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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비교적 짧은 시간에 경제성장과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한 매우 예외적인 사례이다. 지금도 여전히 세계 곳곳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와 빈곤으로 고통 받고 있으며, 북아프리카와 중동에서는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폭발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지구촌 사회의 모습을 고려할 때, 동아시아의 작은 나라 대한민국의 성공은 그 자체로 외부인들에게는 경외의 대상이 되고 있다.

한국의 성공 사례에 대한 외부의 존경과 부러움에도 불구하고, 한국 정치와 사회의 깊숙한 이면에는 여전히 다양한 모순이 해결되지 못한 채 남겨져 있다. 우선 민주주의의 성취와 발전이라는 측면에서도 절차적 최소와 실질적 내용의 괴리가 존재한다. 1987년 6월 항쟁으로 극적으로 민주주의를 쟁취하고 주기적인 선거를 통하여 정치권력을 선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한국정치는 추상적 차원에 불과한 진보와 보수의 이념적 대립만이 존재할 뿐, 다양한 세력의 정치적 요구가 반영되지 못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19대 대선 과정에서 국가정보원의 선거 개입에 대한 사법부의 판결은 한국 민주주의의 절차적 정당성에 대한 심각한 회의를 초래하고 있다. 둘째, 경제성장 역시 1997년 외환 위기 이후 심화된 임금 소득과 취업의 양극화, 소수 재벌 중심의 경제 구조, 2014년 송파 세 모녀 사건과 같은 복지 소외계층의 확산, 부동산 버블 붕괴의 위험, 청년 실업의 증가 등과 같은 다양하고도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최근의 상황을 고려한다면, 한국이 성취한 민주주의와 경제 성장의 동반 성취는 근본적 토대가 결코 안정적이라 평가하기 어려운 것이다.

이와 같은 현실로 인하여 한국 정치에 내재하고 있는 역동적 변화와 발전의 동학과 그에 비례하는 취약한 토대의 원인에 대한 탐구는 한국 정치 연구자들의 오랜 과제가 되었다. 임혁백 교수의 <비동시성의 동시성 – 한국 근대정치의 다중적 시간>(2014)은 이 문제에 대한 근원적 해결의 단초를 제공하는 탁견을 제시하고 있다.

그동안 한국정치의 동학과 모순을 설명하려는 시도는 냉전 반공 이데올로기의 압도적 영향력의 결과, 혹은 시민들의 사회경제적 요구를 반영하지 못하는 보수적 정당체제의 한계라는 식의 설명이 주류를 형성하였다. 이러한 지적은 분단과 전쟁이라는 역사적 사건의 정치에 대한 영향력과 노동 부분의 요구가 반영되지 못하는 정치 현실을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의 변화는 정치 세력들의 이해관계 따른 부침이 존재하지만, 한국 정치에 대한 압도적 영향력은 과거에 비해 약화되고 있다. 보수적 정당체제 역시 냉전 반공 이데올로기가 초래한 결과에 불과하며, "노동 없는 민주주의"라는 진단은 일종의 동어반복이라 할 수 있다. 아울러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대안의 제시라는 학문적 과제에 있어서도 시민사회의 다양한 정치적 경제적 요구를 반영하는 정당 체제의 건설이라는 추상적인 처방과 대안을 제시하는 것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여러 정치학자들이 누누이 강조하다시피 사회 경제적 균열 구조를 반영하는 정당 체제의 필요성은 누구나 동의할 수 있는 문제 의식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정당 체제의 정상화는 그 자체가 민주주의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는 것에 대한 설명이나 다른 모습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추상성이 높은 테제가 될 수 있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한국 정치를 이해하고 분석하기 위한 새로운 시각과 수단에 대한 요구가 줄기차게 제기되어 왔다. 임혁백 교수가 제시한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개념은 바로 이러한 질문에 대한 명쾌한 해답이자 현실 정치 개혁을 위한 유력한 대안으로도 활용할 수 있다. 이 책이 한국 정치를 이해하는데 새롭게 제시하고 있는 장점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하여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비동시성의 동시성" 개념은 해방 전후 격동의 시기에서부터 현재의 적나라한 정치적 변화의 순간에도 수미일관하게 적용할 수 있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란 개념은 애초에는 블로흐(Ernst Bloch)가 개발한 것으로 바이바르 공화국 시대의 독일을 분석한 정치, 철학, 문화의 개념이다.

이 책에서 사용하고 있는 개념을 개괄적으로 설명한다면, 전근대와 근대, 그리고 탈근대가 시간적 차원뿐만 아니라 공간적 차원에서도 동시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정반합의 변증법적 논리가 전개되는 방식과 유사하며 필연적으로 새로운 질서가 구축되기 이전의 혼란과 갈등을 내재하고 있다.

저자는 한국 정치의 변화와 발전 양상을 "긴 20세기"로 개념화하여 복잡하고 다양한 모습을 일관성 있게 분석하고 있다. 서양의 근대화가 역사 발전에 대한 일정한 방향성을 가진 것으로 오랜 기간 누적된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역사 발전은 과거의 전통이 때로는 강력하게 존재하면서 일본과 서양의 문물을 급속하게 수용하고, 급기야 어떤 부분에서는 새로운 유행과 기준을 창출하는 퇴행과 발전, 혁명과 반동, 수용과 변용의 역동성을 특징으로 한다.

구한말 개화파와 위정척사파의 대립, 일제와 해방공간에서 명멸했던 수많은 정치 이념과 운동의 쟁투, 분단과 전쟁을 거치며 새로운 구속력을 갖게 된 반공 이데올로기와 그에 대한 저항, 권위주의 독재 체제에서 시도된 경제발전과 근대화로 인한 자유와 민주주의에 대한 갈망, 민주화의 달성과 공고화의 과정에서의 부침, 경제 위기와 신자유주의 확산에 따른 저항의 확대 등과 같은 복잡 다기한 한국 정치의 변화 양상을 이해하는데 있어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란 개념을 통해 비로소 일관성 있는 분석이 가능해진다.

예를 들어 냉전 반공 이데올로기를 통한 한국 정치 분석은 한국 전쟁 이후 시기에는 설득력이 높지만 식민지 시기나 해방 공간에는 적용하기 어려우며 남북정상회담 이후에는 점차로 적용가능성이 낮아지는 한계를 지닌다. 반면 "비동시성의 동시성"을 통한 한국 정치 분석은 비동시성이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한, 현실 정치의 이해와 분석에 높은 설명력을 가지고 일관성 있게 적용할 수 있는 장점이 존재한다.

둘째, 이 책은 일제 강점기에서 최근까지 긴 시간을 망라하면서도 각 시대의 모습을 이해하기 쉽게 서술되었다. 어떤 연구 대상을 과학적으로 이해하기 위하여 엄밀하고 간결한 이론, 적절한 분석의 방법론, 그리고 연구 대상에 대한 풍부한 사실이 일치되어야 한다. 앞의 두 가지는 선행 연구의 성과를 통하여 어느 정도 극복하고 있으나, 한국 정치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맞닥뜨리는 어려움 중에서 가장 큰 것은 마지막 역사적 사실에 대한 충분한 이해가 아닌가 싶다. 특히 최근 젊은 세대는 불과 30년이 되지 않은 민주화 과정의 역사적 사실마저도 혼동하고 있는데, 국가 건설 초기 상황까지 알기를 바라는 것은 난망한 노릇이다.

현대 한국정치가 시간적으로 길다고 할 수 없으나 매 순간 순간이 중요한 사건으로 점철되었다는 점에서 파악해야할 사실이 적지 않은 편이다. 또한 이 책에서 제시하는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란 개념이 개별 역사적 사건에서는 어떻게 적용할 수 있는가 문제 또한 결코 쉬운 과제는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시간적 흐름에 따른 쉬운 전개 방식을 채택한 것과 함께 각 시기의 모습과 성격을 단순한 사건의 나열로만 설명하지 않는다. 즉 매 시기의 사회 분위기와 정조, 그리고 당대 엘리트들의 생각을 이해하기 쉽도록 적절한 시문학 작품을 함께 소개하고 있다.

이러한 서술 방식은 자칫 어렵고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정치학 서술 방식의 난점을 보완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비동시성의 동시성" 개념이 내포하는 다양한 이념과 주의가 충돌하는 모습을 효과적으로 이해시키는 장점이 있다. 즉 일제 강점기 김동환의 <국경의 밤>에서 나타나는 민족주의와 김기림의 <어떤 친한 '시의 벗에게'>라는 시에서 나타나는 근대를 넘어서는 아방가르드 사조의 대비는 그 어떤 구구한 설명보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란 개념을 쉽게 설명하지 못할 것이다.

끝으로 저자는 한국정치의 문제에 대한 지적과 함께 그에 대한 매우 구체적인 대안을 함께 제시하고 있다. 학문의 주요 과제는 현상에 대한 사후적 해석이 아니라 미래에 대한 예측에 있다. 경제학이 소비자와 생산자의 수요와 공급에 의해 가격이 결정되는 동학을 갖고 있기에 비교적 예측이 어느 정도 가능한 것이라면, 정치학은 고려해야 할 변수가 사실상 무한할 정도이기에 미래에 대한 예측이나 대안의 제시는 결코 쉽지 않다.

따라서 분석의 대상은 얼마나 효과적으로 한정시켜 구체화하느냐의 여부가 정치학을 하는 사람들이 당면한 지상의 과제가 되는 셈이다.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라는 프리즘으로 한국 정치를 이해하는 것은 결론적으로 비동시성을 어떻게 극복하고 지양하느냐의 문제로 좁혀지게 된다. 저자는 21세기 한국의 비동시성으로 인해 초래되는 갈등정치를 지양하기 위한 방법으로 다원주의적 공존과 균형의 정치문화와 균형과 공존의 정치제도가 공존할 수 구체적 정치제도를 제시하였다. 즉 문화와 제도 어느 하나에 치우치지 않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공자와 원효, 정약용과 같은 한국과 동양의 고전을 두루 참고하고 있다.

기존 한국 정치학이 서양의 이론을 중심으로 연구되고 학습되었기 때문에 서구식 사고와 방식에 포박되어 있는 것은 자못 안타까운 일이다. 이러한 현실에서 저자가 제시한 여섯 가지 정치제도 디자인에 대한 제안은 매우 구체적이며 정치사상적 측면에서 동서양을 아우르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비동시성의 동시성 – 한국 근대정치의 다중적 시간>은 한국 정치를 학습하기 위한 대학생, 대학원생들을 위한 훌륭한 교과서로 활용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박사급 연구자들에게도 개별 시대에 대한 저자의 분석과 평가는 학문적 발전을 위한 유용한 연구 문제와 토론거리를 제공할 것으로 기대된다.

다만 "비동시성의 동시성"으로 인한 정치적 갈등과 모순이 변증법적 역사의 발전, 또는 시간의 자연스러운 흐름에 따라 점진적으로 지양될 수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즉 갈등과 모순의 해결은 행위자들의 적극적 노력보다는 구조적 조건의 변화가 중요한 요인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일종의 구조결정론적 논리를 내포하고 있다. 실제로 "비동시성의 동시성"이 가장 극명하게 대립하고 충돌했던 시간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정국을 거치는 초기 국면이었으며, 이러한 갈등이 한국 전쟁으로 극적으로 외화되었다. 이후 분단 체제가 지속되면서 남한의 경우는 점차적으로 비동성이 극복되고 지양되는 장기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는 셈이다.

저자의 주장처럼 민주화 이후 가산주의적 민주주의와 신자유주의, 탈근대적 신유목주의가 공존하고 있지만 이들 사이의 이질성, 비동시성은 과거에 비하여 현저하게 약화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즉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란 프리즘은 현재까지는 일관성 있게 한국 정치를 바라볼 수 있는 유력한 도구이다. 그러나 향후 한국 정치 발전을 위하여 비동시성이 지양되어야 한다는 규범적 요구와 현실적 변화를 고려한다면, 미래에는 적실성을 갖기 어려울 수 있다.

아울러 일반 이론으로의 발전을 위해 다양한 사례에 적용될 수 있어야 하는데, 유사한 경로를 거친 북한 체제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는 분단 체제가 유지되는 한국 정치의 구조적 문제이기도 하다. 유신 체제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북한과의 상호 작용은 설명되는데, 오히려 남북관계가 더욱 밀접하게 된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의 시기에 대한 설명이 부족한 것은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즉 유사한 역사적 경험을 한 북한 체제에 대한 분석에서도 "비동시성의 동시성"이란 동학이 작동하는 것은 설명할 수 있다면, 이는 아직 민주주의를 성취하지 못한 많은 제3세계 국가의 정치를 설명하는 것에서 유용성을 갖게 될 것이다.


비동시성의 동시성 - 한국 근대정치의 다중적 시간

임혁백 지음, 고려대학교출판부(2014)


태그:#임혁백, #한국정치, #비동시성의 동시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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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학 박사, 평화와 민주주의 연구소 책임연구원. 한국 정치를 연구하며, 대학에서 정치학 관련 과목을 강의하는 시간강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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