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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둑길에서 커다란 물이끼덩이를 밟는 바람에 미끄러져서 그만 자전거가 엎어졌습니다. 함께 자전거를 타던 아이들은 안 다쳤으나, 저는 크게 다쳤습니다. 나흘이 되도록 물도 밥도 몸에 넣지 못하면서 끙끙 앓기만 하는데, 이때 다친 오른무릎은 살짝 대기만 해도 몹시 아픕니다.

오른무릎이 크게 다쳤으니 서거나 걷지 못합니다. 무릎에서 힘을 받지 못하기에 피가 쏠리기만 할 뿐 꼼짝을 못 합니다. 무릎을 못 쓰는 다리는 아무 힘을 줄 수 없이 달린 살덩이와 같습니다. 이를 새삼스레 느끼면서 오른무릎이 나아지도록 기운을 모으고 차근차근 다스립니다.

드러눕기만 하지 말고 씩씩하게 일어서자고 다짐하면서 오른다리에 힘을 넣어 펴고 접기를 해 보는데, 몸이 안 아픈 사람한테는 아무렇지 않을 일이 몸이 아픈 사람한테는 더없이 큰 일입니다.

이럴 때에 다른 사람들은 무엇을 생각할까요? 목발을 생각할까요, 아니면 바퀴를 붙여 끌고 다니는 걸상을 생각할까요. 자리에 드러누운 채로도 머릿속에 그리는 생각을 글로 옮길 수 있는 컴퓨터나 기계 장치를 생각할까요, 아니면 손가락을 놀리기만 해도 무엇이든 심부름을 해 주는 기계나 로봇을 생각할까요.

젊은 영혼들을 구속하는 모든 문화의 압제에 저항하는 자유로운 영혼들의 동맹, 그것이 과학이다 … 아인슈타인도 나이가 들면서 장방정식의 형식적 특성에 점점 집착했다. 그럴수록 장방정식을 있게 해 준 광범위한 우주의 개념에 대해서는 흥미를 잃어갔다. 아인슈타인은 생애 마지막 20년 동안, 물리학 전체를 통합할 수 있는 방정식을 찾는 일에만 매달려 무익하게 보냈다. (23, 30쪽)

과학이 최근 수십 년 간 가난한 사람들에게 혜택을 주지 못하게 된 까닭은 두 가지 현상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순수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인간의 현실적 요구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 현상이 한 이유요, 응용과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점점 더 즉각적인 이윤에 집착하고 있는 현상이 또 한 가지 이유다. (49쪽)

프리먼 다이슨 님이 쓴 <과학은 반역이다>(반니,2015)라는 책을 읽습니다. 글쓴이 프리먼 다이슨 님은 무척 오랫동안 프린스턴 고등연구소에서 교수로 지냈다고 하는데, 1947년에 리처드 파인만 님과 함께 '원자와 방사선 행동을 계산하는 간편한 방정식'을 개발했다고도 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때에는 민간 과학자로서 영국 공군에서 일했다고도 합니다. 그러니 나이가 무척 많은 분입니다. '슈뢰딩거-다이슨 방정식'을 정리하기도 하면서 노벨상 후보에 오르기까지 했다니, 과학밭에서는 돋보이는 발자국을 남겼다고 할 만합니다.

<과학은 반역이다>는 "the scientist as rebel"라는 이름으로 2006년에 처음 나왔다고 합니다. 영어로 나온 책에서는 '과학자·반역자'라고 나왔으나, 한국말로 옮긴 책에서는 '과학·반역'으로만 줄여서 나옵니다.

겉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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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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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튼, 한자말 '반역'은 "1. 나라와 겨레를 배반함 2. 통치자에게서 나라를 다스리는 권한을 빼앗으려고 함"을 뜻합니다. '배반'이라는 한자말은 "저버림"이나 "돌아섬"을 뜻합니다. 그러니까, 정부나 정치권력 뜻하고 어긋나는 길을 가는 사람이라면 모두 '반역자'라고 할 만합니다. 중앙정부에서 핵발전소를 자꾸 지으면서 엄청난 송전탑을 박으려고 하는 정책을 반대하면서 싸우는 사람도 '반역자'입니다. 아이들을 입시지옥 수렁에 집어넣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도 '반역자'입니다. 그리고, 모든 문화와 문명이 도시로 쏠리는 오늘날 흐름에서 도시를 떠나 시골로 가서 조용히 살림을 짓는 사람도 '반역자'예요.

1918년 11월 전쟁이 끝났을 때, 영국의 대중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될 극도의 공포라고 전쟁을 회상했다. 하지만 전쟁에 대한 독일 시민들의 기억은 달랐다. 국내의 배신자들에게 허를 찔리지만 않았다면 충분히 승리할 수 있었던 힘의 시험대였다. (99쪽)

군인 프로 정신의 본보기를 독일에서 찾은 이유는 제2차 세계대전의 참전국들 중에서 독일만큼 도덕적 딜레마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준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요들과 발크는 모두 나쁜 대의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전문적인 능력을 정복과 파괴에 썼다 … 그들은 이웃집을 탱크로 부수고 불태우면서도 이웃의 고통에는 무관심했다. (119쪽)

<과학은 반역이다>라는 책에서는 과학 지식이나 이론은 거의 안 다룹니다. 아무래도 과학 지식이나 이론은 '과학 논문'으로 쓸 만할 뿐이요, 여느 사람들한테는 '과학이 무엇'이고 '과학으로 무슨 일을 하'며 '과학자인 사람은 어떤 길을 걸어야 슬기로우면서 아름다운가' 같은 대목을 차근차근 들려줄 수 있어야 할 테지요.

아흔 살을 훌쩍 넘기고도 바지런히 글을 쓰고 강연을 한다는 프리먼 다이슨 님은 과학을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전쟁을 퍽 자주 곁들여서 함께 이야기합니다. 그도 그럴 까닭이, 전쟁은 '첨단과학'이 이룬 '첨단무기'로 사람들을 더욱 손쉽게 더욱 많이 죽이는 짓에 이바지했기 때문입니다.

과학이 아니었으면 수소폭탄이나 핵폭탄이 나오지 않습니다. 과학이 아니었으면 핵잠수함이나 항공모함이 나오지 않습니다. 과학이 아니었으면 전차나 미사일이나 기관총이 나오지 않습니다.

과학이기에 생화학무기를 만들어 냅니다. 과학이기에 비행기에 폭탄을 더 많이 실어서 도시도 숲도 집도 깡그리 불태우는 짓에 이바지합니다.

진정성 없는 평화주의자들은 겁쟁이나 공범자 취급을 받았다. 유럽 평화주의의 참패는 적어도 한 가지 교훈은 남겼다. 간디처럼, 진정성과 용기를 겸비하지 않으면 현대 사회의 평화주의는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이다. (158쪽)

주류와 멀리 떨어진 생물학의 드넓은 배후지에는 다윈의 전통을 따르면서 새로운 종의 들풀을 발견하거나 말 그대로 나비를 수집하는 아마추어들이 드넓게 포진해 있다. 20세기에 가장 유명한 나비 수집가라면 작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를 꼽지만, 유명세를 타지 않았을 뿐 새로운 종들을 발견한 아마추어 수집가들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226쪽)

과학은 왜 전쟁무기가 첨단무기가 되는 길에 이토록 이바지했을까요? 과학자는 첨단무기가 이 지구별에 평화 아닌 전쟁만 일으키는 줄 몰랐을까요? 과학자는 과학 연구와 탐구만 하느라 '마음을 옳고 바르며 슬기롭게 갈고닦는 배움'은 아예 등을 돌렸을까요?

전쟁무기를 첨단무기로 만드는 데에 쏟아부은 돈은 이루 헤아릴 수 없도록 엄청납니다. 그 돈을 지구별에 평화와 사랑이 감돌도록 하는 데에 쓴다면, 이 지구별에는 아프거나 슬퍼할 일이 없습니다. 전쟁무기에 이바지하는 과학이 아니라, 무한재생이 가능한 깨끗한 에너지를 살피는 과학이라든지, 석유나 가스나 석탄이 아닌 햇볕과 물과 바람을 살려서 얻는 깨끗한 에너지를 북돋우는 과학이라든지, 매연과 공해를 말끔히 걸러내는 길을 여는 과학이라든지, 석유에서 뽑아내는 플라스틱 쓰레기가 아니라 쉽게 흙으로 돌아갈 수 있는 깨끗한 소비재가 되도록 헤아리는 과학이 될 수 있으면 얼마나 아름다울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그러니까, 과학자가 걷는 길이 '돈이 되는 길'을 찾는 과학 연구나 탐구가 아니기를, 과학자가 하는 연구나 탐구가 정부나 기업 지원금을 더 타내는 쪽으로 쏠리지 않을 수 있기를 빌어 마지 않습니다.

파인만이 특히 우려했던 부분은 매뉴얼에 의존한 교사들이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한 학생들의 점수를 깎을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실제로 그런 일이 발생했다. 수년 후 (파인만 딸) 미셸이 고등학생 때, 대수학 문제의 정답을 구했지만 기존의 풀이방식과 다르다는 이유로 점수가 깎였다. 파인만이 항의하러 학교를 찾아갔을 때, 교사는 오히려 그를 보고 수학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비난했다. 그 일이 있은 후, 미셸은 집에서 아버지에게 대수학을 배웠고 시험 때만 학교에 갔다. (333쪽)

러더퍼드는 원자핵을 연구하며 여생을 보냈다. 러더퍼드에게 연구의 원동력은 원자핵을 더 깊이 이해하고자 하는 열정이었다. (300쪽)

리처드 파인만 님과 같은 바람을 마시면서 일하기도 한 프리먼 다이슨 님은 재미있는 '숨은 이야기'도 들려줍니다. 노벨상까지 받은 물리학자가 '수학을 모른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니 참으로 놀라운 노릇입니다. 수학 교사인 분은 '교과서 수학'은 다른 누구보다 '수학 교사 스스로' 가장 잘 안다고 생각했을까요? 교과서에서 내놓는 풀이법을 똑같이 따르지 않는다면 '점수가 깎여도 될'까요?

수학이나 과학은 '정답찾기 놀이'가 아닙니다. 수학이나 과학뿐 아니라 문학이나 철학도 정답찾기를 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학문에도 정답이란 없습니다. 모든 학문은 저마다 다 다르면서 새롭고 다 같이 즐겁게 누릴 삶을 생각하는 길찾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과학은 반역"이라고 하든 "과학자는 반역자"라고 하든, '반역·반역자'는 틀에 박힌 길을 가지 않는다고 할 수 있습니다. 틀로 지은 대로 똑같이 따라하기를 거스르면서 늘 새로운 길을 찾는 몸짓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길로 가면 무엇이 나올까 하고 궁금해 합니다. 저 길로 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하고 궁금해 합니다. 즐거움과 아름다움을 찾는 새로운 길을 걷습니다. 선입관이나 편견이나 고정관념에 갇힌 채 쳇바퀴를 돌려 하지 않고, 스스로 홀가분하면서 사랑스레 피어나는 꽃이 되고자 합니다.

푸앵카레와 아인슈타인이 당대의 기술을 똑같이 이해했다고 생각하며, 철학적 사유에 대한 두 사람의 애정도 같았다고 본다. 다만 다른 점이라면, 새로운 개념을 수용하는 태도였다. (258쪽)

자연 상태의 숲에서 새들의 사체더미를 볼 수 없는 까닭은 자연의 청소부 덕이다. 인간이 자연의 아름다움을 망치는 가장 큰 이유는 채굴과 청소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353쪽)

숲에는 청소부가 있습니다. 숲 청소부는 쓰레기를 남기지 않습니다. 숲 청소부는 온갖 주검이 정갈한 흙으로 돌아가도록 해 줍니다. 숲 청소부가 있기에 숲은 언제나 맑고 푸릅니다. 바다에도 바다 청소부가 있어서 바다가 언제나 맑고 새파랗게 빛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수기나 공기청정기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에어컨은 무엇을 할까요? 끝없는 소비문명은 어디로 가려고 할까요? 공사비도 어마어마하지만, 문을 닫을 적에도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야 하는 핵발전소에 왜 이렇게 과학기술이 많이 들어가야 하고, 정부 지원금을 받아서 '안전한 원자력'을 홍보하는 과학 전문가는 왜 이렇게 많을까요?

옳지 않다고 느낄 줄 아는 가슴과, 옳지 않다고 느끼는 길을 거스를 줄 아는 당찬 마음과, 옳지 않다고 느끼는 길을 거스를 줄 아는 당찬 마음으로 아름답게 새 길을 여는 슬기로운 과학자가 늘어날 수 있기를 빕니다. 과학자뿐 아니라 모든 전문가들이 반역자가 될 수 있기를 빕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글쓴이 누리사랑방(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

책이름 : 과학은 반역이다
프리먼 다이슨 글
김학영 옮김
반니 펴냄, 2015.7.30.
19000원



과학은 반역이다 - 물리학의 거장, 프리먼 다이슨이 제시하는 과학의 길

프리먼 다이슨 지음, 김학영 옮김, 반니(2015)


태그:#과학은 반역이다, #프리먼 다이슨, #인문책, #과학자, #인문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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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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