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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올리면서 2차 세계대전 유럽 전선의 역사를 제법 자세히 찾아볼 수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미국과 서방은 독일에 대한 전승일을 1945년 5월 8일이라고 기록하며, 역사 교과서들 또한 그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소련, 지금 러시아는 나치 독일에 대한 승리를 5월 9일이라 지정하고 올해 70주년 전승절 행사도 이날 치렀습니다. 미국과 서방 정상들도 초대했지만 참석하지 않았더군요. 호기심으로 찾아보기 시작한 이 단지 하루 차이의 불일치가 당시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함축하고 있었습니다.

미국 전승일과 러시아 전승일, 하루 차이 나는 이유

노르망디 상륙 후 서부전선에서 미·영 연합군은 독일군 30여 개 사단을 상대하며 독일 본토로 진격합니다. 하지만 동부전선에서는 소련군이 독일군 최정예를 포함한 150여 개 사단을 천문학적인 인명피해를 입으며 제압한 끝에 독일로 진공 중이었습니다.

군인들뿐 아니라 너무나 많은 민간인이 죽어 (최소 2천만 명) 스탈린이 전쟁 후 인구 조사를 비밀로 할 정도였답니다. 공세로 들어선 소련군의 기세는 무서웠습니다. 베를린 함락 후 소련이 주인공으로 독일의 무조건 항복 선언을 받게 될 건 쉽게 예상되는 상황이었습니다.

유럽을 나치 독일로부터 해방한 주인공이 자신들이라 믿어 의심치 않던 미국 여론은 베를린의 심장부에 성조기 꽂기를 당연히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미국 여론은 미국 정부와 군부에는 참 곤란한 상황이었지요. 뭐 여론을 호도하며 스스로 저지른 일이니 할 말은 없었지만...

유럽 전선의 그동안 전개상황을 잘 알고 있던 아이젠하워와 미군 수뇌부는 소련군보다 먼저 베를린을 취하며 승리의 주인공이 되려는 건 무모한 짓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남의 밥에 숟가락을 얹는 것도 정도껏 아닐까요.

그래서 그들은 후세에게 떳떳하지 못할 꼼수를 쓰게 됩니다. 미·영은 베를린 공략에 거의 참여하지 않고 그 대신 소련보다 먼저 독일로부터 항복선언을 받는 데 집중합니다. 히틀러 사후에 혼란을 겪고 있던 나치 수뇌부와 소련을 제외한 채 비밀 회담을 진행합니다.

사실 양측이 서로에게 원하는 바가 있었지요. 미군은 본국 여론에 승리의 주인공으로 띄울 수 있는 나치의 항복 선언, 나치 수뇌부는 소련군에게 포로가 되면 예측할 수 없어 보이는 자신들과 가족들의 안전 보장.

결국 5월 7일 오전 7시경 라임즈라는 베를린에서 한참 서쪽에 있는 도시에서 나치독일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합니다. 이 항복 문서는 세계 전쟁사에 유례가 없는 거의 이틀의 유예기간을 명시합니다(다음 날 5월 8일 밤 열한 시부터 발효).

사실 미·영에게 나치는 그때 라임즈에서 완벽히 항복하며 유럽 서부전선은 막을 내립니다. 그러나 미·영의 암묵하에 동부전선의 소련과는 전투를 계속하며 도망가거나 미·영 쪽으로 투항할 수 있는 시간을 벌게 됩니다.

소련은 미·영이 이틀 전에 연합군에 항복했다고 선언한 독일군과 치열한 전투 끝에 결국 5월 9일 베를린에서 그때까지 남아있던 나치 수뇌부에게 항복을 받아냅니다. 아이젠하워는 자신의 하급 보좌관을 보내 항복을 참관하게 했고, 미국 역사에서 5월 9일 나치의 진짜 항복은 사라지게 됩니다.

역사 바로보기 막으려는 꼼수

인정할건 인정해야죠. 나치는 소련이 무너뜨렸습니다.
 인정할건 인정해야죠. 나치는 소련이 무너뜨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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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영 지상군이 독일 점령 중 민간인에 끼친 해악은 분명히 소련군에 의한 것보다 적었습니다. 특히 소련군이 독일 여성들에게 행한 범죄는 인류 전쟁 역사에서 최상위권 악행 중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독일 민간인 사망자도 미·영 지상군보다 소련군에 의해 더 많이 저질러졌을 것이라고 추정됩니다(폭격에 의한 민간인 사상자를 포함하면 꼭 그렇지도 않을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미·영이 소련을 제외한 채 나치와 비밀회담을 한 들 민간인이 득을 본 것은 아니었고, 그럴 의도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이 꼼수가 나치 전범들에게 자기 살길을 찾을 시간을 벌어 준 것은 사실입니다. 

최근 전승 날짜의 불일치에 대해 미국 내에도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대부분 미국 주류 언론은 독일과 모스크바의 시간 차이로 전승일이 다르다고 간단히 지나쳤습니다. 그러나 한참 전투 중에 있던 같은 연합군의 사기를 꺾은 때 이른 항복문서와 이에 적혀있는 이틀의 유예기간에 대해 아는 이는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역사는 승자의 것이라고 말하며 일반 시민들에게 역사에 대한 회의를 느끼게 하는 이들, 너무나 자명한 사건임에도 후세가 판단할 일이라고 아직도 주장하는 이들, 역사학자들만이 옳은 해석을 할 수 있다는 말을 하는 이들... 요즘 이들이 대한민국의 역사 교과서를 자기들 해석대로 급히 바꾸려고 합니다. 

그러나 어딘가 흔적은 남아있고 누군가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통 시민들이 결국 역사를 바로 보는 걸 막으려는 꼼수야말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것 아닐까요?

덧붙이는 글 | 시민기자 하연주, 박인권 공동 작성



태그:#이차 세계 대전 역사 , #유럽전선 전승일, #역사 교과서 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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