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명의 시민기자가 개의 기사를 작성하였습니다. 시민기자 전환하기
눈을 뜨니 6시이다. 창문 밖으로 바다가 보인다. 아침은 7시부터 할 수 있어 산책에 나섰다. 길을 따라 걸으니 바로 가까이에 바다가 있다. 개천을 따라 올라간다. 얼마나 개천이 깨끗한지! 물고기가 왔다 갔다 한다. 그 이른 아침임에도 골목에는 쓰레기 하나 없다. 생각해 보니 어제부터 지금까지 길가에서 쓰레기를 본 적이 없다. 많지 않은 인구지만 주민과 관이 합심하면 이렇게 깨끗한 환경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다. 만일 대마도가 우리나라 영토였다면 이렇게 깨끗한 환경을 보존했을까?

 도심을 흐르는 개천. 너무 깨끗하다.
 도심을 흐르는 개천. 너무 깨끗하다.
ⓒ 이규봉

관련사진보기


조그마한 할머니가 오토바이로 신문을 배달한다. 한 집에 신문을 넣고 마침 나와 있는 구독자와 정답게 담소를 나누는 것이 무척 행복해 보인다. 개천을 따라 좀 올라가니 어제 저녁을 먹었던 식당이 나온다. 음식 가격도 우리에 비해 결코 비싸지 않았지만 그 깔끔함이란! 또 한 번 오게 만든다. 한국에서 그 비싼 아사히 맥주를 이곳 가격으로 마실 수 있는 즐거움도 있다. 시내가 넓지 않아 30분 정도에 거의 다 돌았다. 어제 어두워서 보지 못했지만 쇼핑센터를 포함한 유적들도 숙소에서 10,20분 거리에 거의 다 있다.

마리아상과 보살상의 아름다운 조화

아침 식사 시간에 맞추어 숙소로 돌아왔다. 식당에 문을 열고 들어가니 탁자에는 입실한 손님들 각각의 인원수에 맞추어 상이 차려져 있다. 모르는 사람과 원하지 않는 합석을 하지 않게 배려한 정성이 보인다. 탁자에는 모두 개인상 차림이다. 그 정결함에 또 한 번 놀랐다. 넓은 창 너머로 푸릇푸릇한 작은 정원도 보인다.

더욱 놀란 것은 벽에 마리아상과 보살상이 위아래로 나란히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여기는 분명히 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의 마리아상이 보살상 위에 함께 붙어 있다니! 놀랄 따름이다. 그들의 융화가.

 마리아 상과 보살상, 그리고 절임을 알리는 관세음보살
 마리아 상과 보살상, 그리고 절임을 알리는 관세음보살
ⓒ 이규봉

관련사진보기


밑반찬은 이미 차려져 있고 밥과 국은 자신이 직접 떠다 먹는다. 은은한 나무 향기에 쾌적한 숙소, 창밖의 소박한 정원 그리고 정갈한 아침. 이 모든 것을 함께 보았을 때 우리가 낸 숙박비는 결코 비싼 것은 아니었다. 언젠가 아내를 데리고 다시 한 번 와야겠다는 생각을 들게 한다.

참된 보수주의란 이런 것이다

아침을 마치고 이즈하라 주변에 있는 우리와 관련된 유적지를 찾아 나섰다. 이즈하라는 대마도를 다스린 소오씨가 중부에 있는 사카에서 1486년 이주해 와 마을이 형성되고 메이지 유신 이후 지금의 이즈하라로 개칭되었다. 일본의 에도(江戶)시대에는 중국과 조선과의 교역항으로 발전하였고 한양에서 에도로 향하던 조선통신사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다.

숙소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슈젠지(修善寺)에 먼저 들렸다. 이곳에는 조선 말 의병장 면암 최익현(1833~1906) 선생의 순국을 기리는 비가 절의 대문 바로 뒤에 우뚝 서 있다. 비 앞면에는 '대한인최익현선생순국지비(大韓人崔益鉉先生殉國之碑)'라고 적혀있고 뒷면에는 한국과 대마도 측 인사들의 이름이 적혀 있다. 최익현은 유학자이자 관리로 대원군의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는 상소문을 올렸고 친일개화파를 적으로 규정하여 개화정책 폐지를 요구했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을사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문을 올리고 전북 태인에서 74세의 나이로 직접 의병을 일으켜 관군·일본군과 싸웠다. 그러나 1906년 일제에 의해 압송되어 대마도에 감금되었다. 선생은 일제가 주는 음식을 거부하며 단식을 결행하다 1906년 11월 17일(음력) 74세를 일기로 순국하셨다.

같은 달 21일 운구가 부산에 도착하자 전국의 유림과 백성 수만 명이 찾아와 곡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황제인 고종이 선생의 죽음에 조의를 표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운구는 충남 논산에 가매장되었다가 2년 뒤에 충남 예산군 대흥면에 안장되었다. 고향인 포천에 채산사가 건립되어 지금도 매년 선생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고 한다. 요즘과 같이 거짓 보수주의자가 판치는 사회에 최익현 선생이야말로 참된 보수주의자로 숭상받을 만한 인물이다. 이 비는 1982년 선생을 기리는 한국과 일본 사람들에 의해 세워졌다.

비운의 덕혜옹주

다시 오던 길을 되돌아 역사민속박물관을 찾았다. 그 앞에는 커다란 쇼핑센터가 있고 숙소까지는 5분 이내의 거리이다. 박물관 앞 개천을 따라 올라가니 반쇼인(万松院)이란 절이 나온다. 이 절에는 역대 대마도주와 가족이 묻힌 묘역이 있다. 절에서 오른쪽으로 나 있는 길을 따라가니 덕혜옹주의 결혼을 축하는 봉축기념비가 보인다.

덕혜옹주는 고종과 양귀인 사이의 외동딸이다. 서녀(庶女)라는 이유로 일본에 의해 왕족으로 인정받지 못하다가 14살에 강제로 끌려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일본의 국익을 위해 대마도주인 소오타케유키(宗武志)와 1931년 5월에 사랑이 없는 정략적인 결혼을 해 도쿄에서 생활했다. 그러나 1955년 결국 이혼하였고 하나밖에 없는 딸이 1956년 실종되자 한국으로 돌아오려 했다. 그러나 당시 정치적인 문제로 1962년 되어서야 귀국할 수 있었고 창덕궁 낙선재에서 혼자 살며 평생 정신분열증에 시달리다 1989년에 76세의 나이로 쓸쓸히 사망한다.

결혼 봉축 기념비는 원래 이즈하라 시내의 가네이시 성터에 건립되었으나 이혼 후 사람들이 기념비를 뽑아 방치했다고 한다. 그러다 1999년 대마도와 부산 사이의 직항로가 개통되고 관광객이 몰려들자 2001년 11월 지금의 자리에 복원되었다.

 최익현선생 추모비와 덕혜옹주의 봉축기념비
 최익현선생 추모비와 덕혜옹주의 봉축기념비
ⓒ 이규봉

관련사진보기


일제는 조선왕실을 이왕가로 내려 부르고 정략결혼으로 일선동화를 시켰으며 일본식 교육을 하여 왕실을 무력화시켰다. 고종과 엄비의 아들인 영친왕 이은도 10살 때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강제로 일본에 끌려가 육군사관학교의 교육을 받게 하고 일본 황족인 방자와 결혼하게 했다. 이씨 왕족으로 칭하는 자가 그렇게 많았건만 나라의 멸망에 책임을 지고 독립운동에 뛰어든 자는 하나도 없었다.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고려문, 조선통신사를 환영하다

역사민속박물관 입구에는 '조선국통신사지비(朝鮮國通信使之碑)'라는 이름을 새긴 비가 우뚝 서 있었다. 두 차례의 왜란으로 조선이 초토화되어 대마도와 조선의 관계가 끊어지자 대마도는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그래서 대마도주는 조선과 다시 국교를 정상화하기를 요청했다. 조선통신사는 1607년(선조 40년)에 시작하여 1811년까지 12회에 걸쳐 외교사절로 일본을 방문했다. 처음 세 차례는 쇄환사(刷還使)로 파견되어 조선인 포로를 귀국시키는 것이 주 임무였다. 네 번째 방문인 1936년부터 조선통신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역사민속박물관 앞에 있는 이즈하라의 중심을 흐르는 개천을 따라 올라가면 고려문이 나온다. 문 이외는 어떠한 것도 유적이라 할 만한 것이 없어 좀 썰렁한 기분이 든다. 고려문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발생한 사이에 만들어진 대마도주 거처의 정문이었고 1678년 완성된 성의 문이기도 했으나 조선통신사를 환영하기 위해 새로 건설되었다. 현재의 모습은 태풍으로 훼손된 것을 1989년 복원한 것이라 한다.

 조선통신사를 환영하기 위한 고려문
 조선통신사를 환영하기 위한 고려문
ⓒ 이규봉

관련사진보기


주문한 지 한 시간 만에 나온 음식

한 바퀴 역사 산책을 하고 들어오니 퇴실 시간인 10시에 가까웠다. 10시 반에 숙소를 출발해 다시 만제키 다리까지 같은 길을 되돌아갔다. 휴게소에서 잠시 쉬고 다리를 건넜는데 오른쪽에 식당이 보였다. 여기를 지나면 식당이 없을 것 같았다. 들어가 보니 여기도 나무 냄새가 솔솔 나고 창문 밖으로 바다가 보이는 조그마한 식당이었다.

이미 세 탁자 정도에 손님이 들어서 있었다, 12시쯤 주문을 했는데 먼저 온 사람들을 먼저  차려주면서 우리한테 오는데 자그마치 한 시간이나 걸렸다. 그 사이 우리는 아주 푹 잘 쉬었다. 우리나라 같으면 늦는다고 난리 났을 터인데 누구 하나 떠드는 사람 없이 조용하다. 우리도 분위기에 젖어 찍소리 못하고 처분만 기다렸다. 역시나 음식은 아주 정갈했다.

이곳에서 길이 나뉜다. 어제와 달리 오늘은 서쪽으로 나 있는 382번 국도를 따라서 갔다. 5km 정도 가니 니이(仁位)가 나온다. 과거 고구려에 속했다는 기록이 전해지는 이 마을은 니이 강가에 있는 마을로 강을 이용해 조선에 토산물을 보내는 항구로 이용되었다. 세종실록 등 여러 곳에서 인위 군주가 조선에 토산물을 공납했다는 기록이 여러 차례 나온다.

어제와 달리 도로에는 출구가 안 보이는 매우 긴 터널들이 나왔다. 문제는 어떤 터널은 갓길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한 터널은 전속력으로 빨리 빠져나가는 방법이 최고다. 다행히 차량이 많지 않아 별 어려움은 없었다. 이즈하라에서 45km 정도 가니 폭이 그다지 넓지 않은 강이 나온다. 미네(三根) 강이다. 별로 하천이 없는 대마도에서 가장 아름다운 물줄기를 자랑하는 이 강은 다카노(高野) 산에서 시작하여 계곡을 흘러 미네 만으로 들어가며 길이가 6km에 달한다고 한다.

샤워는 온천에서 하세요

다리를 두고 길이 갈라지는데 어느 곳으로 가도 가는 방향은 같다. 분명 여기가 오늘의 목적지인 미네 같았다. 미리 예약한 대교여관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다리 중앙에 서서 뒤쫓아 오는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데 우연히 대교여관(大橋旅館)이란 허름한 간판이 눈에 보였다. 이때가 4시였다.

여관은 전통적인 다다미가 깔린 이층집이었다. 배정받은 방이 서향이라 에어컨도 의미가 없을 정도로 엄청 더웠다. 바로 옆에 온천이 있는데 안주인이 그곳까지 차로 데려다주었다. 안주인은 목욕료가 450엔이라 했는데, 갔더니 여관 바깥주인이 그 여관에서 온 모든 손님들의 목욕료를 다 내 주었다.

온천은 자그마했다. 욕탕에는 오직 비누만 있을 뿐 수건은 구입해야 한다. 우리는 여관에서 준비해 주었다. 피곤한 몸을 온천물에 담그며 하루 일정을 끝냈다. 대교여관은 화장실이 공용이었고 샤워실은 있는지 모르지만 사용을 안 했다. 그래서인지 온천을 이용하게 하는 것 같았다. 저녁과 아침을 포함해 하룻밤 숙박비가 1인당 7000엔으로 시설에 비하면 결코 싼 집은 아니다. 그러나 비록 집은 허름했지만 저녁과 아침은 정말 정성을 다한 음식을 차려주었다. 게다가 목욕료도 대 주었고 빨래도 해 주었다.

덧붙이는 글 | <참고도서>
대마도의 진실, 한문희·손승호, 푸른길, 2015
대마도 여행 가는 길, 안준희, 연두m&b, 2015
대마도 역사를 따라 걷다, 이훈, 역사공간, 2005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주기

진실과 정의를 추구하는 오마이뉴스를 후원해주세요!

후원문의 : 010-3270-3828 / 02-733-5505 (내선 0)

오마이뉴스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