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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리=도광환)2013년 10월 7일 오전 발리 아요디아호텔에서 열린 한국-중국 정상회담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시진핑 국가주석이 회담에 앞서 기념촬영을 마친뒤 회담장으로 들어가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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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2일 중국을 방문해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과 만난다. 박 대통령이 취임 이후 중국을 방문하는 것은 이번이 3번째이고 시 주석과 정상회담을 하는 것은 벌써 6번째다. 아직 임기가 반이나 남은 점을 감안하면 역대 대통령의 정상회담 횟수와 비교할 때 상당히 많은 편이다. 그만큼 1992년 한중수교 이후 빠르게 발전한 양국 관계와 서로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는 지표기도 하다.
무엇보다 이번 방문은 동북아 정세를 좌우할 외교전의 시작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실제로 한국과 중국 양국의 북핵 6자회담 수석대표는 이날 중국 베이징에서 한중 정상회담에서 다뤄질 북핵 문제에 대한 입장을 조율하기도 했다. 특히 박 대통령이 중국 측의 요청에 따라 '정치적 부담'을 안고 전승절 열병식(군사 퍼레이드)에도 참석하는 만큼 한반도 문제 등에 대한 중국 측의 '성의'가 기대되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박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상당히 좋은 '꽌시(지속적으로 호의와 도움을 주고받는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뜻하는 중국 문화)'를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시 주석은 2005년 저장성 당 서기 재임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박 대통령과 처음 만났다. 박 대통령은 당시 시 주석 측의 면담 요청을 받고 원래 예정됐던 지방방문 일정을 미루고 그를 만났다.
답례는 확실했다. 시진핑 주석은 지난 2013년 3월 박 대통령의 주석 취임 축하 전화에 "(박 대통령은) 중국 국민과 나의 오랜 친구"라고 화답했고, 같은 해 6월 방중 당시 최고의 예우로 박 대통령을 맞았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주철기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지난달 31일 방중 관련 브리핑에서 "중국 측은 이번 우리 측의 행사 참석과 관련해 여러 차례 우리 정상에 대해 각별한 의전과 예우를 제공하겠다는 입장을 밝혀온 바 있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여러 면에서 주목되는 박 대통령의 방중을 앞두고 역대 대통령들의 '대(對) 중국 외교'를 돌아봤다.
[노태우-김영삼-김대중] 선린우호에서 동반자로 1992년 9월 28일, 노태우 대통령과 양상쿤(楊尙昆) 국가주석이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사상 첫 한중 정상회담을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체제에서 단절됐던 양국 관계가 복원되는 출발점이었다. 노 대통령의 북방정책과 중국의 개방정책이 맞물린 결과이기도 했다. 이보다 앞서 1990년 10월 무역대표사무소가 개설됐고 1991년 1·2차 한중 외무장관 회담, 1992년 양국 무역협정이 순차적으로 이뤄졌다. 그리고 1992년 8월 24일 양국 간 수교의정서를 교환하고 정식 수교를 맺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었다. 한국과 중국 모두 양국 수교로 타격받을 전통적인 우방국인 대만과 북한을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결국 대만은 한중 수교 이틀 전 한국과 단교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양국이 서로 문을 열자, 민간교류는 폭발적으로 확대됐다. 1980년대 후반까지 20억 달러에 못 미쳤던 한중 무역규모는 수교 이듬해인 1993년 90억 8000만 달러까지 늘어났다.
김영삼 대통령은 임기 동안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과 총 6차례 정상회담을 했다. 양국 정상이 북핵 문제를 처음 다룬 시기이기도 하다. 1993년 영변 원자로 문제로 1차 북핵 위기가 불거졌기 때문이다. 비록 북한과 미국의 담판으로 위기는 해소됐지만 양국 정상은 1994년 3월 중국에서 열린 정상회의에서 북핵 문제와 관련, 대화를 통한 해결과 긴밀한 협의, 한반도 비핵화 원칙 등을 재차 합의했다. 또 이중과세 방지협정·문화협정 등도 체결했다.
김대중 대통령은 '선린우호 관계'였던 한중 관계를 한 단계 격상시켰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11월 중국에서 열린 한중 정상회담에서 '21세기 협력동반자 관계' 선언을 발표했다. 양국 어업협정 타결·햇볕정책에 대한 중국 측 지지 확보, 군사분야 교류확대 추진 등도 성과로 꼽혔다.
2000년 6월, 한국의 중국산 마늘 관세 인상 조치에 따른 무역갈등도 촉발됐으나 '마늘협상안' 서명 등을 통해 해결했다. 또 김대중 대통령은 2001년 10월 중국을 찾아 장쩌민 주석과 정상회담을 하고 양국 관계를 '전면적인 협력 관계'로 규정했다.
[노무현-이명박] 전면적 협력 동반자에서 전략적 협력 동반자로노무현 대통령 역시 한중 관계를 한 단계 더 격상시켰다. 노 대통령은 2003년 10월 태국에서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과 한 두 번째 정상회담에서 양국 관계를 '전면적 동반자 관계'로 설정했다. 다만, 양국은 북핵 문제 해결 방법에 있어 확대 다자회담과 당사자 간 해결 원칙을 놓고 다소 입장 차를 견지했다.
경제협력은 더욱 가속화됐다. 구체적으로 ▲ 차세대 IT 협력 ▲ 생명공학 등 미래첨단기술 ▲ 중국 신규 전력산업 협력 ▲ 중국 자원 개발 협력 ▲ 베이징-상하이 고속철도 건설 협력 등 10대 협력 사업을 지정하며 양국 간 교류는 더욱 확산됐다. 중국은 2004년 한국의 최대 교역 상대국으로 부상했고 2007년 말에는 한국의 최대 수입국으로 부상됐다. 노무현 대통령은 중국과 한국, 각종 다자회의에서 후진타오 주석을 임기 동안 총 8차례나 만났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5월 중국에서 후진타오 주석과 한 정상회담에서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 선언을 내놨다. 이 역시 양국 관계를 격상시킨 것이었다. 이에 따라 양국은 군사동맹까지는 아니더라도 외교·안보·경제·사회·문화 등 전 분야를 망라해 협력을 강화하고 국제무대에서도 한반도 및 동북아 현안과 기후변화 등 전 세계적 이슈에 대한 긴밀한 협조체계를 구축하게 됐다.
이 대통령은 이후 자신의 저서 <대통령의 시간>에서 이를 중국 측의 요청이었다고 밝혔다. 당선자 시절 후진타오 주석 측이 특사를 파견해 "취임 후 일본보다 먼저 중국을 방문해달라"라고 요청하며 양국 관계를 한 단계 격상시키자는 뜻을 제안했다는 얘기였다.
이 대통령은 또 방중 직전 쓰촨성 대지진 현장 방문을 제안했고 이를 통해 후진타오 주석의 방한을 약속받을 수 있었다고도 밝혔다. 실제로 이 대통령과 후진타오 주석은 2008년 8월 25일 정상회담에서 앞서 선언한 '전략적 협력 동반자 관계'의 내실화를 위한 방안을 담은 '한중 정상 공동 성명'을 발표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는 중국과 불편한 기류가 형성된 시기이기도 하다. 이 대통령 취임 이후 북한의 2차 핵실험에 금강산 관광객 피살 사건, 천안함 사태, 연평도 포격 사건 등 남북관계를 냉각시킬 사건이 연달아 발생했다. 또 정부는 이 과정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핵확산방지구상 가입범위 확대나 한미 가치동맹 강화 등의 조치를 취하면서 중국 측의 불만을 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