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은 수업'은 미국 최초로 경구 피임약 노개스티메이트를 발견·개발한 재미과학자 한도원(84) 박사의 일대기입니다. 그의 삶은 험난한 시대를 살아온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의 삶이면서 귀중한 현대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북녘에서 보낸 소년기, 혈혈단신 탈출해 남녘에서 보낸 청년기 그리고 1955년 '8달러'로 시작한 미국 유학 생활 등에서 삶의 고비들을 극적으로 통과해온 그의 일생은 한 편의 잘 꾸며진 드라마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 박사는 2002년 은퇴해 미국 플로리다 주 올랜도에 살고 있습니다. 그가 제공한 자료들과 구술을 토대로 기자가 스토리를 재구성합니다. 이 기사는 1인칭으로 서술됩니다. - 기자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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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산 피난민 시절의 전시학교. 학생들이 폐차 안에서 수업을 듣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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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신만고 끝에 고등학교 졸업장을 손에 쥐었으나 일자리를 잡기란 하늘의 별 따기였다. 더욱 큰 문제는 전시 상황이라서 언제 군대에 붙잡혀 갈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동안에도 몇 차례나 붙잡혀 트럭에 실려 가다가 탈출한 적이 있었다. 비록 탈북해 오기는 했지만 남한에서 군대에 간다는 것은 북한의 친구들과 동생들에게 총부리를 겨누게 되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군대에 가지 않는 유일한 길은 대학에 가는 것밖에 없었다. 더구나 고향 마을의 부모와 형제를 떠나 온 것도 학업을 위한 것이었으니 일단 대학에 가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친하게 지내던 친구들도 하나둘씩 대학에 간다며 바삐 움직였다. 나는 서울의 연희전문(현재의 연세대학교) 경제과에 지원하기로 마음먹고 응시원서를 제출했다. 너도나도 대학을 가는 분위기여서 젊은 청년들이 대거 몰려들었지만, 다행히 1차 필기시험을 통과했다.
그런데, 2차 구두시험이 문제였다. 면접하기 위해 마주 앉은 교수는 응시원서에 적힌 나의 북한 주소 등 인적사항을 보고는 "가족의 도움도 없이 어떻게 대학을 다닐 것인가"며 우려스런 투로 내게 물었다. 나는 "이제까지 고학으로 학교에 다녔으니 대학도 그렇게 다닐 것"이라고 답했다. 그는 "대학은 고등학교와 입학금이 크게 다르다"며 난색을 보였다.
결국 구두시험에서 낙방하고만 나는 크게 낙심했다. 당시 사립대학이란 돈 많은 부유층 자제들이나 다니던 터였고, 나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기에 당장에는 체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명문대 합격하고도 입학 거절당해
이제 가야 할 길은 명백해졌다. 어떻게든 돈을 모아서 대학 등록금을 대는 길밖에 없었다. 아버지 친구들과 고향 선후배를 찾아 다니며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으나 전쟁통에 할 수 있는 일이란 어디에도 없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미군 식당 감독관과 경비장교직을 갖고 있었으나, 스스로 뛰쳐나온 마당에 내 자리를 비워두고 기다릴 리는 만무했다. 길거리를 배회하며 한끼 한끼 먹을 것을 걱정하는 사람들로 넘쳐 있었고, 나도 그 대열에 끼어 당장 한끼와 잠자리를 걱정해야만 처지가 된 것이다.
어느날 길거리에서 나와 처지가 비슷한 북한이 고향인 고교 동창을 만났다. 나는 어떻게 하면 일자리를 구하고 입에 풀칠을 하고 잠자리를 마련할 것인가를 놓고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으나 뾰쪽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우선은 그가 일하는 출판사에 밤늦게 도둑고양이처럼 찾아가 사무실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덮고 잠을 잤다. 추운 날에는 밤새도록 덜덜 떨며 지내기가 일쑤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허기진 배에 온 몸이 결리고 머리가 멍해져서 어질어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물배를 채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종종 친구와 나는 허기진 배를 채우기 위해 무조건 다방에 들어가 앉아 밀크 커피와 토스트 등을 시켜 먹고는 몸을 녹였다. 그러나 가진 돈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때마다 친구는 나를 인질삼아 다방에 앉혀 놓고는 온 부산 바닥을 쏘다니며 겨우 돈을 마련하여 되돌아 오곤 했다. 어떤 때는 그와 반대로 내가 그 일을 했다. 전쟁은 멀쩡한 사람을 미치게도 만들고 몸을 팔게도 만든다는 것을 경험하고는 있었으나, 이러다가는 나도 지레 무슨 일을 벌일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조상님의 은덕인지 하늘님의 도움인지 '구원자'가 나타났다.
어느날 부산 길거리를 배회하다가 서울의 경복고등학교 시절 나를 친자식처럼 도왔던 서갑록 선생님의 처남을 우연히 마주쳤다. 그는 나의 몰골을 보더니 깜짝 놀라며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며칠 후에 자기를 찾아오면 무슨 방도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유엔한국재건단(UNKRA)에 일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나를 매우 좋게 여기고 있었다. 전쟁통에 병으로 사망하기 전까지 나는 그의 매형인 서갑록 선생을 매일 찾아가 간호했고, 집안 심부름까지 마다하지 않고 거들었었다. 그 당시 나는 그를 자주 보게 되었고, 여러 번 감사하는 마음을 표시했었다.
일주일쯤 지난 어느날, 유엔한국재건단으로 그를 찾아갔더니 뜻밖에도 행운의 일자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재건단 건물 안의 우체국에서 우편물 작업을 하는 일이었다. 고교시절 은사 서갑록 선생님의 처남이 나에 대해 잘 소개해 둔 덕분이었다. 내가 하는 일이란 우편물을 분류하거나 다른 지역 우체국으로 꾸러미채 배달하는 일이었다. 종종 샌프란시스코에서 도착하는 외교 우편물을 주미 영사관에 배달하는 일도 내 몫이었다. 이른바 '외교행랑'을 취급하는 일이었다.
그 일을 하면서 영사관의 한국인 직원들과 얼굴을 익히며 지내던 어느날이었다. 오다가다 마주치며 수인사를 나눈 적이 있던 영사관 직원이 "한도원씨, 미국으로 공부하러 가지 그래?"라고 했다. 당시엔 그저 웃음으로 지나치기는 했으나 시간이 지나면서 막연하게나마 "미국유학? 그렇지 이게 바로 내 살 길인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 같은 자극은 또 있었다. 어느날 재건단 직원들과 함께 부산 시내 중국식당으로 식사를 하러 갔다. 막 식사를 하던 중 맞은편에 앉아 있던 기술직 미국인 직원이 생각난 듯 던진 말 한마디가 나로 하여금 신기루 같은 꿈을 꾸게 했다.
"미스터 한, 미국에 가면 공부할 기회가 열릴 텐데 도전해보지 그래?" "탈북한 처지에 돈도 없는데 미국에서 어떻게 공부를 하나?" "무슨 소리? 미국에선 가난한 소년들도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고, 네가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는 대학이 널려 있다고!""뭐라고? 대학을 마음만 먹으면 갈 수 있다고?
"이런 제길할! 큰 대학보다는 작은 대학들은 학비도 싸고 장학금으로 재정지원을 할 대학들도 있는데!"나는 어이없어 하는 그의 태도에서, 유학이 그리 꿈 같은 일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가까운 곳에 미국정부가 운영하는 USIS 도서관이 있다며 그 곳에 가면 미국의 대학들에 대한 정보를 더욱 상세하게 알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날로 나는 USIS 도서관에 찾아가서 미국 대학들을 일목요연하고 상세하게 소개한 카탈로그를 들쳐보았다. 나는 갈 만한 50개 대학 목록을 뽑았다. 실제 이런 저런 대학의 정보를 접하다 보니 가슴이 뛰었고, 이미 비행기를 타고 미국의 대학에 간 것만 같았다.
'삼팔 따라지' 탈북 소년, 감히 유학을 꿈꾸다
사실은 몇 개월 전에 일자리 없이 부산 바닥을 떠돌아다니다 하게 된 경험도 미국유학에 대한 꿈을 꾸게 했다. 정월 명절 때 나는 북한이 고향이던 고등학교 동창 친구를 만났다. 우리는 '삼팔 따라지'의 우울함을 달래기 위해 입에 대지도 않던 술을 몽땅 마시고 뻗어 버렸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보니 온통 토한 냄새가 진동했고, 속은 쓰릴 대로 쓰렸다. 우리는 속을 달래기 위해 마침 생각난 친구 집을 방문하여 떡국을 얻어 먹고 버스를 탔는데, 배탈이 심해져서 중간에 내리고 말았다. 친구는 자기가 잘 알고 지낸다는 친구 집에 가자고 했다. 가서 보니 그 친구는 경복고 동기동창으로 나와는 그저 일면식이 있던 처지였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유명한 서울대 철학교수 한아무개 박사였다. 마침 그는 방에서 열심히 타이프를 치고 있다가 우리를 맞이했는데, 그가 타이프를 치는 모습이 너무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더 부러웠던 것은, 그가 유학을 준비하기 위해 응시원서를 작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타이프를 치다 말고 그는 갑자기 툭 던지듯 "너도 미국 유학갈 생각이나 해보지 그래?"라고 말했다. 그 친구 말에"나는 한국의 대학에 갈 처지도 못 되는데 유학은 무슨…"이라고 얼버무렸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친구의 타이프 치던 모습과 "유학이나 가지 그래?"라는 말이 귀속에 맴돌아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기왕에 여기까지 와서 빈털털이로 일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살아남았으니 미국에 갈 길을 개척해 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문득 들었다. 산넘고 물건너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긴 마당에 꾸지 못할 꿈이 있겠나 싶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미국에까지 가서 공부를 하고 있는 사실을 북한의 부모님이 알면 얼마나 대견해 하실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던 차에 외교행랑을 나르는 일로 미국 영사관에 들락거리다 '유학' 권유를 받게 되었고, 재건단 직원들과 식사를 하러 갔다가 다시 유학 권유를 받게 되었으니, '유학'이 운명처럼 느껴지까지 했다. 유학에 대한 마음을 다지게 되면서부터는 영사관 직원들이 달리 보이게 되었고, 이들로부터 미국 유학과 미국생활에 대한 이런 저런 정보를 얻게 되었다. 그런데 미국 대학에 응시원서를 보내는 비용을 마련하는 것도 만만치가 않아 걱정이 되었다. 일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내게는 여윳돈이라고는 없었다.
그러던 중에 아버지가 장관인 고교 동창을 우연히 길거리에서 마주치게 되어 내가 유학을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 그는 반색하며 자기에게도 유학 정보를 알려달라고 했다. 나는 그에게 50개 대학의 정보를 보여주었고, 우리는 각각 25개 대학에 응시하기로 했다. 고맙게도 친구는 내가 지원할 25개 대학에 보낼 응시원서의 스탬프 값을 지원해 주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응시원서를 보내달라는 서신을 25개 대학에 보냈고, 신기하게도 얼마 되지 않아 학교생활, 재정지원 등을 포함한 응시원서 꾸러미를 받게 되었다. 각 대학들이 보낸 서신들은 한결같이 희망 섞인 내용들이었다. 특히 각종 재정지원의 기회가 응시자들에게 열려있다는 내용은 나의 마음을 한껏 부풀게 했다.
그러나 나의 부푼 희망과는 달리 1950년대 전쟁 당시 우리나라의 상황은 뿌리도 없고 가진 돈도 없는 처지의 나같은 청년에게 쉽게 유학의 길을 열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응시를 하기 위해 갖추어야 할 합법적이고 기본적인 자격들에서 이미 나는 배제되어 있었다. 실력을 인정받고도 한국의 대학입학을 거절당할 때 이상으로 미국 유학은 언감생심 꿈을 꾸어서는 안 된다는 메시지만 직간접으로 받게 되었다. 갑자기 나의 미국유학은 손에 잡힐 듯 금방 눈앞에 나타났다가 가물가물 사라져 가는 신기루에 불과한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