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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 전 '교학사 교과서 파동'으로 사라진 줄로 알았던 국정 교과서의 망령이 스멀스멀 되살아나고 있다. 먼지만 풀풀 날리는 잿더미에다 헉헉대며 부채질하는 것 같아 보기에 딱할 지경이었는데, 무슨 재주였는지 꺼진 불씨를 다시 되살려냈다. 교육부와 여당이 총대를 멨고, 조만간 눈 가리고 귀 막은 채 단숨에 시계를 거꾸로 돌릴 모양이다.

역사 교과서가 정권의 홍보물이었던 군사독재정권 시절로의 회귀를 눈앞에 두고 있다. 명분도 없고, 논리도 허약하다는 건 많은 국민들뿐만 아니라 국정교과서 전환을 부르대는 그들조차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오죽하면 아이들의 수능 준비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궁색한 주장까지 늘어놓겠는가. 아이들의 학습 부담이 늘어날 걸 그렇게 걱정했다면, 수능 필수 과목으로 지정하지나 말지.

"망가진 레코드판도 아니고, 국정교과서 전환 문제가 얼마 전부터 뉴스에 또 나오더라고요. 이게 대통령 공약이었던가요? 아니면, 무슨 핵심 민생 과제라도 되는 모양이죠?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튀어나오니 말이에요. 지난 번 곳곳에 잘못된 서술이 드러나면서 '불명예 퇴진'한 교학사 교과서 파문 때 이미 다 정리된 걸로 알고 있었는데."

아이들 역시 다 끝난 이야기로 알고 있었다. 지난 학기 교육부가 여론을 슬쩍 떠보며 군불을 지피려 할 때 수업시간을 빌려 한두 차례 이를 주제로 치열하게 토론해본 적이 있다. 예상대로 국정교과서 전환을 찬성하던 일부 아이들의 완패였다. 시대에 뒤떨어지고 상식에 반한다는 게 당시 아이들의 결론이었다. 그때 서로 오갔던 똑같은 이야기들이 몇 개월 뒤 다시 반복되니, 지켜보는 아이들조차 황당한 거다.

"교학사로 집적거리더니 이젠 국정교과서로 몽니"

교학사의 <고교한국사> 교과서 표지.
 교학사의 <고교한국사> 교과서 표지.
ⓒ 윤근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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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토론도 뭣도 아니에요. 교학사 교과서로 한 번 집적거려 보더니, 여의치 않으니까 국정교과서 전환 주장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몽니부리겠다는 거잖아요. 아메리카 인디언들처럼 비 내릴 때까지 기우제를 지내겠다는 것도 아니고, 명분도 없고 논거마저 제시하지 못하는 저들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어요. 우리나라 교육을 책임지는 교육부가 저러고 있으니, 코미디가 따로 없네요."

한 아이는 역사교과서에 대한 정부의 이러한 '집착'을 이렇게 분석했다. '박정희를 위한 교과서'를 만들지 못해 안달이 난 것이라고. '뉴라이트'의 전성 시대였던 전임 이명박 정부 때도 이렇듯 대놓고 국정교과서로 전환하자는 이야기는 없었다는 거다. 못 먹는 감 찔러나 보는 게 아니라면, 이렇게 무리수를 두는 건 박정희 전 대통령을 빼놓고는 설명할 수 없다고 단정했다.

조금은 뜨악했지만, 웬만한 시사적인 관심 없이는 나올 수 없는 '완결된' 주장이었다. 수업시간 이따금 엉뚱한 질문을 던지며 분위기를 흐트러뜨리긴 해도, 교과서나 참고서보다 신문이나 정기 간행물을 더 열심히 찾아보는 아이다. 또래 아이답지 않게, 언젠가는 '교육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고 외치는 교사 앞에서 '정치가 교육보다 우선하다'고 당돌하게 맞받아치기도 했다.

"박근혜 정부는 박정희 정권과 '샴쌍둥이'에요.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향수가 지지기반이잖아요. 박근혜 대통령은 임기가 끝나기 전 민주주의를 무너뜨린 독재자라는 아버지에 대한 역사적 평가를 지워내는 데 공을 들일 수밖에 없어요. 지금 자신의 최측근들조차 그때 그 시절 인물들이 태반인 걸 보면, 백번 양보해도 박정희 정권의 계승자임이 너무나 명확하잖아요."

더욱이 최저 30%라는 맹목적인 지지층에다, '종북 좌파'로 낙인찍기만 하면 여론이 언제든 우호적으로 변하는 현실에서, 역사 교과서를 걸고넘어지는 건 시간의 문제일 뿐 당연한 수순이라고 덧붙였다. 만약 바람대로 '성공'한다면, 그분의 따님인 박근혜 대통령을 위한 최고의 선물이 될 테니, 교육부든 누구든 '주군'을 위해 '올인'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지 않겠느냐는 분석이다.

"이승만 포기하더라도 박정희는 살릴 것 같아요"

서울 상암동에 위치한 '박정희 기념·도서관' 모습.
 서울 상암동에 위치한 '박정희 기념·도서관' 모습.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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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똑 부러진 설명에 주위에선 '워~' 하는 감탄사가 쏟아졌고, 몇몇 아이들이 그의 주장을 이어받았다. 발언하는 아이들이나 듣는 아이들이나 당장은 수업을 공쳐 모두 신이 난 표정이었지만, 나름 다들 진지했다.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이고, 장래희망이 정치가라는 다른 한 아이는 그의 주장에 맞장구치며 국정교과서로 전환되면 '박정희를 변호하는 교과서가 될 게 100% 확실하다'며 자신의 경험을 빗대 덧붙였다.

그의 가족들은 명절 때마다 정치인들 뒷담화하다 자잘한 언쟁을 벌인다고 한다. 등 너머로 듣다 보면, 특히 대통령에 대한 호불호가 세대별로 확연히 갈린다는 걸 알게 됐단다. 대개 50대 이상은 지지하는 입장에 서고, 40대 이하는 예외 없이 비판하는 쪽이란다. 70대인 할아버지·할머니는 꼬박꼬박 호칭을 붙여 부르는 게 마치 '박(근혜)빠' 같았는데, 반대로 20대인 사촌 형과 누나는 어른들 앞에서 대통령 자격이 없다며 뻗댄단다.

"작년에도, 올해에도 늘 경기 불황 이야기로 시작되는데, 대화가 무르익다보면 어르신들은 어김없이 '박정희'를 회상하고, 젊은 사람들은 입이라도 맞춘 듯 '박근혜'를 탓하면서 언성이 높아지더라고요. 서로 '주어'가 다르니 대화가 겉돌 수밖에요. 옆에서 지켜보노라니, '박정희 세대'는 '박근혜'를 두둔할 수밖에 없는 유전자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어요."

결국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설령 임기가 끝난 후라 해도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평가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될 거라는 분석이었다. 정부의 호위무사를 자임하는 유력 언론들과, 대학입시에 도움이 된다면 모든 일에 눈 감아버리는 '개념 없는' 아이들과 학부모들까지 등에 업고, 무리를 해서라도 국정교과서 전환을 시도할 것이라 내다봤다.

그런데, 그는 막무가내로 끌고 가지는 않을 것이라고 했다. 오로지 '박정희'가 중요할 뿐, 국정이냐 검정이냐는 정작 그들의 관심 밖이라고 못 박았다. 교과서 문제가 정쟁으로 비화되면 설령 반대에 부딪쳐 좌초되더라도 '거래'를 통해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한 우호적 서술을 얻어낼 수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조차도 정쟁으로 몰아가 버린 마당에 충분히 설득력 있는 시나리오라고 자화자찬했다.

"요즘 이승만을 '까는' 다큐멘터리는 더러 나왔지만, 박정희를 다룬 작품은 쏙 들어가 버렸잖아요. 억측일 수도 있지만,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으면, '국부' 이승만을 포기해서라도 '근대화의 영웅' 박정희의 귀환만큼은 관철하려 들 것이라 확신해요. 아버지이자 아바타잖아요."

"교육은 '교'자도 모르는 사람이..."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사진은 지난 1월 8일 한국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 당시 모습.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 사진은 지난 1월 8일 한국방송기자클럽 초청 토론회 당시 모습.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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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소설을 써라'며 그의 말을 무질렀지만, 귀를 쫑긋 세우고 듣던 아이들은 판타지 소설보다 더 재미있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아이들 앞에서 '오랜만에 수준 높은 대화를 나눴다'고 농쳤더니, 내일모레면 스무 살이라면서 섭섭한 말씀하지 말란다. 그러면서 국정교과서 전환에 목매단 현 교육부 장관이 어떤 분인지 아느냐며 자문자답했다. 숫제 가르치려는 투다.

"과거 군사독재정권 시절 권력의 눈치를 보며 비굴한 판결(1981년 학림사건)을 내린 판사가 지금 이 시대의 교육부 장관이 된 거죠. 저희 아빠는 엊그제 TV 뉴스를 보시고는, 교육의 '교'자도 모르는 비겁한 판사 출신이 국정교과서 운운하는 게 웃기대요. 만약 저라면, 국정이니 검정이니 따지기 전에, 교육은 교사에게 맡기고, 역사는 역사학자들에게 맡기는 게 순리라고 주장할 것 같아요."

○ 편집ㅣ김지현 기자



태그:#국정교과서 전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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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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