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리 슈틸리케 감독은 축구대표팀 역사상 보기 드문 운장(運將)이다. 슈틸리케 감독이 대표팀을 맡은 이후 신기할 정도로 그가 기용하는 선수마다 맹활약을 펼치고, 경기도 술술 잘 풀린다.

지난해 브라질월드컵 이후 최악의 상황에서 한국 대표팀을 맡아 짧은 시간에 부상병동의 어려움을 딛고 호주 아시안컵 준우승이라는 성과를 일궈냈고, 지난 동아시안컵에서는 국내파 선수들만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2018 러시아월드컵 2차 예선에서도 2연승을 달리며 순항하고 있다.

부임 직후 슈틸리케 감독의 성적은 무려 13승 3무 3패다. 이런 놀라운 성적을 바탕으로 한국대표팀을 맡은 지 약 1년 만에 국내에서는 거의 과거 히딩크급의 인기와 지지를 누리고 있다. 외국인 사령탑에 엄격하고 배타적인 국내 정서를 고려하면 더욱 이례적이다. 그야말로 슈틸리케 감독에게 천운이 따르고 있다고 봐도 좋을 정도다.

실력에 운도 겸비한 슈틸리케 감독, 변화 성공적

작전 지시하는 슈틸리케 한국 축구대표팀 슈틸리케 감독이 3일 오후 경기도 화성종합경기타운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지역 2차 예선 라오스와의 경기에서 선수들에게 작전을 지시하고 있다.

▲ 작전 지시하는 슈틸리케 한국 축구대표팀 슈틸리케 감독이 3일 오후 경기도 화성종합경기타운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지역 2차 예선 라오스와의 경기에서 선수들에게 작전을 지시하고 있다. ⓒ 유성호


물론 운장이라고 해서 실력도 없는데 운만으로 성과를 이룰 수는 없다. 슈틸리케 감독은 부임과 동시에 한국축구에 대한 성실하고 진정성 있는 접근으로 호평을 받았다. 역대 대표팀 감독들의 시행착오를 거울삼아 장점은 취하고 단점은 극복했다.

슈틸리케 감독은 국내파 감독들처럼 선수의 이름값이나 유럽파에 대한 환상에 휘둘리지 않았고, 다른 외국인 감독들처럼 소통에 소홀하거나 우월의식을 드러내지도 않았다. 오히려 한국 지도자들보다 더 열성적으로 전국 곳곳을 누비며 한국축구의 문제점과 숨은 유망주들을 찾아내는 데 주력했다. 외국인 감독답게 고정관념에 얽매이지 않고 과감한 실험과 변화를 시도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

슈틸리케 감독은 한국대표팀을 맡아 러시아월드컵까지 장기 프로젝트를 통하여 한국축구의 전략적 목표와 전술적인 목표를 설정하여 착실하게 팀을 만들어가고 있다. 호주 아시안컵의 목표가 침체한 대표팀의 재건, 3월 평가전에서 동아시안컵까지 새로운 대표팀의 뼈대를 만들고 세대교체를 준비하는 데 치중했다.

러시아월드컵 2차 예선에서 슈틸리케호의 전술적 화두는 포지션 경쟁체제의 도입과 밀집수비 공략법에 있었다. 슈틸리케호는 라오스전에서 지난 미얀마와의 1차전이나 동아시안컵과는 또 다른 진화를 보여줬다. 동아시안컵에서 맹활약한 국내파 선수들이 돌아온 유럽파와 조화를 이뤘다. 덕분에 라오스전에서 슈틸리케호는 예상을 뛰어넘는 8-0의 쾌승을 거두며 또 하나의 임무를 완수했다. 이는 슈틸리케호의 출범 이후 한 경기 최다 득점-최다 점수 차 완승이기도 했다.

약체팀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 결과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슈틸리케호가 내용적인 완성도 면에서 120% 의도했던 목적을 달성했다는 점이다. 손흥민-이청용-석현준-기성용 등 유럽파가 가세하면서 동아시안컵까지 대표팀의 고질적인 약점이었던 골 결정력이 크게 개선됐다. 8골 중 5골이 유럽파 선수들이 터뜨린 득점이었다.

최전방에 이정협의 공백을 메운 석현준은 선발 출전하여 A매치 데뷔골을 터뜨리며 5년 만의 복귀전을 성공적으로 장식했다. 최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토트넘으로 이적한 손흥민은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슈틸리케호 최다득점자(7골)의 아성을 견고히 지켰다.

하지만 유럽파 못지않게 국내파 선수들의 활약도 빛났다. 라오스전에서 유럽파 김진수를 제치고 왼쪽 주전 풀백 자리를 꿰찬 홍철은 도움 3개를 기록하며 종횡무진 측면을 지배했다. 멀티 골을 작렬한 권창훈, 수비형 미드필더로 후방에서 경기를 조율한 정우영의 활약도 인상적이었다.

유럽파와 국내파의 조화, 전술 변화까지 해냈다

기성용, '손흥민 해트트릭 축하해' 한국 축구대표팀 손흥민이 3일 오후 경기도 화성종합경기타운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지역 2차 예선 라오스와의 경기에서 후반 88분 팀의 일곱번째 골이며 자신의 세번째 골을 성공시킨 뒤 기성용으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다.

▲ 기성용, '손흥민 해트트릭 축하해' 한국 축구대표팀 손흥민이 3일 오후 경기도 화성종합경기타운에서 열린 2018 러시아 월드컵 아시아 지역 2차 예선 라오스와의 경기에서 후반 88분 팀의 일곱번째 골이며 자신의 세번째 골을 성공시킨 뒤 기성용으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다. ⓒ 유성호


슈틸리케 감독은 국내파 선수들이 유럽파의 빈자리를 메우는 대체선수나 후보가 아니라 함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대등한 파트너가 되기를 원하는 듯하다. 홍철-권창훈-이재성-정우영 등은 장기적으로 유럽파 선수들과도 포지션 경쟁을 펼칠 수 있을 만한 능력을 꾸준히 증명하고 있다.

폭넓은 포지션 유연성을 점검해본 것도 라오스전의 진정한 성과다. 슈틸리케호는 출범 이후 주로 4-2-3-1전술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하지만 슈틸리케 감독은 이날 전방에 2선 공격형 미드필더를 4명을 배치하며 4-1-4-1에 가까운 전술을 들고 나왔다. 여기에는 이적문제로 중도 복귀한 구자철의 공백과 기성용의 전진배치가 가장 핵심적인 변화였다.

그동안 기성용은 뛰어난 공격력에도 불구하고 대표팀에서는 전술적인 사정상 수비형 미드필더로만 기용됐다. 하지만 정우영이라는 대체자가 등장하면서 기성용을 좀 더 다양한 포지션에서 활용할 수 있게 됐다.

정우영은 기성용의 약점이던 대인방어를 메워줄 수 있을 뿐 아니라 패스와 경기조율 능력도 어느 정도 겸비하여 후방 플레이메이커의 역할도 소화할 수 있다. 권창훈은 세련된 발재간과 세트피스에서의 킥 능력을 겸비하여 구자철과 기성용의 부담을 덜어줄 수 있는 자원이다.

슈틸리케호의 대표적인 멀티플레이어 장현수는 라오스전에서 오른쪽 풀백으로 나서 눈길을 끌었다. 장현수는 그동안 대표팀에서 중앙수비수와 수비형 미드필더를 오갔지만, 풀백 기용은 처음이었다.

자원이 넘치는 대표팀의 왼쪽과 달리, 오른쪽은 차두리의 은퇴 이후 확실한 대체자를 구하지 못한 상황이었다. 민첩하거나 속도가 빠르지는 않지만, 장신에 위치선정 능력이 빼어나고 패스와 공격 연계 능력을 갖춘 장현수가 오른쪽에서 활약해준다면 대표팀은 수비운용의 폭이 넓어진다.

순항 중인 슈틸리케호... 두 마리 토끼 잡았다

현대축구에서 좌우 풀백의 공격력은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하지만 한국축구는 한동안 공수비를 겸비한 풀백을 찾기 힘들었다. 풀백들의 크로스나 공간침투능력의 부재는 대표팀의 공격 루트를 단조롭게 하고 정확성을 떨어뜨리는 원인이 됐다.

그러나 이날은 홍철과 장현수가 무려 5개의 도움을 합작하며 측면 공격으로 밀집수비를 무너뜨리는 정석을 보여줬다. 물론 상대가 기술과 힘에서 모두 크게 뒤진 약체팀이라 100% 평가는 무리지만 침체된 한국의 측면 수비진에 모처럼 희망을 보여준 경기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처럼 슈틸리케 감독은 약체팀과의 경기에서도 시간과 내용을 허투루 쓰지 않고 다양한 전술적 실험을 병행하며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는 데 성공했다.

결과가 일방적이라고 과정도 쉬운 것은 결코 아니다. 슈틸리케호의 순항은 그만큼 지금의 대표팀이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훌륭한 증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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