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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화에서 이어집니다)

김 실장이 카페에 나타난 것은 거의 오후 10시가 넘어서다.

"일본에 다녀올 생각 있나?"

난데없다. 좋은 기회란다. 도쿄에 가서 그냥 살면 된단다. 그리고는 그곳의 삶, 주변 사람들의 삶에 대해 글을 써달라는 얘기다. 체재비와 활동비는 물론 일정하게 월급도 지급된다. A그룹의 주력인 가전과 유통부문이 일본에 본격적인 입성을 앞두고 벌이는 프로젝트의 일환이란다.

마케팅 파트에서 계량적이고 조직적인 조사를 담당하는데, 그에 대한 보완책으로 그곳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에 대해, 이를테면 '정성(定性) 평가' 차원에서다. 1인 가구 비율이 전체의 40%에 가까운 일본에서 K가 적격이라는 것이다. 가능하면 동호회나 동아리 같은 모임을 조직해서 여러 사람들의 성향, 생활양식, 선호도 등을 알아달라는 주문도 잊지 않는다.

한 가지 더 부탁한 것은 일본 언론에 대한 내용분석이다. 특히 가전제품, 유통과 관련, 소비자들의 성향이나 트렌드를 보여주는 기사나 TV프로그램을 추적해서 간단한 평가와 함께 보고해 줬으면 하는 것이다.

K에게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은근히 많은 일을 떠맡긴데 대해 그냥 지나가지 않는다.

"일이 장난이 아니겠네. 세상에 공짜는 없지. 돈을 받으니 당연한 거고. 근데 누가 그랬더라. 오스카 와일드인가 하는 작가가 말하기를 은행가들이 모이면 예술을 논하고, 예술가들이 모이면 돈을 논한다고 했어. 어쨌든 일본에 가 있는 한동안은 구차하게 돈 얘기 안 꺼내도 되겠네."
"가서 쓰고 싶은 글 열심히 써."

김 실장은 K가 언론사에서 나온 이후 이 카페를 매개로 가끔 만나면서 자기만의 글을 쓰겠다는 그에게 작은 도움이라도 주려고 애쓴다. 김 실장 호의에 대해 K는 주억거렸다. 무엇보다 미키를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기도 하다. 둘은 언제나 그런 것처럼 말없이 술을 마시다가 생각나면 얘기를 하다가 다시 술잔을 기울인다. K는 아까 하얀 아까시 꽃향기는 틀림없이 미키가 보내온 전령이라고 즐거운 몽상을 한다.

오래된 여권을 갱신한 다음 동기를 만나기 위해 신문사로 향한다. K는 퇴사한지 오래다. 그래도 영향력이 별로 없는 그 신문은 여전히 나온다. K의 동기들은 벌써 '차장급'이다. '신문사는 사주의 것이 아니다.'와 '정론의 길을 걷지 않는다'라는 뜻을 앞세워 노조를 만들고, 회사와 싸웠던 때가 아득하다. 치기 어리기는 했다. 그러나 다시 돌아가도 마찬가지라고 K는 되새긴다.

"K 사무국장님, 오랜만이야."

국제부 장 차장이 반갑게 맞는다. 과거 노조 사무국장이었던 K를 빙충맞게 놀린다. 국제부 '통(通)'이라서 밥 먹듯 심야 근무를 해서인지 성긴 머리가 반이나 희끗희끗하다. 동갑인 K보다 한참 형뻘 되는 것 같다. 신문사 뒤켠에 있는 선술집에 자리 잡는다. 간이 횟집이다. 주머니가 알량했을 적 자주 찾던 곳이다. 주인도 그대로다. K만 그간 안 왔을 뿐이다.

"일본에 간다…. 괜찮겠어?"      

일본 도쿄에서 특파원으로 거의 10년을 지냈던 장 차장은 내심 걱정되는 눈빛이다. 하지만 수 년간 반복돼 온 일일 뿐이다. 몇 년 전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이후 독도, 센카쿠열도 문제로 한국-중국과 일본의 갈등은 첨예화됐다. 동시에 일본 내의 급격한 우경화에 따라 한·중·일의 외교관계는 살얼음판을 걸어온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 해도 그것은 언론과 정치인들의 게임이거나 관심을 끌기 위한 장난에 불과하다는 게 K의 생각이다.

일본의 말 없는 양심적 식자층과 합리적인 시민들이 그런 말도 안 되는 협잡을 방치할 리가 없다. 정치권이야 그렇다 치고, 경제와 문화 등 민간분야에서 적어도 한국과 일본은 서로 떼려야 뗄 수 없다. 서로에게 등 돌린다는 것은 곧 서로를 공멸에 빠뜨린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일본 극우세력들의 '미친 짓'은 아직까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1억3천만 명에 가까운 인구 중 극히 일부 철없는 행동이 양국 간 단교라든지 도발이나 전쟁을 불러일으킨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이다. 생각지도 못할 강박일 뿐이다. 그러나 그것은 어쩌면 K의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일지도 모른다.

"예상보다 훨씬 심각한 것 같아서 하는 얘기야."

일본에서 최근 특정비밀보호법의 무리한 적용으로 여러 사람이 재판에 넘겨졌다. 몇 년 전 재개한 무기 수출은 해마다 급증하고 있다. 집단자위권 행사와 관련, 국제분쟁 지역에서 실전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는 설명이다.

게다가 작년에 이뤄진 헌법 개정으로 '평화국가'에서 극우 보수층이 말하는 '보통국가'로 바뀌면서 전쟁을 일으킬 수 있는 멍석을 넓게 깔아놓았다. 이를 바탕으로 국가안전보장회의 관계법령을 은밀하게 강화했다. 전시·준전시 상황에서 인신을 긴급 구속할 수 있도록, 마치 한국의 과거 박정희 정권 시절 '긴급조치'처럼 만들었다는 섬뜩한 소식도 전한다.

더욱이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소재가 됐던 예비 범죄자를 미리 선별해 체포하는 '프리크라임(Pre-Crime) 시스템'과 비슷한 '프레드폴(Predictive Policing, 예측치안)'을 도입했다는 얘기도 나온다. 문제는 국가안전보장 관련 사항에 있어서 범죄자는 물론 잠재적 범죄자를 구금할 수 있는 '기범자 및 예범자(豫犯者)에 관한 단속' 법령이다. 의회에서 만들어진 법률이 아니라 총리령에 따라 정식 기소나 재판 없이 이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잡아넣는 반법치주의적이며 반민주적인 법안이라는 내각의 일부 반대가 있었다.

그러나 최근 일본 정부나 의회에서 말도 안 되게 빈발하는, '검은' 움직임에 묻혀 소수의견은 무시됐다. 심지어 일본 언론에서조차 국가안전보장을 위해서는 불가피하다며 자신들의 직무를 유기했다. 국민들은 그것을 구경꾼처럼 바라보기만 했다. 해외의 반응도 마찬가지였다. 2001년 미국이 9·11 테러를 당한 이후 인권침해 우려가 있는 '애국법'을 밀어붙여 만든 것처럼, 유럽을 비롯해 여러 국가에서 국가 안전보장이라는 미명 아래 숱한 애국법을 만든 상황이다. 그런 만큼 일본의 단속 법령에 대해 왈가왈부할 입장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일본에서는 보이는 것, 알려진 것보다 무서운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더군. 어쩌면 극우라는 '꼬리'가 전체 일본이라는 '몸통'을 흔들어가는 형국이라는 거야. 브레이크 없이 치닫는 우경화 상황에서 군국주의화라는 비극이 되풀이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얘기지. 이제 언론도 본격적으로 가세해서 일본 국민 대다수를 장님으로 만들고 있어. 과거 태평양전쟁 시대처럼 그릇된 패망의 곁길로 이끌고 있다는 얘기라서 더욱 불안해."

오랜 준비기간이 이제 실행시기를 맞았다는 얘기다. K가 알기에도 일본 혹은 일본인들의 준비성은 높이 살만하다. 역사에서도 나타나듯 임진왜란을 앞두고 스님들을 스파이로 보내 조선 전국의 지도와 요충지 방어선을 파악했다. 을사늑약을 앞두고도 수십 년 전에 보부상을 가장시킨 첩자를 보내 전국을 훑으면서 거의 수년간에 걸쳐 침략에 필요한 우리나라의 정밀지도를 완성시켰다.

조선을 본격적으로 침략하기 전 일본에 적대적이었던 명성황후를 일본의 깡패들인 낭인을 시켜서 황궁을 침입해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운 전대미문의 악행도 서슴지 않았다. 을사늑약을 통해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부로부터 경술국치, 총독부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에 대한 준비도 철저했다.

중일전쟁을 일으킬 때도 만주국이라는 허수아비 국가를 만들어 수년 간 준비했다. 태평양전쟁 때 진주만을 기습할 때도 일요일 아침을 택해 미국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일단 '나쁜 짓'을 하기로 마음먹으면 주도면밀하게 기획하고 준비하는 것이 일본의 무서운 장기다.

장 차장은 일본 내 고위층 소스라고 전제한 뒤 '매뉴얼 국가'인 일본이 최근 특정비밀보호법, 집단자위권 행사에서부터 이제는 헌법까지 고쳐서 일련의 '전쟁 매뉴얼'을 완성시킨 혐의가 짙다고 한다. 국민들이 그렇게 반대하던 원자력 발전을 통해 모아 놓은 플루토늄도 1년에 핵무기 수 십 개를 만들 수 있을 만큼 준비됐다고 단언한다.

"일본이 과거에 중일전쟁의 빌미로 삼은 '노구교 사건'과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면 일본이 전쟁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봐야 돼."

너무 멀리 나갔다. 술잔이 돌고, 취기가 오르면서 장 차장의 일본에 대한 악감정도 그 수위가 높아진다. 일면 과거 일제의 총칼에 의해 나라를 빼앗긴 민족으로서 민감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게다가 최근 수년간 일본은 위안부 존재와 군·정부 차원의 개입조차 부정해 온 것은 물론 역사적·실질적으로도 엄연한 한국 영토인 독도에 대한 터무니없는 야욕을 거리낌 없이 드러내 왔다.

뿐만 아니라 최근 일반인들에게까지 확산되고 있는 '혐한 시위', 과도하게 군비를 확충해 온 일본의 행태를 꾸준히, 그리고 샅샅이 지켜보고 파헤쳐 본 장 차장에게 K는 단지 말없이 듣는 사람이다.

장 차장을 택시에 태워 보낸다. 일본에 가서 만나 볼 사람을 소개 받는 일, 연락처를 받는 일은 다음으로 미룬다. 담배를 꺼내 문다. 라이터가 없다. 담배를 도로 넣는다. 늘 이렇다. 라이터는 꼭 필요할 때 없다. 이참에 담배를 끊어야겠다. 일본의 담뱃값이 한국의 갑절이라고 한다. 건강도 챙길 요량이다. 장 차장과 만난 다음 온통 일본 얘기만 해서인지 K는 한동안 연락이 없는 미키가 지금 피우지 못한 한 개비의 담배보다, 술 마신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난 뒤 찾는 한 잔의 얼음물보다 더욱 간절해진다.

도쿄 도심에서 가까운 하네다 공항에 내린 것은 오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다. 이른 장마가 시작됐는지 후텁지근한 공기에 비까지 세차게 내린다. A그룹 주재원인 이성민 과장이라는 사람이 반갑게 맞아준다

"비 오는 날, 귀한 손님이 오셨군요.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수인사를 마친 다음, 미리 짐을 숙소로 보낸 뒤라 간단한 캐리어백 하나만 들고 온 K는 이 과장이 대기시켜 놓은 차에 오른다. 차창 너머로 도쿄의 불빛이 아스라이 번진다. 비 오는 밤 도쿄 풍경은 처음이다. 여느 도시와 비슷한 풍광이지만 최근 들어 '위험한 도시'로 전 세계 언론 국제면을 메우고 있는 도쿄다.

일왕과 군국 그리고 배타적이고 저급한 민족주의, 쇼비니즘, 게다가 북한핵을 빌미로 핵무장까지 공식적으로 선언했다. 더욱이 전 세계적으로 가장 안전한 경찰국가라는 일본이지만 요즘 도쿄에서는 극우단체들의 백색테러가 한국인·중국인·동남아시아인은 물론 근간에는 백인들, 우경화에 반대하는 자국민에게까지 대상을 넓히고 있다. 교묘하고 은밀하다.

서쪽 유럽은 유럽대로 경제 문제에다가 러시아의 막무가내식 팽창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어 다른 지역을 문제 삼을 처지가 못 되는 처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국의 도전에 '슈퍼파워'를 위협당하고 있는 미국은 일본의 위험한 움직임을 묵인하는 듯한 태도를 보여 심각하다.

한국과 중국이 더욱 가까워지면서 중국의 태평양 진출을 막을 마지막 '마지노선'으로 일본을 선택하고, 그들의 일탈을 어느 정도 용인하겠다는 속셈으로 밖에 볼 수 없다. 과거 한국전의 단초가 된 1950년 '에치슨 라인'을 다시 그은 것이거나 아니면 훨씬 전 일본이 마음 놓고 조선을 불법적으로 집어 삼키게 만든 '가쓰라-태프트 밀약'의 새로운 버전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거두기 힘들다.

"불과 몇 달 만에 도쿄가 이상해졌어요. 물가 비싼 거 빼놓고 살기에는 괜찮은 곳이었는데요."

아니다. 수개월 만에 급변하는 도시는 없다. 몇 년 전부터 우익 인터넷 사이트에서부터 혐한 서적 출판 홍수, J리그의 인종차별적 플래카드, 도서관 '안네의 일기' 훼손, '재특회'의 끈질긴 혐한 시위, '자이니치' 마을에 대한 테러 위협 등 갖은 증세를 예고편으로 보여왔다. 게다가 여론을 만들고, 그것으로 먹고 사는 일부 언론과 정치인들은 이를 바탕으로 끊임없이 자신들의 동아시아 침략사를 부정해왔다.

특히 총리라는 자가 인간을 '실험쥐' 삼아 악명 높은 '731부대'를 연상시키는 '자위대 전투기 731호'에 타서 손으로 승리를 표시하는 V자를 그려 보이는 사진을 연출, 전 세계를 경악케 했다. 마치 독일 총리가 독일군복을 입고 으스대는 일과 같다는 비난도 나왔다.

러일전쟁 승리의 영광만을 기억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되레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만을 놓고 자신들이 태평양전쟁의 희생자인양 행세한다. 전범을 기리는 행위도 아예 드러내놓고 한다. 앞으로는 세계 평화를 외치면서 뒤로는 칼을 만들고 그 칼을 날카롭게 벼리고 있는 격이다.

인권과 역사적 인식이 없다는 비판으로 국제사회에서 조롱을 당하고, 급격한 인구 감소와 함께 앞이 보이지 않는 불황으로 경제력마저 점점 뒷걸음치고 있다. 수년 전 총리의 이름을 딴 '아베노믹스'로 중앙정부가 돈을 풀어 경기를 살리려 노력했으나 실패해 빚만 늘어나 허덕이고 있는 게 현재 일본의 엄연한 현실이다.

일본은 그러나 이를 우경화라는 손쉬운 방법으로 가려보려 하는 얕은 수를, 아예 대놓고 일본 국민들과 국제사회를 향해 드러내고 있다. 일본의 불안한 정서 밑바닥부터 '우향우'의 구령이 커지면서 정치인들은 그런 '나쁜 여론'에 편승해 메아리치듯 일본 우경화의 마지막 안전판이었던 평화헌법을 부정하는 개헌까지 이뤄낸 것이다.

"시장하지 않으세요?"

아닌 게 아니라 서울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출발한 K는 속이 헛헛하다. 이 과장의 안내로 선술집인 '이자카야'를 찾는다. 문어포와 구운 은행을 안주 삼아 따뜻한 청주 한 잔을 마신다. 소주 마실 때처럼 빈속에 알코올이 식도부터 위까지 짜르르하게 자극하는 느낌이 없다.

하지만 부드럽고 달착지근한 청주의 향취에 비로소 일본에 도착했다는 사실이 실감난다. 잠시 후 나온 일본식 빈대떡인 '오코노미야키'가 허기를 훌륭하게 속일 수 있게 해준다. 음식은 국가나 민족을 차별하지 않는다.

일본 태생인 이 과장은 아버지 때부터 A그룹 식구였다고 한다. 이 과장 부친이 1980년대 초 A그룹 도쿄 주재원으로 있을 때 태어났단다. 중학교 때까지 일본에 생활하다가 귀국한 다음 대학을 마치고 A그룹에 입사해서 기획조정실에 근무하다가 도쿄로 파견된 지 3년째다.

"사실 보통 사람들은 잘 못 느낍니다. 먹고 살기 바쁜데 다른 데 신경 쓸 일 있나요. 거래처 사람들과 만나고 밥 먹고, 또 영업하고…."

생활이 먼저라는 것, 맞는 말이다. 정치라든지 국제관계라든지 하는 것은 신문이나 방송에서 떠드는 주제일 뿐 일반인들의 생활을 떠나 있는 뜬구름이기 때문이다. 간단하게 먹는다는 게 어느새 청주를 세 도쿠리나 마신다.

이 과장은 일본이라는 시장이 녹녹치 않아 가전이나 유통 부문에 뿌리를 내리기가 힘들다고 푸념한다. 그도 그럴 것이 2000년 초반까지만 해도 세계 시장에서 '소니'를 비롯한 일본 전자·가전제품은 소비자들이 가장 선호하는 아이템이었다. 그런데 일본을 베끼고 따라하던 한국이 TV부터 휴대전화, 태블릿 등 최신 기종으로 일본 제품을 국제시장에서 밀어내기 시작한 이후, 게다가 중국산 제품들이 가격 경쟁력으로 한국을 휘협하는 지금 일본인들은 최소한 국내에서 자국 브랜드를 지켜내야 하겠다는 위기감에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국산만 고집한다. 유통망 또한 아예 한국제품을 취급하지 않는 곳이 워낙 많다보니 소비자들이 한국제품을 만날 기회마저 없게 된 것이다.

"K선생님께서 오셔서 저희 그룹 차원에서 기대가 큽니다."

K는 겸연쩍었다. 동시에 부담도 느꼈다. 누군가 무엇을 기대할 때 최소한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한다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더욱이 돈에 시달리지 않으며 자신의 글을 쓰고 싶다는 글쟁이의 소박한 꿈이 이뤄지기는 어렵겠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어차피 돈을 받는다는 사실은 그에 상응하는 노동과 같은 용역을 제공해야 하는 것과 맞바꾸는 교환가치일 뿐이기 때문이다.

주일대사관 문화원부터 알아볼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이 많아서 사람 만나기가 손쉬울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금방 그 생각을 접는다. 그래도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은 한국에 대한 최소한의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에게 A그룹에 대한 평가와 꾸며지지 않은 생활 그대로를 엿보기는 쉽지 않아서다.

혼자 마신 터라 조금 취기가 오르면서 피곤해진다. 긴 시간 비행은 아니었지만 아침부터 움직여서인지 몸이 쳐진다. 이 과장이 앞장서서 도쿄의 무사시노시에 있는 숙소에 도착했다. 전형적인 주택가다.

어릴 적 K가 가족들과 함께 살았던 그곳처럼. 한밤 공기도 맑다. 비 그친 여기저기 나무와 꽃이 지천이다. 이 과장은 조금 걷다보면 도쿄에서 유명한 이노카시라 공원이 있어 평일에도 산책하기 좋다고 귀띔한다. 근처 편의점과 시장, 교통편 등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정보를 빼곡히 적힌 수첩과 간이지도를 주고 간다.

방 두 개에 거실이 꽤 넓은 단층 양옥 집은 K가 일본 도쿄에서 혼자 살기에는 조금 호사스러워 보인다. 작은 정원에 라일락 나무, 감나무도 있고, 낮은 담에는 장미덩굴도 꽃봉오리를 품고 있어 계절의 변화도 느낄 수 있겠다. 다다미 대신 카펫이 깔려 있는 거실과 방은 냉난방기가 갖춰져 도쿄의 무더운 여름과 습기 먹은 싸늘한 겨울은 면할 수 있을 것 같다. 일주일에 한 번 교포 아주머니가 와서 밑반찬과 청소, 빨래를 해 준다고 한다.

집 안팎을 둘러보고 옷가지와 세면도구 등 정리가 끝나자 새벽 2시를 훌쩍 넘긴다. 한국에서 K가 한창 일할 시간이다. 미리 준비한 접속단자를 끼워 습관처럼 노트북을 켜고 인터넷에 연결한다. 한국 포털 사이트 접속이라서 그런지 속도가 조금은 더디다는 느낌이다.

사실은 정상적이었지만 워낙 빠른 속도에 익숙해져 있어 느낌이 그랬을 뿐이다. 미키로부터 기다리는 답장은 없다. 일전에 도쿄에 간다고, 만나자고 연락을 했는데 아직까지 대답이 없다. 출발하기 전 핸드폰으로 전화를 했지만 역시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기계음만 들릴 뿐이었다. 불안하다.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닌가 걱정된다.

그러나 어느새 인터넷에 한 눈 파는 순간 이내 미키는 사라진다.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여기 저기 포털을 드나들고, 언론사 사이트에서 뉴스를 찾는 데에만 몰두한다. 언제부터인지 컴퓨터나 혹은 핸드폰으로 온라인에 매여 있는 자신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첫 직장으로 기자라는 직업을 택했던 K는 아직도 자신이 기자인줄 아는 모양이다.

대부분 늘 일어나는, 사람 사는 세상에 대한 일이나 소식이지만 '세상에는 별 일도 다 있구나' 할 만한 '거리'들을, 좋아하는 주전부리처럼 구하고 있다. 하지(夏至)를 앞두고 밤이 짧아진 6월 초 벌써 희뿌옇게 날이 밝는다. 안 되겠다. 인터넷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시간을 줄여야 한다는 다짐을 하면서 도쿄에서 첫날을 마감한다.

(* 다음 화에 계속됩니다)


태그:#일본, #군국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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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Bella Vita! 인생은 아름답다며, 글쓰기로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세계일보, 머니투데이, 한경비즈니스, 이코노미조선 등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2019년 '아산문학' 공모전에서 '그는 제바닷타였을까'라는 단편소설로 대상을 받고, 전업작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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