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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 박곡마을에 있는 양산원의 집 터. 명량대첩을 앞둔 이순신이 조선수군 재건에 나서 군량미를 확보했던 곳 가운데 하나다.
 보성 박곡마을에 있는 양산원의 집 터. 명량대첩을 앞둔 이순신이 조선수군 재건에 나서 군량미를 확보했던 곳 가운데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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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내마을과 박곡마을에서 군량미를 확보한 이순신은 또 길을 나섰다(관련 기사 : '군량미를 어쩐다' 고민하던 이순신이 향한 곳). 다음 목적지는 보성이었다. 추석을 하루 앞둔 1597년 8월 14일(양력 9월 19일)이었다. 전시상황인지라 명절 분위기는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날씨도 궂었다. 보름달을 보기 힘들 것 같았다.

박곡에서 보성으로 가려면 쇠실마을을 거쳐 기러기재(雁峙)를 넘어야 한다. 지금의 2번국도 변의 기러기 휴게소를 지나는 큰 고개다. 쇠실마을 입구에 '백범 김구 선생 은거지' 안내판이 서 있다. 행정구역상 보성군 득량면 심송리에 속한다. 안동 김씨 집성촌이다.

쇠실마을에는 우리 민족의 큰 스승으로 통하는 백범이 젊은 날 40여 일 동안 머물렀던 집이 있다. 백범이 이 마을을 찾은 건 1898년 5월이었다. 청년 김구가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하수인인 일본인 쓰치다를 맨손으로 죽인 사건(치하포 의거)으로 체포돼 인천감영에 수감됐다가 탈옥해서다.

백범이 탈옥 후 숨어 들었던 마을

선생은 '감옥에서 죽는 것은 왜놈들에게만 좋은 일'이라며 탈옥을 결행했다. 백범은 그해 3월 탈옥 후 삼남지방을 다니다가 산 깊은 이 마을에 숨어들었다. 마을에 있는 김광언의 집이었다. 선생은 이 집에 머물면서 마을사람들에게 우리의 역사를 가르쳤다. 독립의식도 드높였다.

1898년 5월 청년 김구가 숨어들었던 김광언의 집 터. 전남 보성군 득량면 심송리 쇠실마을에 있다. 지금은 김광언의 후손 김태권 씨가 살고 있다.
 1898년 5월 청년 김구가 숨어들었던 김광언의 집 터. 전남 보성군 득량면 심송리 쇠실마을에 있다. 지금은 김광언의 후손 김태권 씨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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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은거 기념관. 김구 선생이 지냈던 보성군 득량면 심송리 김광언의 집 앞에 있다.
 백범 김구 은거 기념관. 김구 선생이 지냈던 보성군 득량면 심송리 김광언의 집 앞에 있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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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마을에 김구 선생이 은거했던 김광언의 집이 보존돼 있다. 김광언의 증손자 김태권(70)씨가 집을 돌보고 있다. 김씨는 교직원으로 일하다 퇴직하고 광주와 보성을 오가고 있다. 그 앞에 백범기념관도 들어서 있다.

쇠실마을에서 내려다보이는 산자락과 들녘은 모의장군 최대성의 격전지였다. 보성 겸백 출신의 최대성은 이 일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기러기재 정상에 서니 보성읍이 내려다보인다.

김광언의 후손 김태권 씨가 백범 김구 은거 기념관에서 김구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김광언의 후손 김태권 씨가 백범 김구 은거 기념관에서 김구 선생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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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의장군 최대성을 추모하는 충절사. 보성 겸백 출신의 최대성은 보성 일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모의장군 최대성을 추모하는 충절사. 보성 겸백 출신의 최대성은 보성 일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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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보성에서 찾은 곳은 보성읍성의 열선루(列仙樓)였다. 열선루는 보성군청에 있던 정면 5칸, 측면 4칸의 누각이다. 지금의 보성군청과 보성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다. 보성군청 마당에 당시 열선루의 주춧돌로 쓰인 바위가 전시돼 있다. 보성초등학교 뒤쪽 언덕에 성벽의 흔적도 일부 남아있다.

이순신은 이곳 열선루에서 보성군수와 군관을 불러들였다. 나주목사와 어사 임몽정에게도 편지를 썼다. 궂은 하늘에 검은 구름이 몰려들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금세 빗줄기가 굵어졌다.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돼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이후 처음 내린 비였다.

가뭄 끝에 내린 비, 충무공의 감상

당시 보성읍성 열선루의 주춧돌 등으로 쓰인 바위와 돌. 현재 보성군청 마당에 진열돼 있다.
 당시 보성읍성 열선루의 주춧돌 등으로 쓰인 바위와 돌. 현재 보성군청 마당에 진열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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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초등학교와 보성군청. 당시 보성읍성의 열선루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보성초등학교 뒤쪽 언덕에 성벽의 흔적도 일부 남아있다.
 보성초등학교와 보성군청. 당시 보성읍성의 열선루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곳이다. 보성초등학교 뒤쪽 언덕에 성벽의 흔적도 일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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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관과 병사들은 가뭄 끝에 내린 비를 보며 감회에 젖어들었다. 고향에 두고 온 부모와 처자, 형제들을 생각했다. 아무 탈 없이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까. 일본군을 피해 산속을 헤매며 배고픔에 떨고나 있지 않을까. 그 가족들을 생각하면서 하루 빨리 일본군을 물리치고 일상으로 돌아가길 바라고 있었다.

이순신은 상념에 젖은 군사들을 보면서 마음이 무거웠다. 막중한 책임감에 어깨가 짓눌리렸다. 이들을 일상으로 돌려보내는 길은 조선수군을 빨리, 완벽하게 재건해 전쟁에서 이기는 길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순신의 마음 한켠에는 왠지 모를 불안감이 밀려왔다.

불안감은 일본군에 대한 공포심이 아니었다. 전쟁 패배에 대한 걱정도 아니었다. 사방이 을씨년스러웠다. 이순신은 애써 잠을 청했다. 계속 내리던 비는 밤이 깊어가면서 큰비로 변했다. 열선루의 지붕을 때리는 빗소리가 갈수록 요란해졌다. 밤하늘에서 울리는 천둥소리도 귓전에 가까이 닿았다.

당시 보성읍성 열선루의 주춧돌과 댓돌로 쓰인 바위들. 현재 보성군청 마당에 전시돼 있다.
 당시 보성읍성 열선루의 주춧돌과 댓돌로 쓰인 바위들. 현재 보성군청 마당에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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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보성읍성의 모습. 읍성의 서편에 열선루가 있었다. 보성군청 마당의 열선루 석조유물 안내판에 그려져 있다.
 당시 보성읍성의 모습. 읍성의 서편에 열선루가 있었다. 보성군청 마당의 열선루 석조유물 안내판에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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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이순신이 아침에 눈을 뜨는 순간에도 내리고 있었다. 군관들이 추석이라며 덕담을 건넸다. 오후가 되자 비가 그쳤다. 날씨도 언제 비를 퍼부었냐는 듯이 환하게 갰다. 이순신은 열선루로 찾아온 어사 임몽정을 만나 조정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다른 지방의 전시상황도 알 수 있었다.

곧이어 선전관 박천봉이 찾아왔다. 박천봉은 선조 임금의 유지를 갖고 왔다며 이순신에 전했다. 이순신은 임금의 유지를 받들고 바로 펼쳤다. "수군을 파하고 육군에 합류하라!" 수군 철폐령이었다. 수군을 폐지하고 육군에 의지해서 싸우라는 것이었다.

이순신은 제 눈을 의심하며 몇 번이고 다시 읽어봤지만, 같은 내용이었다. 수군을 파하고 육군에 합류하라. 소수의 수군으로는 왜군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라고 여긴 임금이 이순신에게 내린 명령이었다.

당시 보성읍성 열선루의 활주석으로 쓰인 석조유물. 열선루를 복원하는데 쓰일 바윗돌이다. 현재 보성군청 마당에 진열돼 있다.
 당시 보성읍성 열선루의 활주석으로 쓰인 석조유물. 열선루를 복원하는데 쓰일 바윗돌이다. 현재 보성군청 마당에 진열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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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보성읍성의 열선루 복원 예상도. 정면 5칸, 측면 4칸의 열선루는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이순신이 임금으로부터 수군철폐령을 받고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있다'는 내용의 장계를 써서 올린 곳이다.
 당시 보성읍성의 열선루 복원 예상도. 정면 5칸, 측면 4칸의 열선루는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이순신이 임금으로부터 수군철폐령을 받고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있다'는 내용의 장계를 써서 올린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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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재건로 고증 및 기초조사(전라남도), 이순신의 수군재건 활동과 명량대첩(노기욱, 역사문화원), 명량 이순신(노기욱,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등을 참고했습니다. 지난 9월 15일, 8월 22일 다녀왔습니다.

이 기사는 <전남새뜸>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열선루, #보성읍성, #조선수군재건, #백범김구 은거지, #쇠실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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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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