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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 16일 시인 겸 소설가 이응준은 소설가 신경숙의 <전설>이 일본 극우 작가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을 표절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이응준의 문제제기 다음 날인 6월 17일 신경숙은 '전속' 출판사 격인 창비 측에 이메일을 보내 "(<전설>이 표절한 것으로 알려진 작품 <우국>의 작가 미시마 유키오는-기자 주) 오래전 <금각사> 외엔 읽어본 적 없는 작가로 해당 작품(<우국>)은 알지 못한다"라고 말했다.

표절 의혹의 대상이 된 <전설>과 <우국>의 해당 대목은 한 문단 정도였다. 문장 길이나 단어의 차이가 없지 않지만 전체적인 분위기나 의미가 매우 흡사했다.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볼 때 '베끼기' 의심을 가질 가능성이 높았다. 신경숙의 '해명'은 '거짓'이었을까. 다우어 드라이스마 네덜란드 흐로닝언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의 <망각>에 기대면 신경숙의 '해명'은 '진실'처럼 보이기도 한다.

1969년, 전 비틀스 멤버 조지 해리슨(George Harrison)은 전세계적인 히트곡 <My sweet Lord>를 썼다. 얼마 뒤 해리슨은 1963년에 <He's so fine>이라는 히트곡을 낸 여성그룹 치폰스(Chiffons)로부터 고소를 당했다. 표절 혐의였다. 멜로디가 거의 비슷했다고 한다.

해리슨은 치폰스의 노래를 알고 있다고 시인했으나 베낀 것은 아니라며 이의를 제기했다. 판사는 해리슨이 자신의 무의식적 기억 속에 있는 것을 의도치 않게 복사한 것 같다는 내용으로 판결했다. 의도 여부와 무관하게 복사는 복사였다. 해리슨은 이익금 중 50만 달러를 배상했다.

무의식적 표절이 잠복의식의 결과?

이 책이 전하는 조지 해리슨의 사례는 잠복기억에 관한 것이다. 잠복기억은 '잊어버린 기억'을 가리킨다. 1934년에 출간한 미국 심리학 사전에서는 "원래의 경험이 무의식적 동기의 영향으로 망각되고, 그러다가 기억이 가진 특징 없이 외양상 새로운 창조처럼 등장하는 기억 상태"(153쪽)라고 정의했다.

신경숙은 첫 번째 해명을 한 뒤 1주일쯤 지난 6월 23일 <경향신문>과 단독으로 인터뷰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우국>을 읽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제는 나도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라고 말했다.

처음 발언과 비교할 때 미묘한 변화가 감지되었다. "<우국>을 알지 못한다"에서 "읽은 기억은 나지 않는다"로 바뀌었다. "알지 못한다"는 읽기를 원천 차단하는 언설이다. "읽은 기억은 나지 않는다"는 읽었을 수 있음을 함축한다. "나도 내 기억을 믿을 수 없는 상황이 됐다"가 유력한 근거다.

<우국>을 읽으면서 기억 아래 '잠복'해 들어가 있던 문제의 대목이 <전설> 창작 과정에서 '무의식적으로' 떠올랐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저자는 이 책에서 무의식적 표절이 잠복의식의 결과일 수 있다고 주장했다. '잊어버린 기억'의 결과물일 수 있다는 것. 그렇다면 신경숙의 '표절'은 '무죄'인가.

잠복기억이나 무의식적 표절론에 따른다면 신경숙은 윤리 문제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다. 그가 <우국>을 읽은 사실을 드러내지 않으려 하고, 자신의 기억 자체를 믿을 수 없다고 도리질을 치며 안타까워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을까.

이 책에는 영국의 낭만주의 시인 새뮤얼 콜리지(Samuel T. Cloeridge)가 보고한 매우 흥미로운 사례가 실려 있다. 코울리지의 하녀는 열병을 앓는 도중 몇 시간 동안 그리스어와 히브리어를 사용했다. 그녀는 교육을 전혀 받지 않았다. 다만 어린 시절 어느 목사 집에서 일을 했는데, 그때 목사는 큰 소리로 책을 읽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나는 하녀가 목사의 말을 '그대로', 이를테면 '표절'했으리라고 보지 않는다. 그녀는 목사로부터 단편적으로 주워들은 이런저런 단어나 문장들을 읊조렸을 것이다. 저자도 하녀의 경우에서와 같은 잠복기억은 표절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고 말했다.

'신경숙 사태'를 이해하기 위해 선택한 책

신경숙의 경우도 그랬을까. <전설>과 <우국>의 문제의 대목을 비교해 보면 단순한 유사성 차원을 뛰어넘는 일체감이 느껴진다. 그런 점에서 잠복기억과 무의식적 표절론에 기대고 있는 듯한 신경숙과 창비의 태도는 한국문단 내에서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책임 있는 주체들로서 윤리적이지 않아 보인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베껴 쓴 것은 분명한 '사실'이 아닐까. 읽은 사실을 처음부터 인정하고 베껴 쓴 사실에 대하여 진심으로 사과하는 게 옳다. 신경숙과 창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신경숙은 표절 논란이 촉발된 직후 첫 번째 발언에서 <우국>을 읽은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6월 17일 창비에 보낸 이메일). 두 번째 발언에서 읽었을 가능성을 함축했으나 여전히 확실한 '진실 고백'은 하지 않았다(6월 23일 <경향신문> 인터뷰).

'전속 출판사'의 최대 소유주는 유사성을 인정하면서도 표절은 부인했다. 창비 편집인인 백낙청 전 서울대 명예교수는 최근 신경숙 표절 논란 사태와 관련하여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문제 된 대목이 표절혐의를 받을 만한 유사성을 지닌다는 점을 확인하면서도 이것이 의도적인 베껴쓰기, 곧 작가의 파렴치한 범죄행위로 단정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이라고 밝혔다.

드라이스마 교수의 <망각>은 순전히 '신경숙 사태'를 이해해보기 위해 선택한 책이었다. 잠복기억이 '무의식적 표절'을 뒷받침하는 이론적 근거가 될 수 있겠다는 것을 알았다. 꿈과 기억과 망각의 관계, 기억 장애와 기억 상실에 관한 흥미진진한 연구 사례와 역사를 통해 기억 못지 않은 망각의 중요성과 의의를 알게 되었다.

이 책의 핵심은 망각에 관한 생각을 하면서 우리가 기억 가운데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두려워하는지가 드러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데 있다. 기억은 우리를 불안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자신의 형상을 지속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바로 그것이다. 여기엔 많은 게 필요하지도 않다. 우리가 어떤 사람에 관해 무슨 얘기를 들으면 이 새로운 지식은 그 사람에 대한 기억을 다른 빛으로 비춘다. 또는 어떤 형태로든 한동안 속았다는 게 분명해진다. 그 이후 우리는 하나의 기억이 이와 같은 과거의 새로운 버전에 어떻게 이어지는지 지켜볼 수밖에 없다. 이와 반대로 우리는 좋아하는 기억을 기꺼이 보호하려 한다. 가능한 한 '오로기 읽기용'이라는 안전한 코드로 간직하려 애쓴다. 하지만 삶은 이미 존재하는 기억을 바꾸는 어떤 다른 기억을 첨부하기도 한다. (18쪽)

결론이다. 드라이스마 교수는 "우리의 기억은 말을 듣지 않는 어린아이와 같다"라고 말했다. 기억하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다는 취지라고 한다. 이런 '심리학적인' 전제를 100퍼센트 인정한다면 신경숙의 표절 의혹은 '근거 없음'에 가까울 것 같다.

그럼에도 신경숙의 '해명'은 여전히 석연치 않다. 읽은 '기억'을 '망각'했더라도 읽었다는 '사실' 자체에는 변함이 없을 것 같은데, 그는 이를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다. 조지 해리슨은 법정에서 '무의식적 복사' 판정을 받았는데도 배상했다. 나중에는 <He's so fine>의 저작권까지 구입해 표절 논란에 종지부를 찍으려 했다고 한다.

현실은 심리학의 '미묘한' 세계와 다르다. '밀리언셀러' 작가의 표절 의혹이라는 판도라의 상자가 열렸다. 추락한 한국문학의 사멸이냐 재도약이냐가 신경숙과 창비로 대변되는 문단 내 '문학권력'의 쇄신 의지에 달려 있다. 신경숙과 창비가 '무의식적인 베껴쓰기' 유의 심리학적인 논거를 통해 물타기하는 식의 태도를 취한다면 그나마 남아 있는 문학 독자들마저 냉정하게 눈길을 거둘 것이다. 위기를 기회로 여기는 지혜를 발휘하기를 바란다.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망각: 우리의 기억은 왜 끊임없이 변하고 사라질까>(다우어 드라이스마 지음, 이미옥 옮김 / 에코리브르 / 2015.8.10. / 388쪽 / 1,7500원)



망각 - 우리의 기억은 왜 끊임없이 변하고 또 사라질까

다우어 드라이스마 지음, 이미옥 옮김, 에코리브르(2015)


태그:#망각, #기억, #신경숙 표절 논란,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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