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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번에 대통령으로서 이 금단의 선을 넘어갑니다. 제가 다녀오면 또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침내 이 금단의 선도 점차 지워질 것입니다. 장벽은 무너질 것입니다. 저의 이번 걸음이 금단의 벽을 허물고 민족의 고통을 해소하고, 고통을 넘어서서 평화와 번영의 길로 가는 그런 계기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지난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 2차 남북정상회담을 위해 군사분계선을 넘으며 했던 발언이다. 대한민국 대통령이 도보로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한 방문하는 것은 처음이라, 온 국민은 역사적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감격해 했고 주요 외신은 긴급뉴스로 보도했다.

2차 남북정상회담이 10.4선언으로 이어져 금방이라도 통일이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해 12월 한나라당(현 새누리당)이 대선에서 승리했고, 2008년 이명박 정부 출범으로 10.4선언은 휴지 조각이 되었다.

그 후로 7년이 흘렀다. 2015년 8주년을 맞아 10.4 선언의 의미와 현재 남북관계를 진단하고자 당시 특별 수행원이었던 이수훈 경남대 극동 문제연구소 교수를 지난 9월 30일 그의 연구실에서 만났다. 다음은 이 교수와 나눈 일문일답을 정리한 내용이다.

"2차 정상회담 당시, 대통령이 '짐 풀지 마라' 할 정도였다"

 이수훈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이수훈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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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4선언 8주년을 앞두고 있잖아요. 2007년 남북정상회담 당시 특별수행원으로서 느낌이 남다른 것 같습니다.
"2007년 10월에 노무현 대통령을 모시고 평양에 갔어요. 물론 북핵 문제도 있었지만,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 관계를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지 않겠느냐는 기대감이 컸어요. 그리고 그전에도 북한을 가긴 했지만 학자로서 평양을 방문하고 정상회담을 수행한다는 것에 감회가 남달랐어요."

- 언제 처음 북한을 방문했나요?
"2001년 8월 민족축전 때 많은 시민과 함께 평양을 방문했어요. 첫 방문은 8월이라 더웠는데, 민족축전이라 감정이 들떠 있는 상태였어요. 당시 8일 정도 북한에 체류하며 행사도 같이 하고 여기저기 둘러 보기도 해서 저 개인에겐 의미가 컸어요. 그러나 6년이 지난 2007년엔 정상회담 수행원이었기에 마음 자세가 달랐죠. 제가 단순히 방문하러 간 게 아니라 정상회담이라는 어마어마한 일을 하러 갔으니까요. 그리고 정상회담 성공을 위해 제 역할을 찾으며 긴장했던 것 같아요."

- 2차 남북 정상회담에는 어떻게 참여하게 됐나요.
"제가 당시 대통령 직속 동북아시대위원회 위원장이었어요. 동북아시대위원회의 주된 기능이 동북아의 대외전략을 짜고 그 안에 남북관계 발전을 위해 대통령께 드릴 보고서를 쓰고 정책도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당연히 정상회담에도 가게 된 거죠. 처음엔 제가 위원장이어서 공식 수행원으로 참석했어요. 그런데 공식 수행원에 경제부처 장관들을 많이 넣다 보니 자리가 없는 거예요. 전 공식 업무도 있지만, 학자면서 전문가라서 특별 수행원으로 조정되었죠. 정상회담 합의문 영문화 작업도 했어요."

- 회담을 지켜보셨을 것 같은데 (당시) 분위기는 어땠나요?
"제가 회담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고 대통령께서 회담 후에 저희를 만나서 설명을 했습니다. 초반 분위기는 좋았다고 할 수 없어요. 첫날 오후에 김영남 상임위원장과 회담할 땐 분위기가 안 좋았던 것으로 설명했고, 다음 날 오전에 김정일 위원장하고 회담했는데 그때도 썩 화기애애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노 대통령께서 공식 수행원들에게 '자칫 잘못하면 짐 싸서 내려갈 수 있으니 짐 풀지 마라'고 할 정도였어요."

- 왜 그랬나요?
"당시 제가 전해 들은 바로는 북측이 여러 불만을 갖고 있었던 것 같아요. 개성공단에 대해 불만이 많았다고 해요. 북한은 개성공단에 한국 대기업이 투자해서 큰 공단이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막상 들어온 건 중소기업이었고 제품도 의류, 신발이나 그릇 등이어서 자기들 기대와 다르다는 것이었죠. 거기에 남한이 세계를 다니며 개성공단을 선전해서 팔아먹고 다닌다는 것에 대해서도 불만이었어요. 즉 개성공단에 대한 인식차가 있었다고 해요."

- 그럼 어떻게 (분위기를) 풀었나요?
"노 대통령께서 둘째 날 김 위원장과 회담을 했어요. 점심을 옥류관에서 냉면을 먹었는데 그때 노 대통령이 저희에게 연설을 했어요. 그 가운데 기억에 남는 내용이 '역지사지'예요. 상대방의 입장에서 우리를 어떻게 보는지가 중요하고, 대화를 할 때는 '역지사지' 정신이 필요하다는 것을 무척 강조하셨어요. 그게 북한에 잘 전달되어서 마음을 움직인 것 아닌가 생각해요. 그날 오후에는 회담이 잘 됐어요."

- 직접 본 김 위원장은 어떤 사람이었나요?
"10.4선언에 서명하고 오찬을 같이 했어요. 제가 보기에 김 위원장은 남한의 현실을 잘 알고 있었고 또 성격이 화끈하고 상당히 활달해 보였어요. 왜 남한의 현실을 잘 안다고 하느냐면, 당시 베이징 올림픽이 2008년에 열릴 예정이었잖아요. 베이징 올림픽 관련해서 (남북) 단일팀, 그리고 각 응원단들이 서울과 평양에서 같은 기차를 타고 가는 방안을 논의했어요. 그건 스포츠 교류죠.

그때 김 위원장이 단일팀은 한국의 현실 여건상 불가능하지 않느냐는 거예요. 남한 선수들은 올림픽에 한번 참가해서 메달 따는 것이 어릴 적부터 목표일 텐데, 단일팀으로 북한 선수를 (한국 선수 대신 경기에) 못 보내지 않느냐는 거예요. 한국사회의 교육열을 잘 아는 거죠. 그래서 저는 그 사람이 한국사회에 대한 이해가 있다는 인상을 받았어요."

- 8년이 지난 현재 10.4선언의 의미는 무엇일까요?
"저는 가끔 이런 생각을 합니다. 8년이 지났고 그 선언에 여러 내용이 들어 있는데요. 이행된 것은 없지만 그래도 10.4선언은 우리가 가끔 꺼내봐야 할 고전 같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날 남북 간의 평화나 통일을 얘기하지만, 통일은 먼 것 같고 평화도 위태롭죠. 이런 상황에서 10.4선언을 한 번씩 꺼내보고 그 정신을 다시 되새기는 차원에서 현재적 의미가 있다고 봅니다."

- 2차 남북정상회담이 참여정부 막바지에 이뤄져서 열매를 맺지 못했잖아요. 더 일찍 했더라면 남북관계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어요.
"그것은 상당히 아쉬운 부분입니다. 왜 (정상회담을) 늦게 했냐면...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북핵 문제가 있었어요. 정치적인 환경이 성숙해지고 북핵 문제에서 진도가 나가야 정상회담을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 있어서 늦어졌죠.

정상회담이 2005년 가을 정도에 열릴 수도 있었어요. 그 해 9월에 '9·19공동성명'이 나왔잖아요. 공동성명 채택 당시 한국 언론의 열기가 대단했습니다. 북핵 문제가 해결될 줄 알았죠. 그때 9·19공동성명이 잘 이행됐다면 가을에 정상회담이 열릴 수도 있었어요. 그런데 공동성명의 잉크도 마르기 전에 미국 재무성이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은행에 있는 북한 계좌를 동결하는 사태가 발생했거든요. 그것 때문에 북미 간에 대립하고 서로 험한 말을 주고받으면서 9·19공동성명이나 6자회담이 진전을 보지 못한 거죠.

그래서 공동성명은 채택됐지만, 비핵화 진전이 안 되어 정상회담을 할 수 없었던 거예요. 그러다가 2006년 핵실험 하고 난 뒤 12월 북미가 접촉하고 합의를 해 2007년 2월에야 '2·13 이행 합의'라는 걸 만들어요. 그래서 2007년 10월에 (남북 정상회담을) 했죠."

"개성공단은 남북 관계의 리트머스 시험지"

 이수훈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이수훈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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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8월 목함지뢰 사태 이후 이뤄진 8·25 합의로 이산가족 상봉이 논의 중인데요. 현재 남북관계를 어떻게 보세요?
"현재 남북관계는 이명박 정부 말부터 한 치의 진전도 없지 않았나요? 남북 간의 대결 상태가 지속하는 가운데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었고 결국 지난 8월 준전시 상태까지 갔으니 남북관계가 원만하지 못한 거죠. 그래서 현재의 남북관계는 이명박 정부에서 한 치도 나아가지 않았다고 평가할 수 있어요. 대립과 대결이 현재 남북관계의 성격이라고 잘라 말할 수 있죠."

- 그러면 8·25 합의는 아무 의미 없다고 보세요?
"그런 건 아닙니다. 당시 남북이 전쟁 일보 직전까지 갔다가 테이블에 앉아서 대화를 통해 돌파구를 마련한 것은 중요하죠. 그것을 가지고 남북관계를 어떻게 발전시킬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합의한 지 한 달이 지났지만, 남북 간의 현실이 8·25 합의에 맞게 진전되지 않았다고 봅니다. 이건 상당히 우려할 만하죠. 지금 상당히 중요한 때인데 8·25 합의에 걸맞은 정책적 이행을 순조롭게 잘 관리하고 있느냐에 대해서 전 의문이 많아요."

- 많은 전문가는 8월을 (남북관계의) 골든타임으로 봤잖아요. 그럼 골든타임을 놓친 건가요?
"모든 일에 적기가 있죠. 8월을 골든타임으로 본 것은 8·15 경축사 같은 중요한 계기도 있으니 집권 후반기를 잘 풀어보라는 의미였습니다. 지뢰 사건을 계기로 남북 대화가 되어 합의가 나왔으니까 그 국면을 잘 넘긴 거죠. 지금도 골든타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또 놓치는 것 아닌가 하는 염려가 드는 거죠.

박근혜 대통령이 유엔에 가서 여러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 것을 북한이 전부 듣고 민감하게 반응하잖아요. 뉴욕이라서 많은 외교관이 가 있고 북한측 대사도 있는데, 이 사람들에게 한국 대통령의 연설과 행사에서의 발언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골든타임이라고 볼 수 있는데, 8·25 합의를 이행하면서 대통령의 행보가 대단히 중요하다는 거죠. 그런데 그 행보가 북한을 자극하는 식으로 되고 있지 않나 생각해요."

- 남북관계의 가장 큰 걸림돌은 5·24조치잖아요. 8·25 합의로 5·24조치 해제가 거론 되었지만, 다시 잠잠해요.
"5·24조치는 이명박 정부에서 천안함 사건을 계기로 내려진 조치인데, 이 정부가 왜 이렇게 껴안고 있는지 이해가 안 돼요. 얼마나 답답했으면 여당의 중진 의원도 5·24조치를 해제하라고 했겠어요. 5·24조치와 8·25 합의는 전부 어긋납니다. 5·24조치를 유지하고는 인도적 교류 못해요. 경제 협력도 못해요. 모든 걸 차단하는 게 5·24조치인데 그걸 유지하면서 다른 걸 하겠다니 충돌이 일어나요. 금강산 관광도 마찬가지죠."

- 앞서 북한은 개성공단에 대기업이 들어오지 않아 불만이라고 하셨어요. 이명박 정부 이후 개성공단이 삐걱거리는데 만약 대기업이 들어갔다면 함부로 폐쇄하지 못했을까요?
"맞아요. 지금은 대기업이 아니라 중소기업이 투자해서 움직이고 있죠. 하지만 이제 개성공단 못 닫아요. 북한이나 우리나 여기서 나오는 상호 이득이 상당히 크기 때문에 한쪽이 일방적으로 철수하라고 못합니다. 물론 북측이 박근혜 정부 초기에 근로자 철수를 감행했지만 그건 한국 정부의 의지를 시험하기 위해 찔러본 겁니다. 그래서 교훈을 얻은 게 있을 거예요. 개성공단은 이익이 훨씬 커요. 지금 정부에서 중소기업이라도 투자논리에 따라 철수 못합니다."

- 그래도 원래 계획보다 (개성공단이) 성장하지 못했는데.
"개성공단은 남북관계의 리트머스 시험지입니다. 그나마 유지되는 것은 누구도 파탄을 원치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지난 8월에 전쟁 위기가 고조되니 양쪽 다 감당이 안 됐잖아요. 그러니까 돌파구를 찾는 거죠. '상대방의 체면을 구기지 않고 어떻게 준전시 상황을 철회할 수 있느냐' 하는 물음의 결과물이 8·25 합의잖아요. 개성공단이 닫혔을 때는 파국적 상황을 맞게 되는 거죠. 오로지 전쟁만이 개성공단을 닫을 수 있다고 봅니다."

- 남북정상회담 가능성은 어떻게 보세요?
"잘 모르지만,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이렇습니다. 8·25 합의에 따라 이산가족 상봉도 원활히 이뤄지고, 5·24조치도 해제되고, 금강산 관광도 재개되고. 또 북핵 문제에 관한 6자회담이 재개되면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할 분위기와 동력이 만들어진다고 볼 수 있죠. 전문가로서 저는 정상회담을 하길 바라죠. 하지만 지금 분위기로는 어려워요."

○ 편집ㅣ김준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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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들의 궁금증을 속시원하게 풀어주는 '이영광의 거침없이 묻는 인너뷰'를 연재히고 있는 이영광 시민기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