판단이 필요하다.

무상급식만 해도 그렇다. 부잣집 아이들에게까지 공짜밥 먹여야 하나라는 불만은 보편적 복지정책에 대한 이해도, 더 정확하게는 급여의 대상과 범위를 설정하는 문제에 대한 입장 차이로부터 파생된다.

그렇다고 모든 문제를 '철학의 빈곤'으로 소급해버리면 논의가 추상적으로 흐를 수 있다. 복지 정책의 실현 여부는 철학과 의지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사회구성원들의 합의 수준을 반영하지 않으면 안되는 현실가능성 탐색의 문제이기도 하다.

<복지국가의 철학> 표지
 <복지국가의 철학> 표지
ⓒ 인간과 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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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회대학교 신정완 교수는 책 <복지국가의 철학>에서 "물론 철학적 논의는 대체로 상당히 추상적인 수준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구체적인 정책 현안과 관련하여 직접적으로 도움이 되기 어려운 경우가 많을 것"이라며 "그러나 충실하고 깊이있는 철학적 숙고는 복지국가 문제와 관련하여 규범적 판단을 위한 나침반 역할을 할 수 있다. 따라서 견실한 철학적 원칙을 도출할 수 있다면 장기적으로는 사회적 의사결정에 필요한 시간과 비용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9쪽) 강조했다.

<복지국가의 철학>은 철학적인 차원에 초점을 맞추어 복지국가를 사유한다. 이는 개별정책에 대한 갑론을박을 넘어서 국내 복지 담론에 비어 있는 부분을 채우려는 의미있는 작업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다양한 철학저 조류들을 검토해 복지국가를 가장 합리적이고 견고하게 지지해 줄 수 있는 철학을 탐색한다.

또한 복지국가를 통해 실현할 수 있는 가치, 복지국가를 설계하고 운영하는 과정에서 직면하게 되는 철학적 문제를 다룬다. 더불어 흔히 말하는 복지국가란 '자본주의 안에서의 복지국가'이므로, 분배의 정의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평가하고 복지국가와 자본주의의 관계를 정리하고자 한다.

'분배의 정의' 관점에서 복지국가를 사유하다

저자가 보기에 복지국가를 가장 잘 뒷받침할 수 있는 철학적 입장은 롤스의 '정의론'이다. 현존하는 복지국가 유형 중에서는 북유럽식 사민주의적 복지국가가 롤스의 '정의론'에 가장 충실한 유형이라고 본다.

롤스의 정의론에 따르면 현실세계에서는 모든 개인이 만장일치로 합의할 수 있는 질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롤스가 보기에 어차피 존재할 수 밖에 없는 사회적, 경제적 불평등은 최소 수혜자 즉, 가장 열악한 집단에게 최대 이익이 되어야 한다는 '차등의 원칙'과 '공정한 기회 균등의 원칙'을 반드시 충족해야 한다.

개인들은 '우연히' 불리한 처지에서 태어날 수 있으므로 불이익을 최대한 줄일 수 있는 질서를 구축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강한 '평등주의'가 작동해야 한다. 롤스는 사회복지제도가 '차등의 원칙'과 '공정한 기회 균등의 원칙'을 실현할 수 있는 유력한 제도라고 봤다.

(기회의 평등이냐, 결과의 평등이냐의 문제에서) 사회적 경쟁과정에 진입하는 개인들의 출발선을 동일하게 해 주는 것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최종 결과까지도 어느 정도 평등하게 해 주어야 하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이 쟁점은 사실 정확하게 설정된 쟁점이 아닐 수 있다. 기회의 평등을 구현하기 위해서라도 결과의 평등이 상당 정도 확보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컨대 대학입시경쟁에 직면한 학생들에게 그들이 선호하는 대학에 진학할 기회의 평등을 제공하려면 그 부모들의 소득과 재산에서의 과도한 불평등이 억제되어야 한다. 즉 부모들에게 어느 정도 결과의 평등을 제공해야 자녀들이 실질적으로 기회의 평등을 확보할 수 있다. 결과의 평등을 경쟁조건의 차이의 해소라고 적극적으로 해석한다면 상속에 의한 경제적 불평등이나 선천적 재능의 차이로 인한 성과의 차이는 모두 재분배 정책을 통해 해소되어야 한다...(중략)... 결국 문제는 어느 수준까지 결과의 불평등을 수용해야 하느냐는 문제로 귀착된다. (112쪽)

저자는 "복지국가는 명백히 결과의 평등을 지향한다. 복지국가라는 것이 사회구성원의 복지의 증진을 지향하고 특히 사회경제적 약자의 복지 증진에 우선성을 두는 제도라면, 복지국가의 프로그램들이 장기적으로 사회구성원들의 복지를 가능한 많이 증진시킬 수 있어야 한다"며 "제도의 효율성과 지속가능성, 시장경제와 사회복지제도 간의 상호보완성 등 복지국가의 성과 문제도 중요하게 고려할 수 밖에 없다"고(113쪽) 설명했다. 사회경제적 약자의 처지를 얼마나 많이 개선할 수 있느냐의 측면에서 봤을 때 롤스식의 평등주의는 복지국가와 가장 큰 친화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복지제도 설계에서 핵심적인 문제는 정책의 수혜자 범위를 어디까지 설정할 것인가 하는 문제다. 사회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만을 집중적으로 지원할 것인가, 사회구성원을 포괄하는 것이 좋은가의 문제도 철학적 판단을 필요로 한다. 한국사회 복지논쟁의 단골 메뉴라 할 수 있는 '보편주의'와 '선별주의'에 관한 문제다. 무상급식 논쟁이 대표적이다.

현실에서 보편주의와 선별주의가 두부 자르듯 명확하게 구별되는 것은 아니다. 많은 사회복지제도들은 철저한 보편주의와 철저한 선별주의 사이에 위치한다. 예컨대 한국의 국민연금은 연금보험료를 납부하는 보험 가입자만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무상교육에 비해서는 선별주의적 제도라 할 수 있지만, 연금보험료 납부 외에 소득수준이나 노동능력 유무 등 다른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급여를 지급한다는 점에서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에 비해서는 보편주의적인 제도라 할 수 있다. 철저한 보편주의를 한 극단으로 하고 철저한 선별주의를 다른 쪽 극단으로 하는 폭넓은 스펙트럼 속에 다양한 사회복지제도들이 위치해 있는 것이다. (207쪽)

선별주의적 제도는 복지재원 1인당 소득재분배 효과와 빈곤층 지원 효과가 크지만, 복지재원 부담자와 복지수혜자가 확연히 구분되기 때문에 복지재원을 늘리기 어렵다. 보통 복지재원은 조세수입으로 충당하는데 선별주의적 복지제도 하에서는 혜택은 누리지 못하면서 비용만 부담하는 계층의 '조세저항'이 강해질 수 밖에 없다.

반면, 보편적 복지국가에서는 중산층도 복지 혜택을 누리기 때문에 복지국가 발전을 지지하게 되고 중산층과 빈곤층이 복지국가 발전을 지지하는 '복지동맹'의 구성원으로서 서로 연대할 수 있다. 스웨덴, 덴마크를 비롯한 북유럽 복지국가들이 대부분 보편주의적 복지제도를 채택하고 있는 이유다.

복지국가의 출발점에 서서

한국사회는 복지국가의 출발단계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사회경제적 양극화와 빈곤층의 확산으로 복지 수요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증세에 대한 거부감이 강하고 조세기반이 허약하니 복지에 대한 과감한 투자가 이루어지지 않는다. 한국의 복지지출 수준은 OECD 국가 중 최하위다. 복지의 사각지대가 넓고 사회적 안전망이 극도로 취약하다. 경제가 장기 저성장 국면으로 접어들면서 불안정 노동과 실업자가 증가하고 사회적 갈등도 점점 증폭되고 있다. 청소년과 노인 자살률은 세계 1위다.

1백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유럽 복지국가들의 프로세스를 따라가기에 한국의 상황은 그다지 여유롭지 않다. 유럽처럼 강력한 노동운동이 복지의 동력이 되어야 한다고 해서 10%의 조직력도 안되는 노동운동이 강해지기만을 기다릴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경제위기로부터 촉발된 다양한 사회적 갈등을 해결할 현실적인 해법도 '복지'에 있다고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오히려 고용보험 개혁을 통한 실업급여 확충과 같은 적극적인 복지정책으로 '사회임금'을 확대함으로써 노동운동이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할 수 있다.

복지에 대한 수요가 증가할수록 어떤 복지국가여야 하는가의 논쟁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저자의 말처럼 "충실한 철학적 숙고를 통해 얻은 견실한 철학적 원칙은 많은 정책 이슈들에 대한 판단을 인도하는 좋은 나침반 역할은 할 수 있다"는(308쪽) 점에서 활발한 토론이 필요하다. 다시, 이재명 성남시장의 말로 돌아가면 결국 복지는 철학과 소신의 문제다. 나아가서는 철학과 소신으로 대중을 설득하고 복지정책 도입에 관한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낼 수 있는 정치적 리더십이 절실하다.

덧붙이는 글 | <복지국가의 철학>(신정완 지음 / 인간과 복지 펴냄 / 2014. 3.)
이 기사는 이민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yes24.com/xfile340)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복지국가의 철학

신정완 지음, 인간과복지(2014)


태그:#복지국가, #보편주의 복지, #롤스의 정의론, #청년 배당, #무상급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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