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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탕 건물 중앙 광장에 있는 양귀비상
 목욕탕 건물 중앙 광장에 있는 양귀비상
ⓒ 김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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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아버지와 눈이 맞아 시아버지의 아내가 된 여자, 그 사실을 알고 자결할 수밖에 없었던 그녀의 남편, 황제였던 남편을 홀려 10여 년간 국사를 팽개치게 만든 여인, 외척들을 권력에 끌어들여 권력을 농락하고, 그로 인하여 난이 일어나 침략을 당하고 도망가다 타의에 의해 자결한 여인, 이러한 역사적 현실에서도 현종과 양귀비가 사랑을 나눈 장소 '화청지'를 찾는 중국인들이 아주 많다.

중국 서안 화청지는 '화려하고 맑은 물이 가득한 연못'이란 뜻으로 당나라 현종이 양귀비를 위하여 이전에 있었던 궁궐을 다시 화려하게 고쳐준 곳이다. 서안 시내에서 35km 정도 가면 여산이 있고, 그 산 아래 약 43도 정도의 온천수가 솟아난다. 이 온천 지구에 있는 이 궁궐이 당시에 파괴되었지만, 중국 정부가 1982년 복원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는 명소가 되었다.

주차장에서 내리니 어떤 사람이 부채를 들고 "한국돈 2000원"하고 외친다. 부채는 대나무살에 천을 붙인 것인데, 앞면에는 중국의 4대 미인이라고 일컫는 양귀비, 서시, 왕소군, 초선의 그림이 그려져 있고, 뒷면에는 이들을 소개하는 중국어가 새겨져 있다.

주차장뿐만 아니라 매표소 입구까지 차들이 주차되어 있어서 혼잡한 분위기다. 햇볕이 내리쬐는 낮의 기온은 거의 37~38도에 육박한다. 관람객들은 대부분 중국 사람들로 매표소나 입구엔 몇 겹으로 줄을 서 있다. 주로 깃발을 든 가이드 앞에 모여서 설명을 듣는 사람들이 많았고, 입구에 놓은 계수기를 통과하려고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화청지 정문을 들어가자 반듯하게 새로 지어진 많은 건물들이 궁궐의 멋을 한껏 드러낸다. 가장 웅장한 집은 장생전, 비상전 등이다. 웅장하면서도 단아한 모습을 지닌 장생전은 화청지의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 앞에는 연못이 파져 있다. 연못은 연꽃들이 심어져 꽃이 피어나고 있었고, 버드나무가 울창하다.

양귀비와 현종 '두 사람만의 목욕탕'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가 결혼했다는 장생전
 당나라 현종과 양귀비가 결혼했다는 장생전
ⓒ 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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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청지 비상전과 의춘전
 화청지 비상전과 의춘전
ⓒ 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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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히 사랑하자'라는 의미로 지었다는 장생전은 현종과 양귀비가 결혼식을 올린 곳이라고 한다. 두 사람이 이곳에서 결혼하면서 '하늘에서는 비익조가 되고, 땅에서는 연리지가 되자'고 맹세하였다고 한다.

장생전 옆에는 현종과 양귀비가 거처하던 집 비상전과 의춘전 두 채가 있다. '눈이 와도 눈이 날아가고 서리만 낀 집'이란 비상전은 겨울에 임금이 거처하던 곳으로 온천물을 하수도로 방을 한 바퀴 돌려서 난방을 하였다고 한다. 이 집에는 백거이가 양귀비를 노래한 한시 '장한가' 구절이 새겨져 있다.

화청지를 복원하면서 각 목욕탕에 각각의 건물들을 지었는데, 해당탕과 연화탕 등 여러 채의 집들이 줄지어 있다. 귀비지라는 건물에 해당탕이란 양귀비의 목욕탕이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니 물은 차 있지 않지만 바닥에 아담한 해당화 모양의 욕실이 설치되어 있다. 욕실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2개가 있는데, 이곳은 양귀비 말고도 현종이 들어 올 수 있는 곳으로 두 사람만의 목욕탕이라고 한다.

연화탕은 현종의 목욕탕이다. 상당히 큰 규모의 목욕탕으로 현종이 목욕하면서 양귀비가 목욕하고 나오는 모습을 보았다고 한다. 연화탕 주변에는 유리벽으로 보호하여 놓은 나무 기둥들이 몇 개 있는데, 이것은 당나라 당시의 이 목욕탕을 세웠던 건물들의 기둥이라고 한다.

양귀비의 목욕탕인 해당탕
 양귀비의 목욕탕인 해당탕
ⓒ 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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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현종 황제의 목욕탕인 연화탕
 당나라 현종 황제의 목욕탕인 연화탕
ⓒ 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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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화탕 옆으로 담쟁이덩굴에 뒤덮인 아담하면서도 우뚝한 콧날 같은 정자가 이어져 있다. 양귀비가 목욕을 하고 올라와 이 정자에 앉아서 삼단 같은 머리를 말리는 곳이라고 한다.

성진탕은 황제의 목욕탕으로 하늘의 별을 볼 수 있도록 지었다고 한다. 이밖에 황제탕에서 흘러나오는 물로 목욕하는 세자탕도 있고, 그 옆에는 온천수를 만지거나 시음해 볼 수 있는 연꽃모양의 샘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온천물을 만져보고 맛을 보려고 줄을 선다. 손에 닿은 온천물은 그리 뜨겁지 않다. 약간 더운 물이라 맛을 제대로 음미할 수 없다.

세자탕 앞 광장에는 양귀비가 목욕하고 나오는 모습을 흰 대리석으로 재현한 조각상이 있다. 너무 현대적으로 세련된 조각상이어서 양귀비의 모습이 저러했을까 궁금하기도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양귀비상 앞에서 사진을 찍는다. 한때는 손때가 너무 많이 묻어 더러워졌다고 하는데 지금은 아주 깨끗한 양귀비가 춤을 취고 있는 모양이다.

아들의 아내를 빼앗은 당나라 현종

양귀비가 목욕하고 머리를 말렸다는 정자
 양귀비가 목욕하고 머리를 말렸다는 정자
ⓒ 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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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시대 화청지 목욕탕 기둥
 당나라 시대 화청지 목욕탕 기둥
ⓒ 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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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산의 이름은 여산이라고 한다. 해발 1270m 정도의 높이라고 하는데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다. 이곳엔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어서 정상까지 오르내리고 있었다. 이 산은 중국 현대사에 중요한 사건이 벌어진 곳으로 장개석 국민당 총통이 장학량 부사령관에게 체포되었단 산이라고 한다. 

당나라 현종의 궁에는 궁녀가 약 8000여 명 정도 있었다. 양옥환(양귀비의 본명)은 18번 째 아들의 아내 즉 현종의 며느리였다. 양옥환이 노래와 춤이 뛰어났다고 한다. 현종은 양옥환이 춤을 추는 것을 보고 빠져들었는데, 누구인가 알아보니 며느리인 것을 알고 고민하던 중, 모든 자식들을 지방으로 내려 보내 실무를 익히도록 하는 꾀를 내었다고 한다. 특히 18번 째  아들을 가장 멀리 변방으로 내려 보냈고, 아들이 3년 만에 돌아와 보니 자기 아내인 양옥환을 아버지가 차지한 것을 알고 자결하였다고 한다.

안녹산 난이 일어나 장안이 함락되고, 현종과 양귀비는 장안에서 40km 정도 떨어진 마위포라는 곳으로 피난하였으나, 성난 군중들이 일어나 나라를 망친 양귀비를 처벌하라고 요구했고, 현종은 어쩔 수 없이 양귀비의 죽음을 눈감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양귀비는 자결하기에 이르렀고 그의 시체는 근처 산에 묻었다고 한다. 

현지 가이드 오광선씨는 재미있는 전설이 하나 있다며 "사실인지 아닌지 몰라도 양귀비의 묘는 일본에 있다고 합니다, 양귀비가 자결해야 하는 순간 옆에 있던 병사들이 아름다운 양귀비를 차마 죽게 할 수가 없어서, 양귀비와 비슷한 궁녀에게 옷을 입히고 머리에 모자를 씌워 대신 죽게 했대요, 그리고 양귀비를 빼돌려 일본으로 보내 살다 죽었는데, 현재 일본 야마쿠치현에 양귀비의 묘와 사당이 있다네요"라고 말하며 웃는다.

현종이 양귀비에 빠져 10여 년간 정무를 보지 않아 나라가 혼란스러워졌고, 안녹산 난을 가져왔기 때문에 모든 대신들이 양귀비를 탄핵하여 황후로 봉하는 것을 반대하였고, '귀비'로 호칭하였다고 한다. 서안에는 화정감이라는 감과 석류가 많이 재배되고 있는데, 현종의 아이를 갖지 못한 양귀비가 씨가 많은 과수를 심으라고 하여 지금도 감과 석류가 많이 재배되고 있다고 한다.

화청지 연못과 귀비지 옆모습
 화청지 연못과 귀비지 옆모습
ⓒ 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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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청지에 있는 연꽃 모양의 온천샘
 화청지에 있는 연꽃 모양의 온천샘
ⓒ 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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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도 임금의 총애를 없고 권세를 누렸던 여인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연산군의 총애를 받은 장녹수와 숙종의 총애를 얻은 장희빈이다. 장녹수는 비천한 신분에서 연산군의 총애를 받아 궁녀의 최고봉인 숙용까지 올랐으나 중종반정으로 참형되었을 때 성난 군중들이 던진 돌이 시체위에 돌무더기를 이루었다고 한다.

장희빈은 나인으로 궁에 들어와 숙종의 총애를 입어 왕자를 낳았고, 이 왕자가 원자로 책봉되어 왕비가 된 여인, 남인과 서인의 당쟁 희생물이 되어 왕비에서 물러나 희빈의 작호를 받았고, 영조의 생모 최숙빈을 저주하다 왕으로부터 자진하라는 명령을 받아 생을 마감한 여인, 그의 무덤은 현재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에 있다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 중 이들의 무덤을 찾는 사람이 있을까?

덧붙이는 글 | 7. 29(수)부터 8.6(목)까지 9일 동안 풀꽃산악회 회원 20명은 혜초여행사의 기획으로 신서역길의 중국 지역을 다녀왔습니다. 신서역기행은 서안에서 천수까지 320km를 버스로 약 5시간, 천수에서 난주까지 330km를 버스로 약 5시간, 난주에서 가욕관까지 740km를 기차로 약 8시간, 가욕관에서 돈황까지 400km를 버스로 약 5시간, 돈황에서 유원가지 120km를 버스로 2시간, 유원에서 선선까지 620km를 기차로 약 9시간, 선선에서 투루판까지 약 150km를 버스로 약 3시간, 투루판에서 우루무치까지 190km를 버스로 약 3시간이 걸리는 총 2800km의 대장정입니다.
‘버스와 기차로 간 서역기행’은 총 10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1) 사막을 가로지르는 신서역기행, (2) 서안(西安), 당나라의 흔적, (3) 진시황과 병마용, (4) 화청지 양귀비에 대한 기억, (5) 천수 맥적굴, (6) 난주 유가협댐과 황하, (7) 만리장성의 시작 가욕관, (8) 돈황 석굴 막고굴, (9) 사라진 왕국 고창고성과 교하고성, (10) 투루판 사막에 사는 사람들



태그:#화청지, #서역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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