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6화에서 이어집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여기까지가 배우로서 공식적인 스텔라의 이력이다. 기획사는 인기가 치솟을 무렵 스텔라를 팔았다. 대부업과 사채업계에서 힘을 쓰는 미야자와 이치로 '퀵캐시' 회장, 일본에서 현금 동원력 1위, 블랙마켓의 재벌 서열 1위인 그에게 부채 상환의 명목으로 스텔라를 넘긴 것이다. 더러운 사진과 동영상을 곁들여서. 70대가 훌쩍 넘었지만 정력적인 미야자와 회장의 요구 때문이었다. 우연히 스텔라가 출연한 영화를 보고는 손녀뻘인 스텔라에게 관심을 갖게 됐고, 저간의 사정을 들어보고는 자신의 '귀여운 여인'으로 삼을 요량으로 기획사로부터 받을 돈과 상계처리 한 것이다.

미야자와 회장은 자신이 비록 돈놀이 할지언정 깨끗하게 한다는 모토 아래 나름대로 철학 있는 업자로 평판 받는다. 신의를 지킬 줄 알고, 문화와 예술에도 투자를 아끼지 않아 이쪽 업계의 가장 큰 '메세나'로 꼽힐 정도다. 아주 오래전부터 일본의 상인들은 금권으로 정권을 좌지우지해 온 만큼 그의 영향력은 여당인 자민당은 물론 야당이 민주당에까지 뻗쳐 총리를 갈아치울 수 있을 정도의 숨은 실력자라는, 믿기지 않는 평판이 나올 정도다.

사실 사람이 사람을 판다는 얘기가 말이 되지 않지만 말이 된다. 실질적으로 판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고, 팔려가는 사람도 그 사실을 철저하게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의치 않는 게 요즘 세상이다. 그렇게 '팔려간' 스텔라가 지금 다케우치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이 아파트는 스폰서인 미야자와 회장이 마련해 준 집이다. 최소한 표면적으로는 스텔라에게도 손해 난 거래는 아니었나 보다.

스텔라는 일찌감치 연예계의 꿈을 접었다. 미야자와 회장의 도움으로 TV나 영화에 가끔 얼굴을 비쳤지만 그게 다였다. 그녀에게 AV 배우 이외에 연예인의 재능이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숫기도 없고, 연기력도 그리 출중하지 않았던 스텔라였다. 그렇게 맹랑한 꿈을 팽개친 스텔라는 미야자와 회장이 찾을 때를 빼놓고는 회장이 마련해 준 '라 스트라다'라는 VVIP 회원제 클럽을 맡아 업소 대표로 손님들과 마주하는 일을 본업으로 삼았다.

클럽 이름은 정신적으로 약간 모자라지만, 한없이 착한 '젤소미나'와 근육질의 무심한 남자 '잠파노'로 유명한 고전 영화 '길'의 원제에서 미야자와 회장이 손수 따 온 것이다. 자신을 잠파노와 동일시하고 스텔라를 젤소미나로 여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회장이 이렇게 발 벗고 스텔라에게 클럽까지 마련해 준 것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시야에 스텔라를 머무르게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남자에게 한 여자만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닌 것처럼 한 젊은 여자에게 더욱이 스폰서 노인네 이외의 다른 남자가 눈에 들어오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게다가 마야자와 회장은 스스로 호인이라 여기며, 스텔라의 일정한 방황은 인정해 주는 리버럴리스트였다. 거기서 다케우치를 만났고, 만남이 이어졌고, 오래 됐고, 그렇게 '연인 아닌 연인' 관계가 된 것이다.

처음 다케우치가 스텔라를 만났을 때 다케우치는 만취했다. 자신의 파트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몇 번을 쫓아 보냈다. 한마디로 '진상 손님 짓'을 한 것이다. 그리고 매니저인 스텔라가 손님의 파트너를 하지 않는다는 관행을 무시하고 직접 앉았다. 말없이 다케우치의 주정을 받아 줬고, 그의 고집에 따라 잠자리까지 함께 했다.

그렇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된 다케우치는 섹스와는 거리가 멀었다. 쓰러져 잠들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스텔라는 다케우치가 검찰의 잘 나가는 인물이라고 칭찬한 지인의 귀띔에 의도적으로 다케우치에게 다가간 것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아침까지 다케우치의 곁에서 시중을 들어준 스텔라가 다케우치도 싫지는 않았다. 더욱이 대부분의 알코올 중독자들이 그렇듯 전날 술에 취해 벌인 자신의 '만행'에 대해 한마디도 안 하고, 묵묵히 감정노동 서비스를 매니저인 스텔라가 직접 제공했다는 데 고마움을 느꼈다. 그런 악연으로 둘은 엮이게 된 것이다.

다케우치가 스텔라를 찾은 지 1년이 되는 날, 스텔라는 다케우치에게 청을 하나 넣는다. 전에 기획사에서 자신의 순결을 빼앗은 녀석들을 처리해 달라는 부탁이었다. 물론 그때 일에 대해서는 함구했고, 다른, 아는 후배가 몸만 빼앗기고, 돈을 벌기는커녕 제대로 연예계에 데뷔도 못했다며, 살펴보면 이 같은 죄상이 하나 둘이 아닐 것이라며, 다케우치에게 '좋은 검사'로서 '나쁜 악당들'을 해치워달라며, 베갯잇송사를 벌였다.

다케우치는 두 가지 옵션을 제시했다. 하나는 '린치', 다른 하나는 '징역'이었다. 그러나 스텔라는 그 옵션을 그대로 받지 않았다. 린치를 한 다음 징역이라는 옵션을 새롭게 내놓고 다케우치에게 역제안을 했다. 다케우치는 감탄했다. 그런 스텔라가 더욱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원하고자 하는 것은 끝까지 얻고야 마는 악당이라는 점이 자신과 너무나도 닮았기 때문이었다.

다케우치는 외무성 근처에 은밀히 숨어있는 사무실을 떠나 아카사카의 스텔라 집으로 향한다. 후텁지근한 '츠유(梅雨, 장마)' 때라 비가 오락가락 하는 통에 얼른 택시를 잡는다. 도착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린다. 카드를 인식시키자 엘리베이터 문이 열린다. 갈색과 흰색 대리석 바닥에, 벽면은 호두나무에 황금빛 황동 금속 장식으로 화려하게 장식한 승강기는 금세 19층 펜트하우스에 도착한다. 아카사카 끄트머리 쪽에 자리 잡아 창밖으로는 화려한 거리의 모습이 주단처럼 깔려있다.

암호 찍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린다. 스텔라의 인사말 이외에 다케우치는 말이 없다. 다케우치와 스텔라의 만남은 언제부터인지 늘 조용하다. 어떻게 보면 무미건조하다. 마치 사랑이 사라지고 관계나 믿음으로 사는 오래된 부부를 연상시킨다.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풀어헤친 다케우치는 늪처럼 빠져드는 푹신한 가죽 소파에 몸들 던진다. 스텔라는 잔에 얼음을 넣고, 술을 따른 다음 스터로 몇 번 젓고, 잔을 다케우치에게 건넨다. 목이 마른 모양이다. 한잔을 숨도 쉬지 않고 비운다. 스텔라의 술 따르는 일은 반복된다.

스텔라가 다케우치 곁으로 다가가 어깨를 주물러준다.

 "요즘 바쁜 모양이네요. 피곤해 보이고…."
"……."
"당신은 참 무심해요. 자기가 찾고 싶을 때만 나를 찾고, 말하고 싶을 때만 말하고, 나를 안고 싶을 때만 안고, 그러다 소리 없이 떠나고…."
" ……."


그렇게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던 다케우치가 더 조용해진다. 낮게 코를 골며 잠들었다. 한 나라를 실질적으로 쥐락펴락하는 의사결정연구단 기획조정실장이라는 일이다. 그에게 권력을 쥐어준 만큼 머리를 짜내야 하는, 고도의 노동 강도를 견디기 힘든 것도 당연하다. 스텔라는 다케우치의 풀어 헤친 넥타이를 벗겨 내고, 담요를 덮어준다. 자리를 정리하고, 스텔라는 샤워한 다음 다른 때보다 일찍 잠든다.

어둠이 아직 덜 걷혔다. 스텔라는 뒤에서 다가오는 무언가 묵직한 느낌을 느낀다. 다케우치가 새벽잠을 깨고, 버릇처럼 스텔라를 뒤에서 안는다. 샤워도 하지 않아 땀 냄새가 묻은 다케우치의 체취가 색다르다.

그러나 애정을 찾아보기 어려운, 기계적인 몸짓은 금세 끝난다. 평소와는 다르게 다케우치는 콘돔을 사용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스텔라의 몸 속 깊숙이 진한 사정을 한다. 무슨 의미인지 슬픔만 남는다. 다케우치의 철저한 이기주의에 익숙해졌건만 스텔라는 다시 한 번 마른 눈물을 삼킨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과 한 몸이 됐다는 성애에 즐거운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다케우치와 섹스가 일상이 됐듯 일상은 의무였고 반복될 뿐이었다.

'나의 삶은 영화 '사랑의 블랙홀'에서 배우 빌 머레이가 연기했던 TV 기상통보관 필 코너스의 반복되는 하루하루처럼 자살까지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는 절망적 상황이 아닌가. 다만 그 영화처럼 해피 엔딩을 기대하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일 뿐.'

눈물이 잔잔하게 흐른다.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다른 날처럼 샤워를 마치고 옷을 갈아입은 다케우치는 새 넥타이를 맨다. 감색 바탕에 노란색 사선이 반복되는, 매우 공식적이고 권위적이고 사무적인 자신을 제대로 표현한다. 전투에 임하는 사람처럼 표정조차 굳은 모습이다.

"지난 번 한국에 다녀온 야쿠자 애들, 오늘 저녁 때 들릴 거야. 대접 잘 해 주고, 계산은 내게 달아 놔."

지독하게 업무적이다. 비서에게 말하는 것처럼 명령조다. 스텔라가 차려놓은 간단한 아침상에서 오렌지 주스만 마시고 토스트는 손대지도 않는다. 여전히 스텔라를 뒤에 남기고 말없이 떠난다. 스텔라는 마지막으로 다케우치에게 기회를 줬지만 또 다시 무의미한 반복만 다가온다.

최소한의 애정조차도 찾을 수 없다. 타인이라도 그렇게 무관심할 수는 없다. 스텔라는 결심한다. 그가 준 티파니의 보석이나 카티에르 시계를 돌려 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의지대로 다케우치에게 이별을 고할 것이다. 그리고 영화에서 필 코너스가 착한 사람이 되기로 결심한 것처럼 다케우치에게서 떠나 자신을 찾을 것이다. 감정 따위는 묻을 수 있다. 더 이상 주고받을 것이 없는 사람들은 더 이상 상대방이 필요치 않다. 그게 삶이다.

미야자와 회장은 눈을 감으며 입술을 깨문다. 노욕이나 노추 때문이 아니었다. 자신의 정부가 다른 남자와 잠을 자는 모습을 두 눈으로 확인한 사내가 견뎌야 하는 분노 때문이다. 스스로가 일정 부분 스텔라의 바깥사랑을 용인한다고 여겼지만 그게 아니었다. 오로지 그는 그 순간 데스데모나를 죽인 오셀로였다.

그것이 명백한 사실인지 아니면 오해인지 전혀 상관없다. 더욱이 자신보다 다른 남자에게 헌신적이고, 자신보다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것 같다는 느낌은 무엇보다 참담했다. 그간 스텔라에게 보낸 사랑과 배려는 모두 증발해 버리고 오로지 격노와 치정만 무겁게, 더럽게 가라앉아 남았다.

역시 '쥐새끼' 이아고는 그곳에도 있었다. 미야자와 회장의 오른팔인 오카자키 히로시다. 스텔라에 매력을 느꼈던 오카자키는 그녀에게 은근히 치근거렸다. 그러나 싸늘한 스텔라의 반응에 일말의 자존심에 금이 갔다.

'AV 배우 출신 계집이 오야붕의 사랑을 받는다고 기고만장해졌다. 어차피 창녀는 창녀일 뿐이다.'

이렇게라도 모멸감을 다스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악의의 앙금은 급기야 그는 스텔라를 나쁜 여자로 만드는 데 수완을 발휘한다. 미야자와 회장에게 스텔라와 다케우치의 심각한 관계를 넌지시 비춘 오카자키는 스텔라 집에 몰래 패쇄회로 TV를 설치해서 결국 사달이 나게 만든 것이다.

"히로시, 이 사실을 절대 밖으로 새나가게 하지 마라. 그리고 지금부터 스텔라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두 내게 알려. 그 다케우친가 뭔가 하는 친구, 신상파악을 해 봐. 지금 현재는 물론 과거의 행적, 가족관계, 하다못해 금융관계까지 모든 것을 파악해 놓도록…."

법률적 혹은 관습적인 부부는 아니었지만 미야자와 회장은 졸지에 '오쟁이 진 마누라'의 남편이 된 셈이다. 늦은 사랑이 미움으로 변하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 의심, 질투, 시기, 악의가 미야자와 회장을 휩싼다.

첫 만남에서 자신을 조금은 두려워하고 경계했던 앳된 스텔라가 떠오른다. 자신이 '팔린 것'을 알고 눈물을 짓는 모습이 애처로웠다. 그런 스텔라를 쓰다듬고 달래며 마음의 문을 열었을 때가 기억난다. 스텔라를 만나고 첫 생일날 정열적인 스텔라에게 '피전 블러드' 루비 반지를 선물했을 때, 스텔라에게 집을 마련해 줬을 때 기뻐하는 모습이 아련하다.

늙다리에게 다시 남성을 찾게 해주고는 부끄러운 듯 볼에 입맞춤해 주던 스텔라를 그윽하게 바라보던 자신이 보인다. 그런 만큼 미야자와 회장에게 치밀어 오르는 울화는 가슴과 머리를 옥죄어온다.

애꿎게도 먼저 떠난 아내의 젊을 적 모습이 나타난다. 따뜻하게 웃는 모습이 갑자기 창백하게 비웃는 듯하다. 자신이 살아온 날들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 하는 엉뚱한 의문도 급작스레 든다. 너무 오래 살았나 하는 자괴감도 생긴다. 온통 착잡하다. 술을 찾는다. 차갑게 냉장된 사케와 막걸리가 각각 사기로 만든 주전자에 담겨 나온다.

사케 한 잔, 막걸리 한 잔을 따른다. 먼저 사케 잔을 비운다. 그리고 막걸리 잔도 단숨에 비운다. 마치 사극에서 임금에게 받은 사약처럼 처절하게 술잔을 비웠다. 술잔이라도 비우니까 마음이 조금은 달래진다. 우울한 심경을 술로 달래는 사내들은 국적에 관계 없이 어디에나 있는 모양이다.

문득 그가 50대 넘어서 책을 읽다가 마음에 사무쳐 외워 둔 당시(唐詩) '송춘사(送春詞)'를 읊조려본다.

'日日人空老(하루하루 사람은 부질없이 늙어가지만),
 年年春更歸(해마다 봄은 다시 돌아오네),
 相歡有尊酒(술 단지에 술 넉넉하니 함께 즐기세)
 不用惜花飛(꽃이 흩날리며 진다고 섭섭해 할 것 없다네)'

이백이나 두보에 필적했던 왕유, 고관대작까지 지낸 그 역시 늙어가는 섭리를 벗어날 수 없었듯 자신도 늙어간다는 것이 안타까운 모양이다. 술 한 잔에 마음의 때를 조금은 씻어버리고 난 미야자와 회장은 한숨을 크게 쉬어본다. 마음이 한켠으로는 정리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에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그토록 사랑하는 스텔라는 지켜주고 싶다. 그리고 꿈에도 그리는 아버지를 찾아주고 싶다. 스텔라를 잃는다는 불안을 떨치고 싶다.

독일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 감독의 영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의 여주인공인 에미가 사랑하는, 스무 살이나 넘게 어린 모로코 사람 알리에게 느꼈던 것과 유사한 그 불안을 흔적 없이 지워버려야 한다. 그것이 스텔라의 의지든 아니든, 어리고 가녀린 스텔라를 상실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모든 영혼을 잃어버리는 것이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렇게 결론에 이르자 모든, 독이 묻은 화살은 이내 다케우치를 향하고야 만다.


태그:#오셀로, #데스데모나, #이아고, #송춘사, #왕유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La Bella Vita! 인생은 아름답다며, 글쓰기로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세계일보, 머니투데이, 한경비즈니스, 이코노미조선 등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2019년 '아산문학' 공모전에서 '그는 제바닷타였을까'라는 단편소설로 대상을 받고, 전업작가로 살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