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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0만 관객들은 간난산고의 삶을 살아온 아버지들에게 영화 <국제시장>을 눈물로 바쳤다. 타국 막장에서 사투를 벌이는 파독 광부들의 처절한 장면에선 눈물바다가 됐다. 파독 광부 아버지의 삶은 조명됐지만 진폐증과 생활고에 시달리는 광부 아버지들의 삶은 외면당했다. 막장에서 캐낸 석탄으로 춥고 허기진 시대를 달래준 왕년의 산업 전사들의 삶을 3회 연재한다. - 기자 말

사북, 삶과 죽음의 터전

내국인 카지노가 있는 강원랜드는 광부들의 삶과 죽음이 베인 폐석더미 위에 지어졌다. 좌측이 폐석더미이고 우측이 강원랜드다.
 내국인 카지노가 있는 강원랜드는 광부들의 삶과 죽음이 베인 폐석더미 위에 지어졌다. 좌측이 폐석더미이고 우측이 강원랜드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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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국인 전용 카지노 강원랜드의 지난해 매출액은 1조4220억으로 외국인 전용 카지노의 매출액(1조3772억)을 추월했다. 지난 한해 300만7000명이 강원랜드를 다녀갔다. 고급 호텔과 리조트 등이 있는 강원랜드 일대는 천혜의 경관이다. 강원랜드는 강원도 정선군 사북읍에 있다. 사북, 자본주의 수혜자들에겐 낙원이지만 피해자들에겐 피눈물의 땅이었다.

1960년대 개발돼 2004년 폐광되기까지 동원탄좌 사북광업소는 국내 최대 민영탄광으로 3500여 명의 광부들이 연간 200만 톤의 석탄을 생산했다. 채탄과 선탄 과정에서 폐석(버럭)이 발생했다. 40여 년간 버리고 쌓인 폐석은 버럭더미가 됐다가 거대한 산을 이루었다. 그 자리에 강원랜드가 들어섰다.

사북은 삶과 죽음의 터전이었다. 지하 수백~수천 미터의 지옥 막장, 40~50도의 지열과 붕괴 위험, 탄가루와 돌가루, 화약연기 속에서 석탄을 캐내던 광부들은 죽거나 중경상을 당하거나 진폐증 환자가 됐다. 버려져 쌓인 버럭더미와 거대한 산엔 광부들의 삶과 죽음, 피눈물이 배어 있다. 

지하 탄광뿐 아니라 지상의 생활터전도 비참

막장 지옥에서 살아 남은 광부아버지들. 우측부터 박균집(82), 김명성(68). 최순길(80), 김재일(66), 전호현(77)씨
 막장 지옥에서 살아 남은 광부아버지들. 우측부터 박균집(82), 김명성(68). 최순길(80), 김재일(66), 전호현(77)씨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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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광도시 태백과 정선은 산업화의 밑불이었다. 팔도에서 모여든 사나이들로 흥청망청, 개도 지전을 물고 다녔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런데 석탄이 시대의 뒤안길로 밀리면서 폐광지역이 됐다. 광산업주, 전표장사, 취업브로커 등은 한몫 챙겨 떠났다. 숨이 가뿐 진폐증 환자와 늙은 광부 그리고 가난한 산골 사람들은 남았다.

지난달 3일과 4일, 강원도 태백과 정선에서 떠나지 못한 사람들을 만났다. 이어 지난달 15일 여의도 국회 앞에선 진폐제도개선을 촉구하기 위해 상경한 진폐증 광부아버지들을 만났다.

(사)광산진폐권익연대 회장 최순길(80)씨는 1968년 태백골 황지광업소에서 덕대(광산 하청업자) 밑에서 잡부로 광산 생활을 시작했다. 굴진 후산부로 하루에 12시간 맞교대로 일했다. 땀범벅 석탄범벅의 중노동을 한 달 평균 28일, 심할 때는 만근까지 했지만 가족 생계를 책임지진 못했다.

당시에는 탄을 캔만큼 일당을 주는 도급제였다. 일당은 돈이 아닌 전표(錢票)로 지급됐다. 광업소는 배급소를 운영했다. 배급소에서 쌀과 식료품 등을 전표로 바꿨다. 술집에선 술값 대신 전표를 받았다. 전표는 광산의 화폐였다. 큰 광산은 전표라도 주었지만 중소 광산과 덕대들은 종종 부도내고 도망갔다.

"당시엔 쌀이 아주 귀했어요. 쌀밥 먹는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쌀밥은 광산에 일하러 가는 가장에게만 주고 가족들은 죽어 쑤어 먹었습니다. 가족이 아프거나 급전이 필요하면 전표를 20~30%, 심할 경우엔 30~50% 깎은 헐값에 팔았습니다. 팔았다기보다 뜯겼다고 해야 맞습니다."

최씨의 증언이다. 이중삼중 착취당하던 시대였다. 광부들이 거주하던 사택촌은 집단수용소나 다름없었다. 가구당 주거면적은 5~6평, 30~40가구가 공동변소를 이용해야 했고, 공동수도를 이용해야 했는데 그마저 제한급수였다. 지하 탄광뿐 아니라 지상의 생활터전도 비참했다.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현장. 지금은 석탄역사 체험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현장. 지금은 석탄역사 체험장으로 이용되고 있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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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태백시 황지동 대조봉 산기슭에 위치한 산업전사위령탑. 탄광 사고로 순직한 광부들의 위폐가 안치돼 있다.
 강원도 태백시 황지동 대조봉 산기슭에 위치한 산업전사위령탑. 탄광 사고로 순직한 광부들의 위폐가 안치돼 있다.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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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부아버지들은 지하 막장을 지옥이라고 표현했다. 광부는 족쇄 없는 노예였다고 했다. 저승사자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고 했다. 한해 평균 200명의 광부가 목숨을 잃었고, 5000여 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1960년부터 광부생활을 시작한 30년 경력의 퇴역 광부 박균집(82)씨의 증언이다.

"400여명 광부 중에서 고졸 3명, 중졸 2명, 국졸 100여 명, 나머지는 무학이거나 초등학교 중퇴였어요. 도급제였기 때문에 작업복 등짝에 소금꽃이 피도록 일했습니다. 지하 막장은 지옥이었고, 광부는 노예였습니다. 갱내 폭발사고 등으로 죽으면 개죽음이었죠. 보상으로 쌀 몇 가마니 주고 말았어요. 억울하다고 따지지도 못했습니다. 어용노조와 노동부는 사업주 편이었으니까요."

광산 사고로 남편을 잃은 부인은 선탄부에서 일했다. 광업소가 겨우 베푼 특혜였다. 검은 탄가루에 뒤덮인 광산촌은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광부의 아내 가운데 바람난 여자가 적지 않았다고 했다. 버려진 아이들은 고아로 떠돌기도 했는데, 눈뜨고 못 볼 지경이었단다. 박씨의 말을 더 들어보자.  

"광산쟁이 비극은 3대로 이어졌어요. 내가 못 배우고 가난했으니 아들도 가난하고 못 배웠고, 손주에게까지 가난과 못 배움이 대물림됐습니다. 광산쟁이 집안에서 자식을 고등학교까지 가르친 경우는 별로 없었어요. 죽도록 일해도 가난에서 벗어날 수 없는 광산쟁이의 삶이었습니다."

선망의 일터였지만, 이곳은 '막장'이었다

국내 최대 민영탄광이였던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현장. 광부들의 애환이 담긴 이곳은 석탄역사 체험장이 됐다.
 국내 최대 민영탄광이였던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현장. 광부들의 애환이 담긴 이곳은 석탄역사 체험장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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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광업소와 동원탄좌 등의 국영기업과 대기업 광업소는 선망의 직장이었다. 교사보다 월급이 많았다. 장성광업소에 다니면 서로 딸을 주려고 했다. 술집에서도 외상을 척척 주었다.

전호현(77)씨는 탄광에 취업하려다 고향 선배가 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포기했다. 하지만 광부만한 벌이가 없었던 시대, 전씨는 1964년 삼척탄좌에서 광부생활을 하다 꿈에 그리던 장성광업소로 옮겼다. 열아홉 살부터 굴진부 생활을 한 김재일(66)씨의 말이다.

"당시에는 농사를 아무리 열심히 지어도 쌀밥을 못 먹었어요. 하지만 광산에서 일하면 쌀밥을 먹을 수 있어서 논밭을 팔아서라도 광산에 입적(취업)하려고 했어요. 장성광업소에 입적하려면 브로커에게 제법 큰돈을 줘야 했습니다."

선망의 일터였지만 막장 아닌 막장은 없었다. 김씨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90도 굴진을 위해 사다리 타고 천공(구멍 뚫기)을 하면 돌이 우수수 떨어지는데 안전모도 방진마스크도 없었어요. 수건에 물을 적셔서 입을 가리는 게 전부였어요. 주어진 생산량을 채우기 위해 마스크 없이 일했고, 동료가 죽은 자리에서 또 일해야 했습니다."

안전교육은 있었다. 안전구호와 표어가 도처에 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눈 속임수였다. 광부의 안전과 보건, 건강은 관심 밖이었다. 분진예방과 환기시설, 살수장치를 했다면 진폐환자 3만 명까지 야기됐을까? 정부당국과 광업소는 석탄증산이 애국이라며 채찍질했다. 김씨의 거듭된 증언이다. 

"갱내 입항 전에 안전교육을 시키긴 했습니다. 안전교육 받은 대로 탄을 캐면 항장(항내책임자)이 생산량을 달성 못했다고 조졌습니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작업하다 다치고 죽었습니다. 하루에 2, 3군데 발파만 해야 되는데 4, 5곳을 발파했습니다. 명칭만 안전이었죠.

영화 <국제시장>에선 갱내 사고가 발생하면 사이렌 소리가 울리고 구급차가 오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어요. 작업에 지장이 있을까봐 사고 사실을 알리지 않았습니다. 옆 갱에서 다치고 죽어도 작업했습니다. 갱 밖으로 나와서야 누가 죽었다는 것을 소문으로 들었으니까요."

화전민 아들의 가슴 아픈 증언

강원도 정선 삼탄아트마인에 전시된 광부의 초상
 강원도 정선 삼탄아트마인에 전시된 광부의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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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성(68)씨는 열네 살부터 삼척 도계 신포광업소에서 선탄작업을 했다. 그러다 돈을 더 준다고 해서 막장에 들어갔다. 소년은 막장에서 죽음 못지않게 무서운 삶을 경험했다. 소년광부였던 김씨의 증언이다.

"갱내에 들어가면 캄캄해서 앞이 안 보입니다. 돌가루, 탄가루, 화약 냄새에다 땀이 범벅돼 숨쉬기가 힘들어요. 동발(갱목)이 우지직하고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일했어요. 죽을 수도 있었지만 탄을 캐지 못하면 빈 손으로 돌아가야 했는데 그게 더 무서웠어요. 목숨보다 끼니가 더 중했으니, 저승사자가 따라 붙어도 죽기 살기로 탄을 캤습니다."

화전민의 아들인 김씨는 공부를 잘했다. 소에게 풀을 뜯기고 동생을 돌보는 틈틈이 공부를 해서 1, 2등을 다투었다. 김씨가 가슴 아픈 이야기를 꺼냈다.

"당시는 시험 쳐서 중학교를 갔는데 담임선생님이 너는 공부를 잘하니까 중학교에 가야한다면서 시험장에서 저를 기다렸는데 저는 그 시간에 저탄부에서 돌을 줍고 있었어요. 사친회비(학교가 학부형들로 부터 거두어 들인 돈)가 밀리고 끼니가 어려우니 공부만 할 수 없었어요. 지금도 그 시절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눈시울이 붉어진 광부아버지)."

강원도 태백시 황지동 산업전사위령탑 옆에 설치된 진폐재해순직자위령비를 안내한 소년광부 출신 김명성씨.
 강원도 태백시 황지동 산업전사위령탑 옆에 설치된 진폐재해순직자위령비를 안내한 소년광부 출신 김명성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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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가 가슴 아픈 이야기를 하나 더 들려주었다.

"가족들은 쌀이 없어 밀기울로 죽 끓여 먹었는데 광산에 일 간다고 저에게만 특별히 도시락을 싸주었어요. 죄송했지요. 그 소중한 도시락을 품에 안고 광산에 가서 일하다 돌아와서 먹으려고 찾으니 누가 훔쳐가서 없어졌어요. 그게 어떤 도시락인데…(눈물 훔치며) 피눈물 났지요."

김씨는 아내와 함께 경동탄좌에서 일했다. 아내는 선탄부에서 그는 갱내에서 일하면서 아들(42)은 석사까지 공부시켰고, 유명 약대를 졸업한 딸(40)은 연구원이 됐다. 그리고 광부아버지는 진폐환자가 됐다. 진폐 3급 중증 산재 환자인 광부 아버지의 소원을 들어보자.

"자식농사도 잘 지었고 아내와도 화목하니 손주를 보는 즐거움에 절로 웃음이 납니다. 이 좋은 세상을 더 즐기다 가고 싶은데 진폐병은 불치병이니 아무리 치료해도 소용없고 진폐로 언제 어떻게 끝날지 모르니 참 불안해요. 자식 손주와 놀러 다니면서 맛있는 것도 먹고 싶은데…."

인간다운 삶을 살다 떠나게 해주세요!

2015년 9월 15일 여의도 국회 앞에서 갱목시위 하고 있는 김재일씨
 2015년 9월 15일 여의도 국회 앞에서 갱목시위 하고 있는 김재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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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백에서 만났던 김재일(66)씨를 지난 15일 국회 앞에서 다시 만났다. 폐렴을 진폐합병증으로 인정하라고 요구하기 위해서다. 김씨는 27년 경력의 광부로 진폐 13급 환자다. 김씨는 이날 국회 앞에서 갱목 시위를 했다. 갱목은 갱도가 무너지지 않게 받치는 나무 기둥이다.

갱목 시위는 2개의 갱목을 묶은 다음에 등짐으로 지고 걷거나 아스팔트 바닥을 긴다. 2개의 갱목 무게는 60~70kg이다. 몸도 성치 않은 진폐환자가 무거운 갱목을 지고 아스팔트를 걷고 기다니?

왜 갱목시위 하냐고 물었다.

"진폐증 환자 중 상당수는 폐렴으로 사망합니다. 진폐증 환자는 유족보상금과 장제비를 지원받고 떠나니 그나마 다행인데 진폐의증(진폐장해 전 단계) 환자는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니 유족들의 생활고와 슬픔은 눈뜨고 못 볼 지경입니다. 진폐 13급을 받은 동료는 얼마라도 받고, 의증 환자는 한 푼도 받지 못하니 비극입니다.

13급과 의증의 차이는 별로 없는데 그렇습니다. 폐렴이 진폐합병증에 포함되지 않음으로 인해 생활고와 투병의 이중고에 시달리다 한을 남기고 세상을 떠납니다. 갱목시위라도 하지 않으면 진폐환자들의 억울한 사정에 누가 귀 기울겠습니까? 그래서 합니다."

광산진폐권익연대 회장 최순길씨, 진폐 7급인 늙은 광부 아버지의 호소를 들어보자.

"진폐환자 대부분은 일제시대와 한국전쟁, 보릿고개를 힘겹게 버텨온 70대, 80대 고령으로 많이 살아봐야 5~10년 지나면 대부분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늙고 병든 광부 아버지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다 떠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나라가 이젠 살 만해졌잖습니까?"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막장으로 들어가는 터널.
 동원탄좌 사북광업소 막장으로 들어가는 터널.
ⓒ 조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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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장지혜 기자




태그:#광부, #막장, #강원랜드, #진폐증, #갱목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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