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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서른넷 어느덧 벌써 30대 중반 나에겐 절대로 오지 않을 것 같았던 30대 중반 미친 듯이 일만 하며 살아온 10년이 넘는 시간 남은 것 고작 500만 원 가치의 중고차 한 대 사자마자 폭락 중인 주식계좌에 500 아니 휴짓조각 될지도 모르지 대박 or 쪽박

2년 전 남들따라 가입한 비과세 통장 하나 넘쳐나서 별 의미도 없다는 1순위 청약통장 복리 좋대서 주워듣고 복리적금통장 몇% 더 벌려고 다 넣어둬 CMA통장 손가락 빨고 한 달 냅둬도 고작 담배 한 갑 살까 말까 한 CMA통장 이자 외국에 이민 가서 살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친구놈 가끔 연락이 와 자기는 노가다 한대 노가다해도 한국 대기업 댕기는 나보다 낫대 이런 우라질레이션 평생 일해도 못 사 내 집 한 채"(자작곡 <응답하라! 30대여~> 노랫말 중)

내 나이 스무살. 다른 친구들은 대학에서 하고 싶은 공부를 하면서 낭만을 즐길 때 나는 공구 가방을 어깨에 매고 한손에는 플라스틱 의자를 든채 노포동 역사를 뛰어 다녔다. 하루종일 종착역에 들어오는 열차를 타서 IVTS를 점검하고 반대편 승강장에 내려 다시 돌아오기를 수십 번, 내 하루는 그렇게 지나갔다.

가끔 양산에 살면서 부산에 있는 대학으로 통학하던 친구들을 노포동 역사에서 만날 수 있었다. 깔끔한 면바지에 티셔츠, 책가방을 둘러매고 공부하러 다니는 그 친구들을 나는 작업복을 입은 채 꽤죄죄한 모습으로 맞아야 했다.

가끔 그런 친구들을 만나면 지금의 내가 처한 환경이 부끄럽기도 했지만 이내 곧 잘 적응했고 일에 재미를 붙여갔다. 고등학교 시절 실습으로 나갔던 공장에서 12시간씩을 멍하니 기계만 바라보고 있어야 했던 생산직보다 내 업무에 대해 주도적으로 일할 수 있는 지금이 더 적성에 맞았다. 하지만 이 행복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난생처음 신용카드를 만든지 2달만에 카드대금 체납이 되어 독촉을 받았다.
▲ 신용카드 난생처음 신용카드를 만든지 2달만에 카드대금 체납이 되어 독촉을 받았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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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사한 지 몇 달이 지났을 때부터 월급이 제때 나오지 않기 시작했다. 고작 한 달에 80만 원 남짓 들어오던 월급인데 그 마저도 없으니 막막해졌다. 문제는 카드 결제대금이었다. 이제 직장인이 됐으니 신용카드 한장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동료의 말에 신용카드를 만들어 사용한 지 두 달째였다. 카드 결제일은 다가오는데 월급은 나오지 않았고, 카드 연체 대금을 막기 위해 현금서비스를 받아 카드돌려 막기를 시작했다.

그 뒤로도 월급날은 계속 지켜지지 않았다. 월급이 나오지 않아 수중에 돈이 없으니 신용카드를 써야 했다. 그런데 결제일이 다가와도 월급은 나오지 않으니…. 또다시 돌려막기를 해야 했다. 나중에는 친하게 지내던 동료와 함께 카드 돌려막기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시간이 지날수록 돌려막기를 하는 데도 한계가 있었다. 카드 연체가 시작되니 평소엔 그렇게 친절하던 카드사 직원들도 무섭게 돌변해 하루에도 몇 번씩 대금 결제 독촉 전화가 오기 시작했다. 그 당시 내 연체대금이라고 해봐야 100만 원 남짓한 금액이었는데 한 달에 80만 원의 월급을 받던 나에게는 너무나 부담스러운 금액 이었다. 결국 그렇게 내 신용카드는 사용 중지가 되고 말았다.

돈이 없어서 신용카드로 전전긍긍 살아가고 있던 나는 신용카드 사용이 중단되면서 완전 거지꼴이 되고 말았다. 다행이 한 달 정도 고생하고 나서 밀린 월급이 나왔고, 신용카드 대금을 결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깎여버린 내 신용등급 때문에 처음 120만 원이었던 내 신용카드 한도는 50만 원까지 줄어들어버렸다.

그렇게 100만 원짜리 신용카드 대란을 겪고 나서야 나는 돈의 무서움을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마냥 내 손으로 돈을 벌어서 내가 쓰고 싶은 곳에 쓸 수 있다는 것에 좋아했었는데 이 일을 겪으면서 돈에 대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긴장하지 말고 편하게 있으라"

우리 또래 친구들에 비해 나는 이성도 늦게 알았다. 보통 내 주변 친구들의 경우 고등학교 다닐 때 이성친구와 교제를 하곤 했는데, 어릴적부터 유난히 여성 앞에서 쑥맥이었던 나는 그러지 못했다. 물론 안 사귀어 본 건 아니었다. 처음으로 좋아해서 사귀었던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그 여자친구 앞에서도 당당하지 못했다. 결국 여자친구를 다른 친구한테 뺐겨버린 일도 있었다.

그렇게 쑥맥이던 내가 스무살의 나이에 '단란주점'이라는 곳을 갔다. 어느 날 회식을 하고 2차 였는지 3차였는지 알 수 없었던 그 시각, 선배들이 막내인 우리를 데리고 간 곳은 바로 부산 온천장에 있는 허름한 단란주점이었다. 그곳에 들어서는 순간 나는 너무 무서웠다. 적응도 안될 뿐더러 밤은 늦었고 집에 가고 싶은 생각 뿐이었다. 하지만 거기서 나의 발언권은 없었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한쪽 방으로 끌려 들어갔다.

노래방처럼 생긴 방안으로 들어가니 바닥엔 빨간색 카펫이 깔려 있었고 천정엔 미러볼이 달려있었다. 난생 처음 가본 단란주점에서 긴장한 친구와 나는 한쪽 구석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하지만 함께 온 선배들은 내 집처럼 편하게 앉아 수다를 떨며 단란주점 '마담'으로 보이는 여성에게 주문을 넣었다.

그리고 잠시 뒤 맥주 한 박스와 '누나'들이 방으로 들어 왔다. 그 순간에도 나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탈출 방법은 없는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군대처럼 직각으로 앉아서 주는 술을 홀짝홀짝 받아 먹고 있었다. 그렇게 몇시간이 지났을까? 우리를 데리고 간 선배들은 술에 취한 채 의자에 기대 잠들어 버렸다. 긴장해 있던 친구와 나만 눈을 말똥 말똥하게 뜬채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누나들은 우리에게 몇 살이냐 물었고 스무 살이라고 대답하니 긴장하지 말라며 우리에게 술을 따라줬다. 그렇게 그 누나들은 선배들이 잠들었으니 좀 편하게 있으라며 우리를 위로 해주곤 밖으로 나갔다.

그 안에서 있었던 2시간은 지옥이었다. 대체 이런 곳에는 왜 오는 건지, 도무지 선배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시간은 새벽이 훌쩍 넘어 조금 있으면 동이 틀 시간인데 다음날 우리는 모두 출근을 해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결국 나는 그렇게 가고 싶었던 집에 가지 못하고 다시 노포동 사무실로 갔다. 사무실 안에 있는 2층 침대에 누워 출근시간이 되기전까지 잠시 눈을 붙일 수밖에 없었다.

어젯밤을 함께 보낸 선배들은 충혈된 눈으로 출근했고 사무실에 오자마자 컵라면에 물을 부어 먹기 바빴다. 그리고 그날 하루는 제대로 일이 될 리가 없었다. '어제 너무 많이 마셨다'며 괴로워 하는 선배들을 보며 그 선배들은 두 번 다시 그런 미련한 짓을 하지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나의 착각이었고 다음번 회식에서 그 선배들은 또 '달리자'를 외쳤다. 일전의 사건으로 인해 나는 회식을 할 때면 그 선배들에게서 멀리 떨어지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선배들의 눈치를 잘 살피는 요령을 배워가면서 '사회생활이라는 게 이런건가?' '눈치 빠른 사람이 살아 남는 거구나' 라는 걸 깨닫기 시작했다.


태그:#단란주점, #신용카드, #월급, #도우미, #돌려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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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드콘텐츠 대표 문화기획과 콘텐츠 제작을 주로 하고 있는 롯데자이언츠의 팬이자 히어로 영화 매니아, 자유로운 여행자입니다. <언제나 너일께> <보태준거 있어?> '힙합' 싱글앨범 발매 <오늘 창업했습니다> <나는 고졸사원이다> <갑상선암 투병일기> 저서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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