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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추자도 항구와 멀리 보이는 곳이 하추자도
▲ 추자도 항공 사진 (추자면 제공) 상추자도 항구와 멀리 보이는 곳이 하추자도
ⓒ 이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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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자군도는 상추자도, 하추자도, 횡간도, 추포도 등 4개의 유인도와 34개의 무인도를 말한다. 상,하추자도를 가리켜 보통 추자도라고 부른다. 추자도는 지난 1993년도에 방문하여 하룻 밤을 지낸 적이 있다. 두 번째 방문은 20년 만에 이루어졌는데 다시 방문하는 한국의 어느 섬 보다 기쁘고 기대에 부풀었다.

추자도는 목포와는 99km, 완도 79km, 제주도와는 48km 떨어진 서남해안의 중간에 위치한 섬이다. 추자도는 일반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 생소한 섬이지만 낚시꾼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낚시천국의 섬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 섬 주변의 모든 갯바위가 낚시 포인트이기 때문에 굳이 경비를 들여서 배를 타고 무인도에 까지 나가지 않아도 된다. 어느 계절을 불문하고 이곳은 사철 낚시꾼들로 넘쳐난다. 섬 어디를 가서 낚시를 해도 참돔, 농어, 감성돔 등 고급 어종이 많이 잡힌다. 특히 겨울이 시작되는 11월부터는 '최고의 손맛'을 볼 수 있으며 추자도 겨울은 일등 낚시터로 각광을 받고 있는 곳이다.

추자군도는 상,하추자도를 중심으로 크고 작은 42개의 섬나라를 이루고 있다. 여기에는 추자10경이라는 아름다운 풍경을 자랑하며, 무인도인 사수도에는 해조류 번식지로서 씀새와 흑비둘기 등 희귀종 새들의 서식처이며 새들의 낙원이다. 수많은  씀새들이 알을 낳아서 번식하는 곳으로 학술적 가치가 커서 천연기념물로 (천연기념물 제333호) 지정되었다.  이 섬은 허가를 받아야 만이 들어갈 수 있다. 문화재로는 최영장군 사당(제주기념물 11호), 추자처사각(제주유형문화재 9호) 등이 있다.

추자도의 역사

추자도에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상추자도 대서리에 있는 고인돌로 추정되는 바위들이 있지만 그 바위들이 과연 고인돌이라고 당정을 짓지 못하고 있다. 추자도는 백제와 탐라국 사이에 조공을 바치기 위한 풍선들이 오고 갈 때에 뱃사람들이 꼭 들려가는 중간 기항지였다. 바람에 의지하여 가는 배는 어느 방향으로 불지 모르고 고단한 항해를 하면서 사나운 제주 바다를 건너던 뱃사람들은 추자도는 마치 오아시스같은 곳이었다. 이 섬에 잠시 정박하는 동안, 고단한 몸을 풀고 잠시 휴식을 취하면서 순풍이 불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문헌상 사람이 살았다는 맨 처음의 내용은 고려사에 나온 삼별초의 기록이다.

1271년 삼별초의 난이 났을 때 고려와 몽골 연합군이 폭풍우를 피해 추자도에 들어왔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삼별초가 진도 용장성이 함락한 된 후 제주도로 피신 한 남해안 일대의 섬과 바다를 누비며 관군을 공격했다. 이때 추자도는 삼별초의 중간기지로 사용되었다. 그런데 삼별초를 진압하려고 제주로 진격하던 고려와 몽고의 관군도 추자도에 잠시 들려 작전을 추진한다. 그리고 고려 말 제주도에서 목호가 난을 일으켜 이를 진압하기 이를 진압하러 가던 최영 장군도 추자도에 잠시 머물면서 바람 자기를 기다렸다. 미루어 살펴보니 추자도에 최초로 사람이 입도한 것은 고려시대 훨씬 그 이전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섬이 크고 해산물이 풍부하기 때문에 그렇다.

추자도는 한반도와 탐라의 중간에 있는 교통 요충지였다. 1273년(원종 14) 후풍도(候風島)라 하여 제주행 풍선이 바람이 심하면 자기를 기다리고, 또 바람이 없으면 바람이 불기를 기다렸다가 배를 띄웠다 하여 이런 이름을 가졌다. 추자도는 육지와 멀리 떨어진 관계로 해적인 왜구들이 시도 대도 없이 와서 노략질을 일삼았다. <탐라기년>에 보면 '1350년(충정왕 2)에 추자도 주민을 조공포(朝貢浦=도근내 포구) 냇가로 옮겼다. 이는 왜적(倭賊)이 자주 침입하기 때문이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것은 일본의 해적들이 얼마나 괴롭혔는지 추자도 주민들을 이주시켰는지 짐작해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지금은 여객선으로 완도나 진도 방향에서 오면 두 시간 정도 걸리는 약 50여km의 뱃길이 지만 과거에 풍선으로 다니던 시절에는 제주와 육지를 오고가는 사람들은 생명을 내걸고 다녀야 할 만큼 아주 위험천만한 뱃길이었다.

1601년(선조 34) 김상헌(金尙憲)의 <남사록>에 의하면 탐라인은 이 섬을 후풍도라 하였다. 추자도는 해남 땅 남쪽에 있고 제주의 북쪽에 있다. 신도(身島=상추자)와 별도(別島=하추자)로 이뤄진 추자도는 마치 동쪽을 향하여 쥐가 입을 벌린 형상을 하고 있다. 두 섬 사이 넓은 바다 당포(堂浦=추자 포구)는 사서도(斜鼠島)에서 동풍을 만나면 들어오는 피풍항(避風港)이다. 사람들은 추자 섬 북쪽 바다를 이른바 '육지-바다'라고 하는데 반하여 섬 남쪽은 '제주-바다'라고 하여 거칠다고 한다. 특히 화탈도(火脫島) 일대의 물결은 더욱 험하다고 한다. 추자도는 통치권이 잘 미치지 않아 영암, 나주, 완도, 제주목 등지에 번갈아 종속해 왔다. 탐관오리의 수탈지로 여겨온 것도 사실이다.

천혜의 항구 추자항
▲ 등대에서 바라다 보이는 추자항 천혜의 항구 추자항
ⓒ 이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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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 추자도의 관문 대서리 

제주도는 1973년도에 여행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5번 정도 갔지만 상추자도는 목포에서 제주도를 가는 여객선을 타고 가면서 보니 손님과 화물을 싣고 내렸다. 그 당시 남해안의 유일한 어업전진기지 항으로 상추자도 항은 어선들의 정박과 접안 시설만 있을 뿐 여객선이 직접 접안하는 시설이 없기 때문에 제주나 목포로 나들이를 할 때 여객선을 타려면 고생을 많이 했다. 19톤 종선은 하추자도 예초리부터 묵리와 신양리 사람들을 싣고 와 상추자도 1km 외항에 와 있는 여객선으로 가서 사람과 짐을 먼저 싣고 그 다음에 내린다.

객선을 보내고 온 이 종선은 다시 상추자도 대서리 포구에 와 손님을 내리고 하추자도 주민들을 싣고 하추자도 예초리까지 간 온 후에 다시 돌아왔다. 추자도는 1945년 광복 후에 처음으로 신광호가 목포 제주도를 1주 1회 상추자도 외항에 기항하면서 여객선의 혜택을 입어 왔지만 오랫동안 선착장 시설의 미비로 종선을 타면서 위험한 곡예 항해를 많이 하였다. 

그 뒤 20년만인 1993년에 가을에 등대호를 타고 추자항에 들어와 1박 한 적이 있다. 다시 세월이 많이 흘러서 22년 만에 추자도를 방문하였다. 항구마을 대서리의 변화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커졌고 활기가 넘쳐흐른다. 추자도 인구의 대부분은 이곳 상추자도 대서리 마을에 집중되어 있다. 이것은 추자군도에서 최대 항구인 추자항구가 있을  뿐만 아니라, 면사무소·수협·우체국, 군부대, 초등학교, 내연발전소, 민박집, 식당, 선구점, 다방, 횟집, 저수지(3개) 등 생활 편익 시설과 서비스업 시설들이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추자항은 어로 작업에 필수적인 시설이 있고 제주와 목포의 기항지이며 동시에 어업의 전진 기지가 되고 있다. 추자항은 대서리와 영흥리의 해안을 끼고 있는 항구로서 북서쪽으로 발달된 산줄기가 겨울철 북서풍을 막아 주고 있어 천연적 양항(良港)이라 할 수 있다. 22년 만에 다시 방문한 추자도 식당과 여관, 선구점, 다방이 생각보다 많았다. 추자항 건물들이 이곳 경제 사정을 말해 주듯이 예상 밖이다. 이곳 주민들은 고기를 많이 잡아서 부자가 많다. 또 곳곳에 보이는 젓갈통들의 양도 엄청나게 많이 널려있다. 김장철이면 육지로 불티나게 팔려나갈 물건들이다.  

조업을 이제 막 끝내고 돌아온 어선에서는 선원들과 마을에서 품팔이를 나온 여자들과 12명이 일렬로 줄을 서서 조기를 그물에서 떼고 있다. 조기와 고등어 등이 그물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 부지런히 딴다. 조기들은 크기에 따라 모으고 다른 고기들은 추려내고 있다. 작업은 7~8시간 정도 걸린다. 그물에서 일일이 따낸 조기들은 바닷물에 깨끗이 세척한 뒤  얼음을 넣고 나무 상자에 넣는다. 조기는 유자망으로 잡아야 최상품의 굴비가 된다.  자루로 된 그물로 잡는 안강망이나 저인망은 조기들은 서로 몸을 부딪치면서 비닐이 벗겨져 버린다. 조기는 반드시 비늘이 있어야만 제사상에도 오르고 굴비가 된다. 비늘이 벗겨져 버린 안강망이나 저인망 조기보다 유자망 조기는 비늘이 황금으로 인해 황금 굴비가 된다. 추자도하면 조기뿐만 아니라 삼치, 고등어, 멸치가 유명하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선원들과 아주머니들 외국인 노동자들이 그물과 고기를 손질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화합의 다리 추자대교
▲ 추자대교 화합의 다리 추자대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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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합의 추자대교

추자군도에서 가장 큰 섬은 하추자도(3.5㎢)이지만 배나 작은 상추자도(1.5㎢)가 추자군도의 중심 섬이 된 한 것은 바로 지형적인 위치 때문이다. 남쪽을 향하여 있는 움푹 들어간 천혜의 항구가 목포와 제주도로 가는 길목에 있고, 추자군도의 관문 역할을 하고 있다. 상추자도는 면소재지에 있는 곳이기에 당연히 중학교가 있어야 하는데 여기는 하추자도 신양리에 중학교가 있다. 이 일로 두 섬은 극심한 대립과 불화를 한 시기도 있었다. 그러나 1972년도에 두 섬에 다리의 개통으로 화합과 상생의 시기를 맞이하기도 하였다. 지금 생각하면 지역 균형 발전을 위한 일이었지만 그 당시는 배를 타고 학교를 가야하기 때문에 면소재지 상추자도 섬 주민들은 자존심을 내걸고 처절한 경쟁을 벌였지만 중학교 유치를 결국 하추자도 신양리로 결정되었다.

중학교가 설립 당시 상추자도 아이들은 나룻배를 타고 하추자도로 중학교를 다니다가 연도교가 완성된 후에 차로 통학을 한다. 이 다리는 1966년에 착공하여 1972년에 길이 156미터, 너비 3.4미터의 규모로 완공되었다. 그러나 공사기간 중 여러 차례 건설업체가 바뀌면서 부실공사로 인해 10년이 지나 후에 교각 곳곳이 균열이 생기고 붕괴위험이 빠졌다. 그래서 새로운 다리를 건설하기 위해 공사중 1993년 4월에 모래를 가득 싣고가던 트럭이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40미터가 붕괴되어 2명이 사망했다. 이 다리는 1995년 5월 3일 준공된 새 다리로 추자대교이다. 추자도군의 속살을 체험하려면 대서리를 지나서 추자대교를 넘어 하추자도로 가는 게 좋다.

제주를 가기 위하여 몰려든 추자항의 손님들
▲ 목포 진도 추자 제주행 핑크돌핀호 제주를 가기 위하여 몰려든 추자항의 손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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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자군도, 제주도 편입 100주년

추자도는 1272년(고려 원종12년)까지 후풍도(候風島)라고 불리었다. 1821년 전라남도 영암군에 소속될 무렵부터 추자도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과 조선 태조5년 섬에 추자나무 숲이 무성한 탓에 추자도로 불리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추자도는 완도군에서 제주도 관할 행정구역에 편입된 지 2014년에 100주년을 맞았다.

일제 강점기인 1914년 3월 1일 전라남도 완도군의 추자면에서 제주군(濟州郡)으로 이관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보다 앞서 추자도는 1821년(순조 21년) 전라도 영암군에 소속됐다가 1881년(고종 19년) 제주목으로 이관됐으며, 1896년(건양 원년)에는 다시 완도군으로 넘어가는 등 소속이 뒤바뀌기를 반복했다. 그러다가 오늘날에 제주도에 속한다.  당시 섬과 바다에 대한 조선의 해양 정책과 이해도가 얼마나 부족했으며 홀대했는지 엿볼 수 있다. 추자도는 수백 년 동안 육지와 가까워서 행정구역과 생활문화권이 호남권에 속해 있었다. 100년 전에 행정구역상 제주도에 편입되면서부터 제주도의 부속 섬이 되었다. 풍수적으로 볼 때 추자군도는 전라도 섬들과 가깝고 따라서 지형적으로 역사적으로 전라도와 가까운 땅이다. 그래서 오랜 세월 동안 호남문화권에 속한 탓에 생활과 문화, 풍습, 언어, 풍광. 돌과 나무 등은 제주도 본섬과는 사뭇 다르다.

제주도와 추자도는 몇 가지의 차이점을 보면 다음과 같다.

말투와 생활문화가 제주도와는 사뭇 다르다. 추자도에 오면 들려오는 말이 귀에 익은 전라도 사투리가 들린다. 아마도 오랫동안 전라도 완도군에서 지내어 왔기 때문일 것이다
또 제주도 사람들은 명절 당일에 차례를 지내지만 추자도는 전날 밤에 차례를 지낸다. 그리고 추석에는 아침에 산소를 다녀오고 부녀자들은 산이나 들로 나가 강강술래를 즐긴다. 이런 일은 제주에는 볼 수 없는 풍습이라고 한다. 물건을 옮기는 방식도 다르다. 추자도 사람들은 거의 가 머리에 이고 다니지만 제주도는 물건을 등에다 지고 다닌다. 이것은 바람이 많이 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추자군도는 전라도문화권의 영향력을 받고 살아온 것이다.

이런 추자도의 역사는 '제주 속의 전라도'라고 말 할 정도로 풍속과 언어가 전라도와 비슷하며 생필품의 80~90% 를 목포에서 들여온다고 한다. 그래서 배타적인 제주도 사람들은 호남권의 추자도를 서자처럼 멀게만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동안 상급학교  진학은 대개 전라도 쪽을 택했는데 20여 년 전부터 제주도 학교로 왔다. 이로 인해 추자도는 두 지역 간에 문화적인 중간지대라는 느낌이 들기도 하는 곳이다. 추자도 사람들의 생활문화는 이제 제주도와 전남을 거대한 바다를 사이에 두고 육지와 제주도의 섬 경계를 넘나들면서 형성된 문화가 가진 매력 중 하나가 되었다.

섬 둘러보기

추자도의 올레길은 상추자도 추자항에서부터 시작된다.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는 추자도 올레 길은 지루할 틈이 없다. 추자도 올레는 제주도 올레 코스 가운데 가장 힘든 난(難) 코스로는 최상이다. 그렇지만 가장 빼어난 경치를 갖고 있는 곳으로 여행객들에게 추천하고 싶다.

추자도는 바다에 떠 있는 섬이지만 깊은 산중에 와 있는 기분이며 낭떠러지기 아래로는 푸르른 바다와 넘실거리는 파도가 끝없이 펼쳐진다. 다리를 건너면 새로운 섬 풍광에 감탄사가 저절로 나온다. 추자도 올레코스는 상추자도 추자항에서 시작하여 추자항으로 돌아오는 17.7㎞ 거리이다. 추자항에서부터 출발하면  최영장군 사당 - 봉글레산입구- 봉글레산 정상 - 천주교 추자공소- 나바론 절벽 - 추자등대- 추자교 - 묵리 고갯마루 - 묵리마을 - 신양2리 - 몽돌해안 -  신대산 전망대 - 예초리 - 돈대산 입구 - 돈대산 정상 - 묵리 교차로 - 추자교 - 영흥 쉼터 - 추자항 순이다. 봉글레 산과 몽돌해안을 지나면 '바다 위에 뜬 산'의 풍광을 볼 수 있다. 좀 멀지만 소요시간은 성인기준 6,7 시간 정도 걸린다. 1박2일 일정으로 탐방하면 안성맞춤이다.

여섯 정도의 군데의 고갯길이 아기자기한 맛을 주기에 충분하였다. 추자도 올레에서 인상에 남는 곳이 신양항을 지나서 모진이 몽돌해안이 나온다. 추자도 해안 여러 곳에 몽돌밭 중에서 특히 모진이 작은 몽돌 해안은 100여 미터나 이어져서 여름에 해수욕을 즐기며 텐트치고 싶은 곳이다. 이 해안에는 빗물을 모아서 받아 놓은 우물이 있다. 다음은 신대산 전망대와 해안가의 절벽위로 만들어진 코스, 그리고 돈대산 정상의 능선길 코스이다. 추자도 올레 길은 쉽게 갈 수 있는 곳은 아니다. 올레길 치고는 좀 어려운 코스이다. 그렇다고 뒤로 물러나거나 겁낼 것은 없다. 높아야 해발 150m가 최고봉이니 도전해 볼만하다.

마을의 산 중턱에 위치한다.
▲ 최영 장군 사당 마을의 산 중턱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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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자 수협과 추자면 주체로 성대히 제자를 지낸다.
▲ 최영 장군 사당에서 제사들 드리는 모습 추자 수협과 추자면 주체로 성대히 제자를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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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 장군 사당

올레 길을 시작 지점에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11호로 지정된 최영장군 사당이 있다.

석비 안내문에는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고려 공민왕 23년(1374년) 탐라에서 원의 목호(牧胡), 석질리(石迭里) 등이 난을 일으키자, 정부에서는 최영 장군으로 하여금 이를 진압케 하였다. 장군은 원정 도중 심한 풍랑으로 이곳 점산곶(點山串)에서 바람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는 동안 도민들에게 어망편법을 가르쳐 생활의 변혁을 가져오게 하였다."

그 뒤 이곳 주민들이 이러한 장군의 위덕을 잊지 못하여 사당을 지었다고 하며, 매년 봄, 가을에 봉향하고 있다. 1970년 국고보조에 의해 건물이 복원되었으며, 1971년 8월 지방분화재로 지정되었고, 1994년 사당단청 및 담장을 보수함으로써 옛 모습을 찾게 되었다. 사당 뒤로 이어지는 아름다운 송림을 지나, 돌탑이 있는 전망대에서 추자도 주변에 점점이 떠있는 섬들과 추자항, 그리고 하추자도의 돈대산을 바라본다.

제사를 드린 다음 괭과리를 울리며 축제를 벌린다.
▲ 최영 장군 사당 앞에서 제사를 드린 다음 괭과리를 울리며 축제를 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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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겨웠던 추자도 주민들의 삶

추자도는 끊임없이 왜구에게 시달렸다. 왜구들은 심지어 20세기 초반까지도 '수적'이란 이름의 바다 도둑떼가 설쳐댔다. 일제강점기에는 수산자원에 눈독을 들인 일본인들이 대서리에 진을 쳤다. 학교와 조합을 만들고 삼치어업에 매달렸다. 섬에는 '시와다 그물사건'이라는 어민항쟁이 전해진다. 1926년 5월14일 추자 주민들이 대거 운집해 면장과 추자어업조합에 항의했다. 결국 목포와 제주에서 경찰이 들이닥치고 소위 주동자 21명이 검거돼 압송됐다. 어업조합과 면장 등이 공모, 은행에서 빚으로 어구를 사들이고 갑절이나 비싸게 판매한데다 주민의견을 무시하고 우뭇가사리를 강제 매입한 데서 비롯된 사건으로 전해진다. 일본인들이 대형그물로 싹쓸이 하듯 고기를 잡아들이자 이에 반발했다는 증언도 있다. 일제의 수탈적 약탈어업이 빚은 결과였다.

두 번째는 1932년 5월에 추자도 어민들은 일본인의 유자망 어업으로 연안 어족이 고갈되므로 어민들의 생존권 문제를 들어 일본인에게 항의하다가 충돌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때 13명이 억울하게 감옥에 들어갔다.

1932년도에 일제의 수탈에 맞서 항거하였다.
▲ 추자도 영흥리에 세워진 항일 운동 비석 1932년도에 일제의 수탈에 맞서 항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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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자도와 삼치

추자도는 먼 바다에 있는 관계로 가난을 숙명처럼 알고 살아왔지만 그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것은 멸치와 삼치이다. 추자도는 먼 바다에 떠 있는 섬인 만큼 질이 좋은 고급 생선이 많이 잡힌다. 물이 가장 많이 빠지는 사리 때에 멸치를 많이 잡는다.  봄부터 8월까지의 멸치잡이는 추자도의 연례적인 행사로 빼놓을 수 없는 생업 가운데 하나이다. 이 은빛 멸치 떼들을 따라서 온 고등어가 그물에 걸리고 고등어를 쫓아온 삼치가 낚시와 그물에 떼로 걸려든다. 멸치, 고등어, 삼치 등 세종류의 고기가 먹이 사슬인 순으로 많이 잡힌다.
추자도 부둣가에 있는 수협 어판장에서는 새벽마다 어선들이 잡아온 생선이 경매에 붙여지는데 뭍사람들에게 즐거운 구경거리를 제공해 준다. 세 종류의 고기 중에 멸치는 액젓으로, 삼치는 추자도의 경제를 살리는 최대의 수입원이다.

한때 추자도는 조기잡이와 삼치잡이로 인해 인구가 번성할 때는 6천명이 넘었다. 그러나 10년 전부터 조기잡이 배들이 하나둘씩 제주도 한림으로 떠나면서부터 추자도 인구가 절반으로 줄었고 한다.  예전에는 그렇게 불편한 줄 모르고 살았지만 자녀 교육과 의료, 교통 등 각종 문화 혜택 때문에 제주도 본도로 가서 고기를 잡으면서 편리하게 살 수 있기 때문에 섬에서 정착을 꺼리고 있다. 갈수록 이런 현상이 많이 늘어날 텐데 대책 마련이 아쉽다.

▣ 상추자도

개요
상추자도는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추자면에 딸린 섬으로 동경 126°17′, 북위 33°57′에 위치하며 면적 1.53㎢, 해안선 길이 8.3㎞, 인구 1,308명, 672가구(2014년)이다. 제주특별자치도 본섬에서 북쪽으로 45㎞ 해상에 위치하며, 남쪽의 하추자도, 북쪽의 추포도․횡간도 및 40여 개의 무인도와 함께 추자군도를 이룬다.

지명유래
육지와 제주도의 중간쯤에 있는 추자도는 바람을 만난 황포 돛단배에게는 다시없는 피난처로 고려시대인 1271년(원종 12)까지는 풍후도(風候島)라 부르다가 전라남도 영암군에 예속될 무렵부터 추자도로 불렀으며, 그중에서도 위쪽에 있어 상추자도라고 하였다.

☛ 상추자도 가는 길
컨티넨탈(쾌속선) 목포 진도 추자 제주
한일카페리호(차도선) 완도 추자 제주 

섬내 교통
순환버스
대서리(선착장)→영흥리→묵리→신양1리→신양2리→예초리까지 운행(07:00~21:00)

추자항 풍경
▲ 미역을 말리는 주민 추자항 풍경
ⓒ 이재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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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전남일보에 기고했지만 지면 관계상 이렇게 자세한 기사를 싣지 않았습니다.



태그:#완도 , #추자도 , #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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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대학교 도서문화연구원 연구원으로 2019년까지 10년간 활동, 2021년 10월 광운대학교 해양섬정보연구소 소장, 무인항공기 드론으로 섬을 촬영중이며 포털사이트 네이버의 재정 후원으로 전국의 유인 도서 총 447개를 세 번 순회 ‘한국의 섬’ 시리즈 13권을 집필했음, 네이버 지식백과에 이 내용이 들어있음, 지금은 '북한의 섬' 책 2권을 집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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