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나이 서른넷 어느덧 벌써 30대 중반 나에겐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30대 중반 미친 듯이 일만 하며 살아온 10년이 넘는 시간 남은 것 고작 500만 원 가치의 중고차 한 대 사자마자 폭락 중인 주식계좌에 500 아니 휴짓조각 될지도 모르지 대박 or 쪽박

2년 전 남들따라 가입한 비과세 통장 하나 넘쳐나서 별 의미도 없다는 1순위 청약통장 복리 좋대서 주워듣고 복리적금통장 몇% 더 벌려고 다 넣어둬 CMA통장 손가락 빨고 한 달 냅둬도 고작 담배 한 갑 살까 말까 한 CMA통장 이자 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놈 가끔 연락이 와 자기는 노가다 한대 노가다해도 한국 대기업 댕기는 나보다 낫대 이런 우라질레이션 평생 일해도 못 사 내 집 한 채"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노랫말 중에서

폐기할 하드디스크를 분해해서 커버는 재생하고 나머지는 종류별로 박스에 담아 폐기시켰다.
 폐기할 하드디스크를 분해해서 커버는 재생하고 나머지는 종류별로 박스에 담아 폐기시켰다.
ⓒ pixabay

관련사진보기


용역 업체 파견사원으로 우리 집 근처에 있는 모 대기업에서 일을 하게 되었다. 이 일자리는 오전 8시까지 출근을 해서 오후 5시면 퇴근을 할 수 있었고 주5일 근무제라 주말은 쉴 수 있었다. 가끔 나에게 일을 시키는 그 회사 정규직원이 '잔업해서 돈 좀 벌어라'는 식으로 말할 때도 있었지만 순전히 내 의지에 따라 하고 말고가 가능했다.

나는 그 회사의 '스토리지 사업부' 건물 지하에 있는 창고 한쪽 귀퉁이에서 일을 했다. 그 창고는 그 회사에서 만든 컴퓨터 하드디스크 폐기 물량이 들어와 잠시 보관되는 장소였다. 이 창고에서는 나 포함 총 3명의 파견사원이 근무를 했는데 나머지 2명은 나와 담당하는 업무가 달랐다.

그 둘의 업무는 폐기할 하드디스크 물량이 입고 되면 가져와 모델별로 분류해서 보관하는 일이었고 내 업무는 하드디스크를 해체해서 재활용할 자재를 '재생'시키고 나머지는 폐기처리하는 일이었다. 나와 똑같은 업무를 담당하는 파견사원이 한 명 더 있었는데 그 사람은 2층에 있는 이 회사 정규직 사원들이 일하는 생산라인에 함께 섞여서 일을 했다.

그 사람은 당시 나이도 좀 있는 편이었고 일 잘한다는 소리를 자주 듣는 사람이었다. 그 이야기는 그 라인을 관리하는 정규직 관리사원들의 입에서도 자주 들렸다. 왜 그런지 봤더니 한 자리에서 2년 가까이를 그 일만 해온 사람이라 그랬다. 이제 곧 2년이 채워지는데 그는 내심 이 대기업의 정규직으로 '전환'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당시 비정규직으로 근무할 수 있는 최대 기간은 2년이었다.)

일을 잘한다고는 했지만 그 '일'이라는 게 그렇게 중요한 업무는 아니었다. 하드디스크 케이스를 '재생'하는 일이었는데 폐기할 하드디스크 중 깨끗한 케이스는 분리를 해서 앞에 붙은 라벨을 알콜과 커터칼을 이용해 제거하는 일이었다. 이 일에서 일을 잘하는 것은 커터칼을 이용해 라벨을 제거할 때 하드디스크 케이스에 스크래치를 남기지 않는 것과 빠른 손놀림으로 많은 양의 케이스를 재생시키는 것이었다.

그 별 거 아닌 일을 하면서 '잘한다'는 소리를 자꾸 들어서인지 그 사람은 계속해서 '헛된 희망'을 가지고 2년이라는 시간을 여기서 보낸 듯했다. 그 사람에게 '잘한다'는 말을 계속 하며 '희망고문'을 하는 사람들 중에 그를 그 회사 정규직으로 전환시킬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는데 그 사람은 그 헛된 꿈을 계속 꾸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몇 달 뒤 그 사람은 소리소문 없이 조용하게 그 회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는 또 다른 사람이 그 자리에 와서 그 일을 했다.

내가 처음 그 회사에 출근했을 때 내가 할 일에 대한 교육은 10분만에 끝이 났다. 그만큼 단순한 업무였다. 단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얼마나 빠르게 할 수 있는지 숙련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 회사를 다니는 몇 달 동안 세월아 네월아 하면서 다른 2명이 하는 일을 도와주며 '농땡이'를 부렸고 내가 거기서 농땡이를 부려도 아무런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감히 '을' 주제에 어디서 일을 시켜?

하루에 2번 클린룸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받아서 폐기물 처리장에 가져다 버려야 했다.
 하루에 2번 클린룸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받아서 폐기물 처리장에 가져다 버려야 했다.
ⓒ pixabay

관련사진보기


하드디스크를 해체해서 케이스를 재생하고 나머지 자재들은 종류별로 큰 박스에 모아서 폐기하는 장소로 옮겨 놓는 것이 내 주 업무였다. 그리고 한 가지 업무가 더 있었다. 하루에 두 번 2층에 있는 '클린룸'에 올라가서 나오는 폐기물 쓰레기를 가져와 폐기물 버리는 곳에 버리는 일이었다.

이 일은 내가 근무하던 창고 옆방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정규직 여사원이 나에게 알려 주었다. 첫날 그 여사원을 따라 클린룸으로 올라갔고 봉지에 담겨져 나오는 쓰레기를 받아 들고 폐기물 처리장으로 가서 버리는 일을 했다. 이렇게 오전 10시와 오후 3시 2번 클린룸에 올라가서 쓰레기를 가져와 버리면 된다고 했다.

그 일 이외에도 옆방 여사원은 나를 종종 불러서 부리곤 했다. 그러다 딱 한 번 내가 그 여사원에게 폐기물 처리하는 일을 대신 해달라고 부탁했다가 엄청난 욕을 들어 먹었다. 하드디스크 커버 재생하는 일이 급하다고 해서 시간에 쫒기다 폐기물 처리할 시간이 되어서 어렵게 부탁을 한 건데 그 여사원은 딱잘라 '그건 네 일'이라며 거절했다.

자기보다 나이도 한 살 더 어린 파견직 따위가 대기업 정규직 사원에게 일을 시키려고 했으니 얼마나 괘씸하게 생각했을까 싶다. 그 사건이 있은 뒤로는 절대 '갑'들에게 어떤 부탁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책임감을 가지지 말고 시키는 일만 적당히 대충하기로 마음 먹었다.

마음을 고쳐먹고 정해진 일만 '적당히' 하니 누구하나 뭐라 하는 사람이 없어서 편했다. 나와 같은 창고를 쓰는 2명의 파견 사원들도 좋은 사람들이었고 금세 친해져서 뭉쳐 다녔다. 그리고 폐기물 처리장에서 근무하는 또 다른 파견사원을 만났는데 그 사람은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학비를 벌기 위해 여기에 취직을 했다고 한다. 그 사람과 나는 둘 다 '농구'를 좋아해서 금방 친해졌고 점심시간이면 회사 운동장에 있는 농구장에서 함께 농구를 하곤 했다.

하루종일 숨쉴 틈 없이 계속해서 움직여야 하는 생산직보다 이렇게 나에게 자율성이 주어진 일이 훨씬 하기 좋았다. 예전에 부산에서 직장생활을 할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나는 생산라인에서 일하는 게 내 적성에 맞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닫는 계기가 된 시간이었다.

덧붙이는 글 | 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듣는 곳
http://www.bainil.com/album/365



태그:#대기업, #파견, #재생, #하드디스크, #폐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레드콘텐츠 대표 문화기획과 콘텐츠 제작을 주로 하고 있는 롯데자이언츠의 팬이자 히어로 영화 매니아, 자유로운 여행자입니다. <언제나 너일께> <보태준거 있어?> '힙합' 싱글앨범 발매 <오늘 창업했습니다> <나는 고졸사원이다> <갑상선암 투병일기> 저서 출간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