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기사에는 영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의 내용이 포함돼 있습니다.

여행은 '지금'을 일상에서 완전히 분리시킨다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여행에서의 지금은 어제와 내일을 이어주지 않고 일상에서 뚝 떼어 외따로 흐르는 시간이다. 여행 전에 품은 걱정, 여행 후에 겪게 될 일상의 스트레스는 이미 '그때 겪었던 일'이고, '그때 가서 생각할 일'이 된다.

우리가 여행에서 계산이나 편견 없는 로맨스, 삶의 재발견 등을 꿈꾸는 것은 이 속성 때문이다. 유명한 '비포 선라이즈' 연작에서도 두 주인공의 인연은 생애 전체를 관통하고 있으나 영화가 다루는 이야기는 여행지에서의 하루에 국한된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에서 함춘수(정재영)는 여행을 떠날 마음이 없다. 자신의 영화를 상영하는 영화제 일정을 잘못 알아 하루 일찍 수원에 도착했을 뿐이다. 그가 이 하루를 특별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영화제 관계자인 염보라(고아성)에 대한 속내에서 잘 드러난다.

'여성편력이 화려한' 함춘수는 아름답고 자신에게도 스스럼없이 호감을 표현하는 염보라에게 매력을 느끼지만 '(수원에서의 일정은) 하루 뿐'이라며 애써 마음을 접는다. 그가 자유롭게 만끽할 수 있는 '지금'은 하루뿐인데 반해 앞으로 영화판에서 마주치게 될 염보라와의 인연은 내일로 이어지는 일상의 굴레에 속하기 때문이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스틸컷 "제가 차 한 잔 사도 괜찮겠어요?"

▲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스틸컷 "제가 차 한 잔 사도 괜찮겠어요?" ⓒ 전원사


윤희정(김민희)은 달랐다. 함춘수는 수원화성 복내당에서 우연히 만난 희정에게 다짜고짜 말을 건다. 마뜩잖아 하는 희정의 반응에도 굴하지 않고 다가서는 춘수의 저돌적인 태도는 염보라에게 보이던 것과는 사뭇 다르다.

함춘수에게 윤희정은 어제와 내일을 생각나지 않게 하는 사람이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게 만들 만큼 매력적인 것은 물론이고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아는 게 없고 따라서 공유할 어제와 내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직감은 희정의 작업실에서 확신으로 자리 잡는다. 희정이 작업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춘수는 '잠깐 만에 아주 멀리 아주아주 먼 곳으로 여행을 온 느낌'이라고 중얼거린다. 그는 비로소 여행을 떠나온 것이다.  

진실로서의 '그때'와 거짓으로 남은 '지금'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스틸컷 희정의 작품세계에 대한 두 가지 평가는 1부와 2부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스틸컷 희정의 작품세계에 대한 두 가지 평가는 1부와 2부를 전혀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 전원사


영화는 함춘수의 독백이 개입하는 1부와 함춘수가 침묵하는 2부로 나뉜다. 두 이야기는 그 차이를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유사하게 시작해서 극명한 차이를 보이며 끝이 난다. 때문에 영화가 끝나고 나면 어느 쪽이 지금이고 어느 쪽이 그때인지 구분 짓고 싶은 유혹이 생긴다.

쓸쓸한 파국으로 끝나는 1부와 두 사람의 교감으로 마무리되는 2부 중 어느 쪽이 옳은지 구분하는 것은 어렵지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섣불리 그때와 지금으로 나누어 맞다 틀리다 말하는 대신 두 이야기 속 각기 다른 '지금과 그때의 관계'에 주목해야 한다. 1부에 '그때는맞고지금은틀리다'라는 부제가 붙고 2부에는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라는 부제가 붙은 이유다.

1부에서 춘수는 지금에 충실하기 위해 '그때의 진실'을 묵살한다. 지금 이 순간을 벗어나면 춘수는 '애 둘 딸린 유부남'이라는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춘수는 희정에게 그 사실을 고백하지 않는다. 지금에 충실하자는 생각이 너무 앞선 탓이다. 덕분에 둘은 시종 웃으며 호감을 주고받으면서도 진솔한 이야기는 나누지는 못한다. 서로를 영화감독과 화가라는 외형으로만 인지할 뿐이다.

특히 춘수는 희정을 '정말 아무것도 모르고 가시는 거 같고, 모르기 때문에 더 발견이 되는 그런 작업 방식'을 하는 예술가라고 평가하는데 이는 사실 자신의 영화관을 말할 때 꺼내는 상투적인 표현이다. 함춘수 영화관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전적으로 자기 방식으로만 희정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희정도 마찬가지다. 춘수에 대해 아는 것이라고는 그가 유명한 영화감독이라는 것과 '술 잘 마시는 남자'라는 것뿐이다. 그 이상은 관심도 없고 그저 춘수가 건네는 달콤한 말이 즐거울 뿐이다. 서로에 대한 호감 이외에 두 사람이 공유하는 화제는 전무하다. 결국, 밝혀지지 않은 진실로서의 '그때'와 거짓으로 남은 '지금'의 관계는 예정된 오류를 향해 두 사람을 이끈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지금과 그때의 절묘한 공존

반면 2부의 함춘수는 보다 거침없다. 희정의 가족관계를 미주알고주알 캐묻고 희정의 작품에 대해서도 상투적이라는 둥 자기 위안을 위한 작품이라는 둥 직설적인 표현을 아끼지 않는다. 표현의 작은 차이는 큰 변화를 만든다. 희정은 춘수를 존경할만한 영화감독 정도로 이해했던 1부와 달리 '특이한 사람', '말을 참 쉽게 하는 사람'으로 인식하기 시작한다.

함춘수의 본질에 가까운 것은 당연히 후자다. 그렇게 조금씩 본질을 드러내던 춘수는 술자리에서 불콰해진 상태로 자신이 유부남이라는 사실을 고백한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울며불며 "희정씨와 결혼하고 싶다"고 덧붙인다. 이 고백을 기점으로 희정도 변화한다. 인연을 이어나가느냐 배신감에 치를 떠느냐 선택하는 대신 지금 이 순간을 받아들이고 즐기게 된 것이다.

이제 두 사람에게 '지금'은 외따로 존재하는 진실이고 그 안에서 '그때'는 조건부 거짓이 된다. 춘수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이 희정의 지인들에 의해 폭로되어 파국을 맞이했던 1부와 달리, 결코 양립할 수 없어 보였던 지금과 그때가 절묘하게 공존하는 순간이다.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우리는 언제나 틀린다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스틸컷 '반지라도 있으면 마음을 표현할텐데' 라고 아쉬워 하던 춘수는 거짓말처럼 반지를 줍게 된다

▲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스틸컷 '반지라도 있으면 마음을 표현할텐데' 라고 아쉬워 하던 춘수는 거짓말처럼 반지를 줍게 된다 ⓒ 전원사


현실은 때로 이야기보다 더 극적이다. 완성된 이야기는 어떤 표현과 플롯으로 구성되든 간에 작자가 정해놓은 하나의 결말을 향해 맹목적으로 치달아간다. 반면 현실은 언제나 미완성이기에 표현의 미세한 차이와 플롯의 변화만으로 천차만별의 결과를 예비한다. 삶을 정형화시키는 거대한 이야기에서 벗어나 무한한 변화의 시작이자 끝인 '지금'에 충실한 삶을 살았을 때 우리에게 주어진 무한한 가능성을 온전히 누릴 수 있다.

홍상수 감독은 최근 언론시사회에서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를 통해 "지금 그 순간에 충실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가를 말하고자 했다"고 밝혔다. 영화는 복수의 결말을 통해 홍상수 감독의 의도를 실현한다. 말의 작은 차이에 따라 생길 수 있는 미세한 균열이 두 가지 결말을 만들어 낸 것이다.

그리고 관객은 두 가지 결말뿐만 아니라 새로운 가능성을 가진 결말이 어딘가에 실존한다고 믿게 된다.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하기란 어렵지만, 최소한 삶은 수없이 쪼개지는 균열 속에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다는 사실을 직접 보여준 셈이다.

나아가 한 번 지나간 시간을 되돌려 세세한 선택을 하나하나 바로잡지 않고서야 '지금에 충실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냉혹한 현실을 말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는 영화 속 함춘수같은 기회를 얻을 수 없다.

기껏해야 현실을 기망하고 여행을 떠나 잠시 동떨어진 시간을 흐르는 수밖에 없지만, 그마저도 현실에 뒷덜미를 잡히고는 한다. 여행 중 일상으로부터 받은 전화 한 통에 금세 현실로 이끌려간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얼마나 번번이 틀리는지 공감할 것이다.

○ 편집ㅣ박정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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