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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포를 넘어선 n포의 시대. 여기 포기 대신 선택을 하는 아이, 열아홉살 지원이가 있습니다. 수능대신 취업을 선택한, 제 딸 지원이의 다이내믹한 성장과 독특한 선택의 과정을 한해한해 시간의 역순으로 소개합니다. [편집자말]
[이전 기사] '전교 꼴찌' 우리 딸 취업 소식에 '으쓱'

"따님 혼자 가신다구요?"

어떠한 감정의 뉘앙스도 담겨 있지 않은 사무적인 말이지만 우습게도 난 취조를 당하던 범죄자가 드디어 범행의 꼬리가 잡히는 순간의 긴장을 맛본다.

"예."
"지금 몇 살이십니까?"
"고2요. 그런데 1월생이라 학교를 일찍 들어가서요."

이런, 이런, 묻지도 않은 여죄까지 털어놓는다.

"생년월일을 가르쳐주세요."

여전히 상대는 사무적일 뿐이다.

"98년 1월... "
"그럼 만 16세네요."

마침내 나는 포기가 깃든 후련한 심정으로 전말을 인정한다.

"예."

잠시 상대쪽은 말이 없다. 그래서 내가 먼저 꺼낸다.

"만 16세가 혼자 비행기 타고 호텔 체크인 하는 거 가능한가요?"

일본여행 중 혼자 식사하는 지원이
 일본여행 중 혼자 식사하는 지원이
ⓒ 최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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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내놓고 보니 이 말은 내가 아니라 상대쪽이 똑같이 할 수도 있는 말이란 생각이 든다. 마침내 답변이 돌아온다.

"비행기는 가능합니다. 호텔은 내규가 다 달라요. 만 16세가 보호자 동행 없이 체크인 가능한 호텔을 알아보겠습니다."

만 16세 딸을 홀로 해외여행 보내려는 엄마와 여행사 직원의 대화다.

고2 여름방학을 앞두고 지원이가 진지하게 말한다.

"엄마, 일본 여행하게 해주세요. 저 혼자서요." 

지원이가 다니는 고등학교와 자매결연을 맺고 있는 일본 여고생들이 봄에 왔다. 지원이와 친한 친구 집에 홈스테이를 하게 된 일본 아이는 쿠미라는 또래 아이이다. 둘의 첫 만남은 어색하기 그지없다. 서로의 언어에 서툴렀던 두 여학생은 반가움을 표현할 줄 몰라 쩔쩔맨다. 보다 못한 지원이가 첫 운을 떼 주었다고 한다.

"쿠미가 너 반갑대. 선물도 많이 준비했대."

일본어를 애니메이션과 드라마로 배운 지원이지만 신기할 정도로 실전에서도 통한다. 구글 번역기를 잡고 끙끙대고 있던 친구가 '살았다' 하는 눈빛으로 지원이를 쳐다본다. 이때부터 쿠미가 머무는 2박3일, 지원이 역시 이들과 함께 지내며 두 사람의 굿나잇 인사까지 해석해주는 통역가 역할을 한다. 이것이 인연이 되어 지원에게 일본인 친구가 생긴다. 아이들이 일본으로 돌아가고 나서도 꾸준히 연락을 하던 지원이는 큰 결심을 한다.

"가서 일본 친구들도 만나고 경험도 쌓고 싶어요."

선뜻 대답을 못하는 나에게 지원이는 말한다.

"18살에만 할 수 있는 경험 많이 쌓고 올게요. 돈 아깝단 생각 안 들게 열심히 돌아다니며 구경 많이 할게요."

어린 나이 탓에 반대에 부딪힐 판에 지원이는 18살을 내세워 당당하게 말한다. 지원이가 고등학교에서 전공하고 있는 디자인 공부에도 도움이 된다고 주장한다. 이쯤 되면 난 설득당할 준비를 한다. 왕복 비행기표와 호텔만 여행사를 통해 예약하고 나머지 5박 6일 모든 일정은 오롯이 지원이가 채운다.

방학마다 그냥 놀더니 이번에는 심각하게 고민

지원이는 방학마다 그냥 놀았다. 내가 집에서 아이의 삼시세끼를 차려주며 같이 놀아주는 엄마인 적은 한 번도 없다. 점심 때 아이가 챙겨먹을 수 있도록 밥과 반찬을 해 놓고 출근해서는 가끔 전화를 하여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으로 내 역할은 끝이다. 물론 지원이는 혼자서도 잘 노는 아이이긴 하다. 그러나 노는 것도 하루, 이틀이다. 한 달 가까이 맹탕 놀면 지루해지기 마련이어서 지원이는 방학이 다가오면 이번 방학에는 무얼 할까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다.

아이 생각에도 무언가 의미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다. 그렇다고 해서 원래 학원을 안 다니던 아이가 방학이라고 갑작스레 학원을 다니는 것도 아니다. 결국 지원이의 선택은 학원 대신 여행이다. 각종 캠프, 청소년 해외문화탐방을 다녔고 고교생이 되며 친구들끼리 국내 여행도 다녔다. 18살이 되자 드디어 지원이는 여행 종결자가 선택한다는 혼자 가는 여행을 결심한다.

지원이가 아예 학원 문턱도 안 가본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 때 살았던 산골에는 아예 학원이 없었다. 그러다 경남 진주시로 이사를 한다. 당시 살았던 동네는 '진주의 강남'으로 불릴 만큼 교육열이 높은 곳이다. 그곳에서도 지원이는 국영수를 배우기 위해  학원을 오가는 아이들 무리에 합류하지 않는다. 지원이는 자기가 학원을 다니기 위해서는 엄마가 돈을 써야 한다는 걸 아는 아이다. 그래서 다니고 싶은 학원이 있으면 엄마를 어떻게 설득할지 궁리부터 한다.

학교 근처 수영장에 한번 간 지원이는 수영 수업에 등록하면 매일 놀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지원이는 수영을 배우고 싶다고 말한다. 딸이 수영을 못해 물에 빠져 죽는 일은 없도록 하겠다고 하며. 한번은 클래식을 전공하는 음대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일본 드라마 '노다메 칸타빌레'에 푹 빠져 바이올린을 배우고 싶어 했다. 지원이는 무대에서 멋지게 바이올린을 켜는 모습을 보이겠다고 약속한다. 6개월 배운 실력으로 학교 오케스트라에 들어가서는 초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무대에 서서 결국 엄마와의 약속을 지킨다.

이런 식이니 아이들 학원비로 허리가 휘어진다는 대한민국에서 우리 집은 예외다. 그나마 특성화 고등학교에 들어가며 학교 수업만으로 자격증 취득까지 가능해지니 우리 집 가계에서 사교육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완전한 제로가 된다. 학원을 다니지 않으니 아이에게는 시간이, 내게는 돈이 남는다. 나는 아이를 위한 투자에 돈을 아끼는 무정한 엄마가 절대 아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아이가 원하는 것에, 그것도 간절히 원하는 것에 효율적으로 투자할 뿐이다. 지원이의 여행도 그 중 하나다.

지원이가 고2 여름방학 과제로 제출한 일본 고베여행기 디자인
 지원이가 고2 여름방학 과제로 제출한 일본 고베여행기 디자인
ⓒ 최경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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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일본으로 떠나는 날, 지원이는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공항으로 가는 택시를 타며 씩씩하게 손을 흔든다. 태풍으로 비행기 이륙이 8시간이나 지연되는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간사이 공항에 도착한 지원이는 혼자 캐리어를 끄는 사람들 중 자신이 가장 어린 것에 왠지 뿌듯함이 든다. 한자와 가타카나로 도배된 표지판에 잠시 당황하지만 특유의 말 붙임으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길을 물은 끝에 호텔에 도착한다. 체크인할 때 벨보이는 의아한 듯 일행의 짐은 더 없냐고 재차 묻는다.

호텔 532호. 지원이는 캐리어에서 물건을 꺼내 방을 채운다. 작은 방이 금방 지원이화 되어간다. 일본에서의 첫날, 짐을 풀자 하늘은 이미 어둑어둑해져간다. 배도 고파진다. 이쯤 되자 슬금슬금 걱정이 된다. 혼자 밥을 먹어야 하기 때문이다. 호텔 근처의 라멘 맛집도 미리 알아봐 둔 상태였지만 혼자 먹는 모습을 누군가 유심히 보면 어쩌나 싶다. 어쩔 수 없이 쑥스러움 많은 10대다. 하지만 일본까지 왔는데 뭘 못하리. 지원이는 신발끈을 동여매고 홀로 라멘집으로 향한다.

라멘집에서 26살 직장인과 바로 '말동무'

걱정한 것이 무색하게도 가게엔 혼자서 라멘을 먹는 사람이 많다. 심지어 한국인도 있다. 옆자리에서 한국어 어플을 켜는 여자를 보고 지원이는 반가운 마음에 말을 건넨다. 26살 직장인이라는 여자는 휴가를 내어 여행 왔다고 한다. 지원이가 겨우 18살이라는 것을 알고 여자는 무척이나 놀란다. 많은 것을 느끼고 싶어서 혼자 여행을 왔다는 고2의 당찬 모습에 여자는 추억에 잠긴다. 만약 학창시절로 돌아간다면 수능에 목매지 않고 지원이처럼 혼자 여행도 하였을 거라고 한다. 두 사람은 라멘집 앞에서 서로의 여행과 앞날을 응원하며 작별인사를 한다.

호텔로 돌아가는 길에 지원이는 방금 만난 여자를 생각해본다. 누군가에겐 다시 돌아가고 싶은 간절한 나이인 18살. 지원이는 학원 대신 선택한 이 여행이 새삼 소중하다. 그 여자처럼 26살이 되었을 때 돌아 본 18살의 기억이 온전히 행복한 순간이 되도록 남은 여행을 여운 없이 보내기로 한다.

5박 6일간의 기나긴 여행을 마치고 일본 친구들이 준 선물을 주렁주렁 달고 돌아온 지원이는 한 품에 안기에 벅찰 정도로 가득 채워져 있다. 18살의 여행. 나는 지원이가 그 무엇보다 가치 있는 투자를 한 것이라고 믿는다.


○ 편집ㅣ손병관 기자



태그:#해외여행, #18살, #혼자 떠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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