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여보! 아주 우스운 질문일지 모르지만 한번 생각해 봄직한 질문이 있소. 하나님은 크리스천일까요? 예수는 크리스천일까요? 정답은 '아니다'라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교회는 하나님도 예수도 크리스천이라는 도그마(dogma, 독단적 교조주의, 맹목적 신봉의 주체로 고정화된 명제)에 빠져 있다오.

물론 그렇게 주장한다는 말은 아니오. 그걸 당연시한다는 말이오. 그러다 보니 성서 구절을 인용해가며 하나님을 교회에 가두고 예수를 교리에 가두는 우를 범하는 거지요. 1984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대주교 데스몬드 투투(Desmond Tutu) 신부는 이렇게 말했다오.

"하나님은 확실히 크리스천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당신의 모든 자녀에게 똑같이 마음 쓰신다. 크리스천이 하나님을 독점할 수 없다는 사실은 너무 당연해 진부하게 들릴 정도다."

예수를 교회에 가두지 마라

 책 <불량 크리스천> 표지
 책 <불량 크리스천> 표지
ⓒ 포이에마

관련사진보기

여보! 요즘 성소수자 문제 등 사회적 이슈가 등장할 때마다 거리로 뛰쳐나와 자신의 교조적 주장을 되풀이하는 크리스천들을 보며, 크리스천이 되었다는 게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 보게 되오. 의견이 다를 수 있음은 차치하고, 그들의 주장에 과연 사랑이 있는가 묻게 되오. 생각과 사상, 행동양식이 다르다는 이유를 들어 범법자 취급을 하고 동물을 보듯 하는 그들의 오만한 심판자의 모습 말이오.

비판하지 말라는 성서의 가르침을 그들은 귓등으로 듣는 건지 모를 일이오. 이는 건전한 비판의식을 나쁜 것이라 말하는 게 아니오. 남을 판단하여 결론을 내리고, 정죄하는 행위는 하지 말라는 뜻이오. 내가 알기로는 적어도  성서는 정죄는 하나님의 권한이라고 가르친다고 생각하오.

여보! 스스로 불량 크리스천이라고 소개하는 영국의 성공회 신부 데이브 톰린슨의 <불량 크리스천>(포이에마 펴냄)을 읽으며 도그마에 빠져 좀처럼 헤어날 줄 모르는 한국 교회에 대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오. 그는 "어떻게 하나님이 크리스천일 수 있겠는가? 하나님이 어떻게 그렇게 소름끼치게 작은 존재일 수 있겠는가?"라며 통탄해 마지않소.

"하나님은 무슬림일 수도, 유대인일 수도, 힌두교인일 수도, 불교도일 수도 없다. 하나님은 부족의 신이 아니라 온 세상의 창조주이시다. (중략) 이제까지 하나님이 크리스천이라고 생각해 왔다면, 하나님이 우리뿐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도 속해 있다는 개념이 충격적이고 혼란스럽고 무섭기까지 할 것이다. (중략) 신에 대한 이해에 관한 한 우리는 모두 눈먼 자들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시력을 훨씬 뛰어넘는 위대하신 분이시다."(본문 118~121쪽)

진정 크리스천(하나님의 자녀)이라면 차이를 인정하고 수용하는 태도를 넘어 끌어안고 어울려야 하는 것이지 않겠소. 전쟁을 부채질한다거나 성소수자들에 대한 손가락질과 정죄는 예수가 가장 싫어하는 것을 하는 짓이오. 모두가 미워했던 세리(예수 당시 세금을 무겁게 먹여 착복했던 세관원) 삭개오 마저도 끌어안은 분이 예수가 아니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의 모습은 정죄와 비난이 일상이 되지 않았나 생각이 들 정도요. 그러면서 성서를 들먹인다오. 일테면 동성애는 성서가 금하고 있다고 말하지요. 그럼 전쟁은 성서가 금하는 게 아닌가요. 전쟁을 말하기 전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가르침이 더 성서적이지 않을까요. 성서를 도그마의 도구로 전락시키는 크리스천의 사고가 얼마나 위험한 건지 이미 역사는 교훈을 주었다오.

성서를 편협한 정죄의 수단으로 사용하지 마라

여보!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발전시킨 연구를 했다가 로마 교황청에 의해 이단자로 낙인찍히고 말았소. 지금 생각해 보면 교황청의 근시안적 우주관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소. 교황청은 갈릴레오가 성서의 우주관과 다르다며 정죄했소. 그러나 지금 와 생각하면 갈릴레오가 맞고 교황청이 틀렸지 않소.

같은 맥락으로 지난 수세기 동안 수많은 기괴한 사건들 속에서 애꿎은 사람들이 기독교 도그마의 희생양이 되었다오. 한결같이 교회는 성서 구절을 끌어다 대며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고 죽였다오. 성서에 이런저런 구절이 있으니 죄인이고, 죄인이니 마땅히 죽어야 한다는 논리였소.

"신의 저주를 받은 인종이라며 1400년간 아프리카인들을 폄하하고 노예제도를 정당화하는 데도 성서를 이용했다. 유럽과 북아메리카에서 수만 명의 무고한 여성들을 신의 이름으로 학살하는 마녀사냥에 정당성을 부여한 것도 성서였다. 아파르트헤이트(남아프리카공화국의 극단적인 인종차별정책)와 반유대주의를 정당화하는 데도 성서 구절을 인용했다. 지금도 많은 지역에서 남성에 대한 여성의 복종을 강요하고, 동성애자를 탄압하고, 자연 환경을 착취하는 데 성서 구절을 악용하고 있다."(본문 167, 168쪽)

여보!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4세기 니사의 그레고리우스가 노예제도를 규탄한 증거도 성서였다오. 19세기 윌리엄 윌버포스와 존 뉴턴 같은 이들이 노예무역을 폐지하려고 싸운 근거도 성서였다오. 가난과 불의와 맞서 싸운 근거도 성서요, 소외된 이웃(어린아이, 눌린 이들, 고아 등)의 인권을 주장하는 데도 성서가 근거였다오. 남녀평등의 근거도 바로 성서였다오.

유명한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스승인 하워드 서먼의 책 <예수와 상속권을 박탈당한 자들, Jesus and the Disinherited>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오. 할머니가 글을 몰라서  성서를 읽어드렸는데, 할머니는 바울서신은 읽지 못하게 하셨다고 하오. 할머니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오.

"노예제도가 있을 때 주인집 목사가 가끔 노예들을 위한 예배를 드렸단다. 그때 백인 목사들은 늘 바울서신에서 설교를 했지. '종으로 있는 여러분, 두려움과 떨림과 성실한 마음으로 육신의 주인에게 순종하십시오. 그리스도께 하듯 해야 합니다' 이 구절을 읽은 다음에 행복한 노예가 되기 위해서는 주인에게 순종하고, 그러면 하나님이 어떤 축복을 내리실 지를 설교했단다. 그때 나는 창조주께 약속했어. 내가 글을 읽을 수 있게 되거나 자유인이 되었을 때 성서의 그 부분만은 절대로 읽지 않겠다고."(본문 166, 167쪽 요약)

여보! 백인 목사가 읽은 구절이 분명히 성서에 있는 구절이오. 그러나 노예들에게는 자신들을 옭아매는 데  성서를 인용한다고 느꼈고, 그건 상처가 되었다오. 백인 목사의 의도는 순종적인 노예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을 게요. 노예 할머니에게 백인 목사가 끌어다 읽은 성서는 차라리 고문이었던 게요.

교회가, 특히 한국의 대형교회로 대별되는 가진 자의 교회가 끌어다 쓰는 성서 구절들 때문에 상처받고 주눅 드는 이들이 있다면, 그들에게 성서는 아픈 채찍에 지나지 않을 것이요. 소망과 사랑을 외치는 메시지의 보고가 아니라 정죄와 고난의 쇠고랑일 뿐이지요.

저자가 성서를 읽는 기본자세로 '책장과 책장 사이를 하나님이 거닐고 계실 거라는 마음가짐'으로 읽으라는 충고가 가슴에 와 닿소. 예수께서 오셨을 때 유대인들이 '율법'이라며 들이대던 고문을, 지금 교회가, 특히 한국의 기득권 교회가 '성서'라며 들이대고 아프고 소외된 이들을 고문하고 있소.

여보! 하나님을 크리스천인양 자신들의 전유물로 삼고, 예수를 크리스천만을 위한 도그마의 수단으로 교회 안에 가두고, 성서를 쇠고랑이나 채찍으로 사용하는 한국의 기득권 교회의 목소리가 이리 드높은데, 만약, 만약 말이오. 지금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다면 어떤 반응을 보이실까요?

덧붙이는 글 | <불량 크리스천>(데이브 톰린슨 지음 / 이태훈 옮김 / 포이에마 펴냄 / 2015. 8 / 256쪽 / 1만1000 원)

※뒤안길은 뒤쪽으로 나 있는 오롯한 오솔길입니다. 책을 읽으며 떠오르는 생각의 오솔길을 걷고 싶습니다. 함께 걸어 보지 않으시겠어요. 이 글에서 말하는 ‘여보’는 내 아내만이 아닙니다. ‘너’요 ‘나’요 ‘우리’입니다.



불량 크리스천

데이브 톰린슨 지음, 이태훈 옮김, 포이에마(2015)


댓글1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취재후원

오늘도 행복이라 믿는 하루가 또 찾아왔습니다. 하루하루를 행복으로 엮으며 짓는 삶을 그분과 함께 꿈꿉니다.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