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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로부터 해방된 지 70년. 우리 현대사는 유례없이 빠른 경제성장을 일구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을 소유한 이들의 학살, 내란, 부정선거, 고문과 각종 인권유린으로 점철된 오욕의 역사이기도 하다. <오마이뉴스>와 '(가칭)반헌법행위자 열전편찬준비위'는 뒤틀린 우리 역사의 문제점을 되짚어 보고, 역사의 정의를 다시 세우기 위한 운동을 촉구하는 기획 인터뷰를 연재한다. [편집자말]
'삼척 일가족 간첩단 조작 사건' 피해자 김순자씨.
 '삼척 일가족 간첩단 조작 사건' 피해자 김순자씨.
ⓒ 김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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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도 "잡혀갈까 무서워서 하고 싶은 말을 다 못하겠다"라고 했다. 얘기 도중에도 몇 번이나 움츠러드는 바람에 인터뷰가 힘들었다. 그런 그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 다 할 수 있는 날이 올 것"이란 기약 없는 위로를 할 수밖에 없었다.

이해가 갔다. 11년 만이었다. 그들은 기억도 하기 힘든 일을 가지고 붙잡혀 모진 고문을 당했다. 먼저 가족들이 사라졌다. 어디로 갔는지, 누가 잡아갔는지도 몰랐다. 답답한 나날이었다.

가족들이 사라진 지 일주일 후, 건장한 체격의 남자 둘이 찾아왔다. 그렇게 김순자씨는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갔다. 그가 끌려간 '대공분실'은 영화에 나오는 그곳과 똑같았다고 했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가 그의 가슴을 후볐다.

'1979년 삼척 일가족 간첩단 사건'의 피해자 김순자씨를 지난 9월 24일 망원동 '지금 여기에' 사무실에서 만났다. '지금 여기에'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못다 한 활동을 이어가기 위해 만들어진 시민단체다. 이들은 과거 '간첩 조작' 사건 피해자들의 재심을 돕고 기록하며 심리치료 등을 통한 지원 활동을 펼치고 있다.

옛 신문에서 찾은 당시 김순자씨의 죄목은 '지하조직 기반구축'이었다. 좀 더 세부적으로 살펴보면 "북괴의 지령에 따라 군사기밀을 탐지 보고"하고 "소요를 배후선동"했단다.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났다. '간첩단 일망타진'이란 헤드라인이 이토록 안 어울리는 사람이 또 있을까. 입을 떼기 힘들어하는 그를 겨우 설득해 인터뷰를 시작했다.

"모르면서 '있을 것이다'라고 잡아가는 거죠"

- 다짜고짜 끌려가셨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상황을 설명해 주시지요.
"1979년이에요. 저는 영등포에서 보험회사를 다니고 있었어요. 어느 날 갑자기 회사 사무실로 사람들이 왔어요. 두 사람이 와서 (제 몸) 양쪽을 잡고 끌고 가는데 어디 가는지 말도 안 해줬어요. 지금 보니까 남영동 거기에요. 영화에 나오는 거 봤는데 저 있던 데랑 똑같더라고요. 책상 있고, 욕조 있고."

- 가족 전부가 그런 일을 겪으셨는데요.
"가족들은 저보다 일주일 정도 먼저 잡혀갔어요. 왜 잡혀갔는지, 어디로 갔는지도 몰랐어요. 강원도에 있던 아버지랑 어머니 다 잡혀가고 동생은 다니던 건설회사 사무실에서 잡혀가고요. 가족들이 다 사라졌는데 어디로 갔는지도 몰라요. 당시에는 어떻게 알아봐야 하는지도 모르고 혼자 끙끙 앓았어요.

옆에 있던 사람들이 '누가 잡아갔다'고 하니까 알았죠. 올케가 그때 아기를 낳았어요. 한 달 정도 지났나. 아기 낳고 친정 동생한테 갔었는데 저녁에 집에 가니까 다시 서울 집에 올라와 있더라고요. 물어보니까 '애기 아빠를 사람들이 잡아갔다'고 그래요. 깜짝 놀랐죠. 그때 동생이 오토바이 타다 사고가 난 적이 있는데 그 일 때문인가 싶기도 했어요."

- 도대체 무엇 때문이었답니까.
"잡혀가기 11년 전이죠, 1968년도. 애기 낳고 친정에 갔다가 아버지 사촌동생이란 분을 만났어요. 저는 잠깐 뵙고 다시 집에 왔죠. 시댁 와서 애기 셋 낳고 쭉 살았어요. 그게 다예요."

- 그럼 그 분을 만난 사람은 다 잡혀간 건가요.
"아마 그게 30명도 넘을 거예요. 가족이라고 하면 다 끌려갔으니까요. 아버지 사촌동생이 형제가 9남매래요. 형제는 다 끌려갔고요. 형제만 끌고 갔겠어요? 조금이라도 뭐가 있으면 다 끌고 가는 거예요. 연관이 있든 없든. 연관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죠. 모르면서 '있을 것이다'라고 잡아가는 거죠.

다 잡아가서 이리로 저리로 다 흩어놨어요. 나중에 사건을 맡았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조사관이 그래요. 끌려온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흩어놓고 조사할 수밖에 없었다고요. 나중에 재판받고 나서야 알았어요.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잡혀갔는지요."

- 힘드시겠지만 '남영동'에서 겪으신 일을 말씀해주실 수 있나요.
"아이고, 말로 못해요. 저도 많이 맞았지만 고문 비명 소리가 끊이질 않았어요. 근데 정말 힘들었던 건 자꾸 '동생한테 가서 고문하라'고 하는 거였어요. 제가 무슨 말을 잘못하면 '동생을 전기고문해라, 고춧가루 부어라'라고 해요. 그게 더 힘들었어요.

제가 맞으면 그냥 쓰러지면 그만인데 제 앞에서 가족들을 고문하라고 하니까 그게 심리적으로 정말 못 견디겠더라고요. 밖에 남겨둔 가족들도 생각났어요. 철부지 어린 새끼들도 보고 싶었고요. 남은 가족들이 연세 많은 노인들이랑 네 살짜리 아기, 100일도 안 된 아들…. 그때 힘들었던 일은 말로 다 하기가 힘들어요."

"어떤 거짓말 만들어줘야 가족이 고문 덜 당할까"

서울 남영동 경찰청 인권센터(옛 대공분실).
 서울 남영동 경찰청 인권센터(옛 대공분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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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께 잡혀왔던 가족들도 마찬가지였겠어요.
"저는 그래도 짧게 있었어요. 다른 가족들은 그런 곳에 일주일 넘게 있었던 거예요. 아버지랑 동생이 이미 저에 대해서는 말을 해준 거죠. 그래서 저는 그거에 맞춰서만 말하면 됐어요. 그렇게 재판으로 넘어갔죠. 열흘씩 막 그렇게 있었으니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계속 고문 받고 있었죠. 근데 남영동에서 춘천으로 넘어가서도 전기고문을 그렇게 받았다고 해요."

- 조사 과정에서 선생님 말은 전혀 들어주지 않던가요.
"그렇죠, 정말로. 수사관들이 있는 그대로 얘기하면 들어주질 않아요.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어요. '뭐라고 말을 해줘야 고문을 안 받고 가족들이 무사할 수 있을까' 그 생각만 했어요. 뭘 모르니까요. 어떤 말이라도 해주고 싶은데 알아야 해주죠. 어떤 거짓말을 만들어줘야 가족들이 고문을 덜 당할까만 고민했어요.

수사관들이 생소한 단어들, 처음 들어보는 단어들을 말하는데 알아야 뒷말을 이어 해주죠. '조총련' 만났냐고 묻는데 저는 '조총련이 남자냐 여자냐'고 되물었어요. 사람인 줄 알았어요. 지금에야 아닌 줄 알죠.

오죽하면 '어떻게 써야 되느냐'고 물어보기까지 했겠어요. 당신들이 써주면 내가 도장 찍겠다고 말하기도 했어요.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전혀 모르고 재판 받은 거예요. 제가 살던 곳에는 학교도 없었어요. 분교도 한 십 리 넘게 가야 있어요. 저는 분교도 다니다 말았어요. 아는 것도 없는데 저보고 간첩이래요."

- 재판은 어땠습니까.
"법정에서 판사님이 작은아버지한테 물어요. 노동당에 입당했어요? 그러니까 작은아버지가 '네, 반장이 와서 공화당에 입당하라고 해서 입당했습니다'라고 답해요. 판사는 '노동당'을 물었는데 작은아버지는 '공화당'으로 알아들은 거죠. 그 작은 아버지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몰라요. 그때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어요. 시골에 나이 많은 사람들이어서요. 저도 몰랐어요. 한글 겨우 읽었어요. 그런 정도니 조사가 제대로 됐겠어요?"

- 도대체 무슨 조사 결과를 근거로 판결이 내려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수사관도 제가 너무 아는 게 없으니까 물어보기 싫은 것 같았어요. 또 검사도 그랬어요. 검사가 '그때 아버지 사촌동생이 무슨 모자를 썼었냐'고 물어요. 제가 '누빔 모자' 같다고 하니까 '아버지는 방한모라고 했는데?' 그래요. 아니 그래도 제가 보기에는 '누빔 모자'였다고 다시 말하니까 검사가 '그게 방한모 아니냐'고 따져요. '방한'이란 말도 그때 처음 들었어요. 수사관들도 답답한 거죠.

참, 그때 대통령 출마했던 김대중 후보 지지했다고도 혼나고 맞았어요. 제가 '김대중씨'라고 했다고 또 때리는 거예요. 그럼 뭐라고 하냐고 물으니까 '대중이'라고 하래요. 그것도 미리 알아야 그러지. 그건 춘천경찰서에서 그랬네요. 그게 조사인지 뭔지."

"딸이 약국에 쥐약을 사러 갔데요, 죽으려고요"

'삼척 일가족 간첩단 조작 사건' 피해자 김순자씨.
 '삼척 일가족 간첩단 조작 사건' 피해자 김순자씨.
ⓒ 김병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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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결은 어떻게 내려졌나요.
"조사만 받고 끝나면 나간다, 조사에 잘 응해주면 나간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열심히 대답해줬죠. 근데 징역 10년을 받은 거예요. 우리 아버지는 사형을 받았는데 그게 뭔지도 모르셨어요. 다른 자식들 걱정만 하고 있는 거예요. 쟤네가 왜 이렇게 징역을 많이 받았나, 그거 걱정하고 있으시더라고요."

- 감옥에서 나온 뒤에도 막막하셨겠습니다.
"우리 딸이 학교에서 그런 소리를 들었데요. 여자 간첩 딸이 우리 학교에 있다고요. 기가 막히잖아요. 동네 사람들도 '얘, 너희 엄마 간첩이다'란 소리를 했데요. 어린 게 너무 충격을 받은 거죠. 딸이 어떤 사람한테 '너희 그렇게 힘들게 살아서 어떻게 하느냐, 나 같으면 죽지 안 산다'는 말을 듣고 약국에 쥐약을 사러 갔데요. 죽으려고요. 다행히 약사 아저씨가 그걸 알고 쥐약을 안 줬데요. 그 얘기를 감옥에서 나와 듣고 어찌나 눈물이 나던지. 아이들이 고생을 많이 했죠."

- 밖으로 나오셨을 때 주변이 예전 같지는 않으셨을 거 같은데요.
"아는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어요. 색안경을 쓰고 보니까요. 진실이 뭐든 자기들 나름대로 생각하는 거예요. 무섭다면서 만나지 않으려고 하고요. 지금도 완전히 괜찮지는 않아요. 좀 자유롭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언젠가 속에 있는 얘기들 다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말을 하기 전에 '이거 말하면 잡혀가나'란 생각이 앞서요."

- 요즘 경제가 너무 어렵다보니까 차라리 그때가 나았다는 말을 하는 일부 사람들이 있어요. 그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지금 다 힘들어요. 어디를 가 봐도 안 힘든 곳이 없는 거 같아요. 하지만 일제강점기에도 편한 사람들은 편했어요. 자기가 편하려면 일본 놈들한테 붙어가지고 잘 먹고 잘 살 수 있었어요. 일본 놈들 시키는 대로 하면요. 그 말하고 뭐가 달라요. 도대체 누가 그런 말을 하는 거죠?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죠? 남은 힘들더라도 나 혼자 잘살면 된다는 말밖에 안 돼요. 그런 말은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닌 거 같은데요."

"내가 무슨 잘못을 했냐"... '가해자들'은 답이 없다

김순자씨를 비롯한 가족 3명은 지난 2013년 11월 재심을 통해 대법원에서 최종 무죄 판결을 받았다. 사건 후유증과 고통으로 가족 중 다섯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였다. 그렇게 그들은 34년이 흐른 뒤에야 무죄를 받았다.

또 다른 가족 8명(고인 포함)은 2014년 12월 춘천지법에서 진행된 1심에서 무죄를 받았지만, 현재 항소를 진행중이다. 당초 무기징역을 선고 받았던 그의 동생 김아무개씨도 지난해 12월 무죄를 선고 받았지만, 검찰은 이에 불복해 항소했다. 반면 김순자씨의 아버지에 대한 1심(1979년 12월)과 항소심(1980년 5월), 상고심(1980년 9월)은 신속하게 진행돼 '사형'이 확정됐다. 이들의 '무죄' 확정은 왜 이리도 더딘 걸까.

"감옥에서 나와도 보안관찰이라는 꼬리표 때문에 직장을 가질 수가 없었어요. 먹고 살기가 너무 힘들었어요. 보안관찰 하는 사람한테 울부짖은 적이 있어요. 도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그렇게 했냐. 내가 왜 징역을 살았냐. 왜 나와서도 사람을 못살게 구냐. 당신들이 뭔데. 잘못한 건 하나도 없는데 왜 내가 이런 일을 당해야 하느냐고, 왜 아버지가 사형을 당해야 하느냐고요."

인터뷰 도중 김순자씨가 한 말이다. 조곤조곤 말하던 그도, 이 부분에서는 감정이 조금 복받친 듯했다. 이제 "답을 조금은 알 것 같다"고도 했다. 그러나 정작 '가해자들'은 아직 답하지 않았다고 했다.

36년이 흘렀다. 이제 '가해자들'은 김순자씨의 물음에 답하라.

○ 편집ㅣ최유진 기자



태그:#삼척간첩단, #김순자, #김태룡, #지금 여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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