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경민, 오재일. 두 타자 모두 아이러니하게도 규정 타석 진입을 하지 못한 상태다. 그럼에도 팀 내에서 두 선수가 차지하는 비중은 꽤 큰 편이다. 이미 주전 한 자리를 꿰찬 허경민은 말할 것도 없고, 오재일은 김재환의 부진을 발판삼아 꾸준히 페이스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 4일 NC 전에선 프로 데뷔 이후 처음으로 한 시즌 두 자릿 수 홈런이라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다른 팀보다도 백업 멤버가 강한 두산은 아무리 기량이 뛰어나더라도 주전 경쟁에서 살아남지 못하면 벤치 신세를 지는 선수가 많았다. 정진호, 유민상 등 잠재력이 있는 선수들도 주전 자리를 보장받지 못했다. 그만큼 노력이 따르지 않는다면 엔트리에서조차 이름을 올리기 힘든 게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허경민과 오재일, 두 '미생'의 진화는 굉장히 주목해볼 만하다. 타선 곳곳에서 지뢰처럼 터지며 상대 타선을 괴롭히는 점은 타선 전체에 시너지 효과를 가져다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일 NC 전에서도 허경민은 4안타, 오재일은 승리에 쐐기를 박는 홈런포를 터뜨리며 제 몫을 다했다.

'아슬아슬 규정타석' 멈출 수 없는 허경민

올 시즌 두산 타선의 유일한 고민은 단연 외국인 타자였다. 잭 루츠는 실망스러운 모습만을 남긴 채 짐을 싸야만 했고 데이빈슨 로메로도 세 달여 동안 보여준 게 많지 않다. 게다가 수비에서도 안정감이 떨어져 '외국인 타자 딜레마'는 아직도 진행형에 가깝다. 이 딜레마를 조금이나마 풀어준 것은 다름이 아닌 허경민이다.

물론 엄밀히 말해 4월 한 달만 놓고 본다면 허경민보다 최주환이 더 좋았다. 3월과 4월 8경기 출장에 그친 허경민, 그러나 최주환은 같은 기간 28경기에 출장하며 2할 8푼 8리의 타율을 기록해 조심스럽게 커리어하이 시즌에 대한 기대를 가졌다. 붙박이 3루수로서도 가능성을 엿본 셈이다.

햄스트링 통증을 안고 있던 허경민에게 최주환의 활약은 자극제가 됐고, 지난 4월 17일자로 1군에 올라온 이후부터 줄곧 내야진의 한 축을 담당해왔다. 약 보름 정도 경기에 나서지 못한 점을 감안하더라도 타순을 가리지 않고 꾸준한 활약을 펼쳤다. 유틸리티 플레이어답게 다양한 포지션 소화도 가능하고, 수비도 지난해보다 한결 나아졌다.

허경민은 2013년 4월 말 NC와 3연전을 치르기 위해 원정을 찾았을 당시 한 팬으로부터 어느 포지션이 가장 소화하기 어렵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주저 없이 '3루수'라고 답했다. 어깨에 대한 부담감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 2012년과 2013년에는 3루와 유격수보단 2루수로 출전하는 경기가 많았다.

그러나 부담을 이겨낸 허경민은 올 시즌 대부분의 경기를 3루수에서 소화했다. 부담감이 있는 선수가 맞나 싶을 정도로 호수비도 몇 차례 보여줬다. 중심 타선의 무게가 떨어지자 1번 타자 민병헌이 3번으로 배치됐는데, 7번과 8번을 오가던 허경민이 그 기회를 잡았고 최근엔 아예 붙박이 1번 타자로 자신의 입지를 굳혔다.

규정 타석을 채우기 위해선 앞으로 106 타석을 더 나서야 한다. 25경기가 남은 시점에서 경기당 4~5타석을 나서야만 규정 타석을 채울 수 있을 것으로 보이므로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도전이 될 듯하다. 그럼에도 '시즌 타율 3할1푼5리' 지금의 활약에 만족하지 못하는 허경민이라면,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 지도 모른다.

강한 임팩트, 좌타 거포 가뭄 해갈한 오재일

92경기에 나선 허경민보다 48경기가 적은, 다시 말해 규정 타석 진입은 이미 물 건너간 오재일에게도 후반기 만큼은 분명 기회의 장이 되고 있다. 후반기에만 홈런 9개를 몰아치는 괴력을 발휘해 시즌 10홈런을 달성, 한 시즌 두 자릿 수 홈런을 기록했다. 프로 데뷔 이후 올해가 처음이다.

전반기엔 오재일의 존재 가치가 두드러지지 않았다. 19경기 52타수 13안타(1홈런) 타율 .250, 정말 평범했다. 그러나 후반기에 접어 들며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나타났다. 4일 NC 전까지 25경기 69타수 22안타(9홈런) 타율 .319, 믿을 수 없는 수치다. 두 달도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아홉 개의 홈런을 쳤다는 건 굉장한 일이다.

그것도 홈구장을 잠실로 사용하면서 가파른 상승세를 탔다. 주춤하던 김재환을 제치고 하위 타선의 중심이 된 지 오래다. 수비 또한 흠 잡을 데가 마땅히 없다. 의외의 민첩성은 종종 즐거움도 선사해준다. 최고조에 다다른 오재일은 후반기뿐만 아니라 가을 야구에서도 두산의 히든카드가 될 전망이다.

지난 2013년 한국시리즈 2차전 리그 최고의 마무리로 군림한 오승환(한신 타이거즈, 당시 삼성)을 상대로 역전 솔로포를 쏘아올려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선수 생활을 오랫동안 했던 오재일이 가장 큰 관심을 받았던 날이다. 이 때의 기억을 갖고 있는 팬들은 다시 한 번 큰 경기에서 오재일의 활약에 기대를 걸고 있다.

선발과 백업 멤버를 통틀어 출장 경기 수는 비교적 적은데, 임팩트만 따지면 가장 강력했다. 야구에선 한방 만큼 분위기를 가져올 수 있는 무기는 없다. 공포의 하위 타선을 만들었고, 선구안까지 가다듬으며 화끈한 무력시위를 이어나가는 오재일의 진화는 현재진행형이다.

미생, 아직은 완생이 되지 못한 두 명의 야수. 그래서 올 시즌 야구가 끝나는 마지막 날까지도 그들의 행보에 관심이 모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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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네이버 블로그 유준상의 뚝심마니Baseball(blog.naver.com/dbwnstkd16)에 동시게재되었습니다.
프로야구 KBO리그 두산베어스 허경민 오재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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