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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1906~1965)가 1941년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연주했다는 내용의 문건이 새롭게 발견됐다.

작곡가·지휘자였던 안익태가 당시 독일에서 '에키타이 안'이란 일본 이름으로 활동했다는 등 친일 행적 논란은 앞서도 존재했으나, 기미가요 연주 사실이 드러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관련 기사: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애국가에 감춰진 '불편한 진실').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에는 "천황의 통치시대는 천년만년 이어지리라, 작은 돌이 큰 바위가 되고, 그 바위에 이끼가 낄 때까지"라는 가사 등 천황을 찬양하는 내용이 담겨있다.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1906~1965)가 1941년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연주했다는 내용의 문건이 새롭게 발견됐다. 문건은 안익태를 오랫동안 후원했던 일본 외교관 에하라 고이치(주독 베를린 공사관 참사관)가 1952년 일본 음악잡지 <레코드 예술>에 기고한 글이다. 제목은 '안익태군의 편모(片貌: 단편적인 모습).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1906~1965)가 1941년 일본 국가인 기미가요를 연주했다는 내용의 문건이 새롭게 발견됐다. 문건은 안익태를 오랫동안 후원했던 일본 외교관 에하라 고이치(주독 베를린 공사관 참사관)가 1952년 일본 음악잡지 <레코드 예술>에 기고한 글이다. 제목은 '안익태군의 편모(片貌: 단편적인 모습).
ⓒ 이해영 교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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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건은 안익태를 오랫동안 후원했던 일본 외교관 에하라 고이치(주독 베를린 공사관 참사관)가 1952년 일본 음악잡지 <레코드 예술>에 기고한 글이다. 제목은 '안익태군의 편모(片貌: 단편적인 모습)'. 여기에는 에하라 고이치와 안익태의 첫 만남, 당시 안익태의 활동 모습, 이후 안익태가 에하라의 집에서 숙식하게 된 이유 등이 나와 있다.

기고문에 따르면 에하라는 독일-소련 전쟁이 시작되던 1941년 안익태를 처음 만난 것으로 보인다. 에하라는 "(일본 4대 명절 중 하나인) 명치절 아침, 일본 공사관 의식에 참여했다. 그곳에 기미가요 제창 때 피아노를 연주하는 청년이 있었다. 마르고 큰 키에 호감을 갖게 하는 인상이었다. 식후에 그가 당시 유럽에 유학 중인 지휘자 겸 작곡가 안익태군이라고 소개받았다"고 적었다.

에하라는 이후 안익태가 전쟁으로 인해 유학이 어려워지자, 상담을 받고자 자신을 찾아왔다고 썼다. 그는 "(안익태가) 담배도, 술도 하지 않았으며, 여성과 교제도 삼가고, 먹고 자는 것 빼고는 오로지 음악에 빠져 생활했다"며 "(안익태가) '어찌 됐든 내 집에 오면…' 하는 것이 되어, 독소전쟁이 시작되던 해부터 베를린에서 그와 함께 살게 됐다"고 적었다. 순수하게 그를 돕고자 하는 생각에서 함께 살게 됐다는 설명이다.

그러나 이를 직접 발췌 번역한 이해영 한신대 국제관계학부 교수는 이런 설명이 "동화책에나 나올 법한 얘기"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31일 오후 <오마이뉴스>와 한 통화에서 "안익태가 몇 년간 외교관(에하라)의 집에 얹혀살았다, 에하라가 아무런 의도도 없이 호의를 베풀었겠는가"라며 "에하라도 안익태의 정치적 이용 가치를 계산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 기고문에는 안익태가 ▲ 미국의 한 노은행가로부터 송금을 받았으며 ▲ 필라델피아 콩쿠르에 입선해 유럽 유학 기회를 얻었다고 쓰여있으나, 이 교수는 이런 점도 재확인이 필요하다고 짚었다. 안익태를 철저한 '민족 음악가'로 묘사한 대표적 전기 <안익태의 영광과 슬픔: 코리아 판타지(현암사, 1966)>에서도 이런 내용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이 교수는, 안익태가 1942년 9월 독일 베를린 '만주국 창립 10주년 기념 음악회'에서 자신이 작곡한 축전 음악 '만주국(만주환상곡)'을 연주하는 모습의 영상을 찾아 유튜브에 올리기도 했다. 이 교수는 "안익태가 지휘하는 동안, 앉아서 연주를 듣고 있는 청중 중 한 명이 에하라 고이치"라며 "프랑스 국립영상원(INA) 홈페이지에서 찾아 편집한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이해영 교수가 번역해서 보내온 에하라 고이치의 기고글 전문이다.

<안익태군의 편모(片貌)>

1942년(1941년의 오기로 보임) 가을, 나는 공무로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에 있었다. 명치절 아침 일본공사관 의식에 참석했다, 그곳에 기미가요 제창때 피아노를 연주하는 흰 넥타이를 맨 청년이 있었다. 마르고 키가 큰 보기에 호감을 갖게 하는 인상이었다. 식후에 T공사(당시 루마니아 주재 쓰쓰이 키요시 공사)로부터 그가 당시 유럽 유학 중인 지휘자 겸 작곡가 안익태군이라는 소개받았다. 안군은 당일 오후 연주회를 지휘하기로 되어 있다면서 나를 연주회에 초대하였다. 다행히 휴일이었고 특별히 예정된 것도 없었으며 연주회장도 내 숙소에서 코에 닿을 거리인 왕립음악당이었기 때문에 나는 흔쾌히 그 초대를 받아들였다. 

음악당은 만원이었다. 곡목은 자작곡인 월천악(에켄라쿠-일본의 대표적인 궁중아악)과 베토벤 교향곡 6번이었다. 조선에서 태어난 안군이 월천악을 교향곡화한 것에 대해 약간 기이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조선의 궁정에 다수의 아악이 보존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들보다 아악에 대해 친밀하고 깊이 있게 알고 있지 않을까 하는 등의 소박한 상상을 했지만, 특히 나로선 극동의 한 음악생도가 얼마나 큰 성공을 했는지를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웠기에, 나는 정해진 시각에 지정된 자리에 앉았다.

첫 번째 아악의 테마가 반복되는 사이 기대치 못 했던 배리에이션이 나타났고, 기교 넘치는 타악기 구사에 이르러서는 나도 모르게 '흠…'하며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 짧은 교향시는 우아한 월천악의 멜로디에 조선의 궁정악을 더하여 극적인 효과를 내며 내 가슴을 울렸다.

연주가 끝나고 내가 물품보관소 옷장에서 외투를 받아들려 하자, 검은 드레스를 입은 루마니아인 부인이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다. "오늘 음악은 어떻던가요? 저 동양의 멜로디! 그 동양의 테크닉!.." 감탄하더니, 이내 스스로 놀라며, "죄송해요. 제가 감격해서 그만… 무의식중에 지휘자와 같은 나라 사람인줄 알았어요. 근데, 정말 근사한 공연이었어요!"라며 수줍게 웃었다. "저도 오늘 처음 들었습니다만, 실로 유쾌했습니다" 라고 맞장구쳤다.

그러자 부인은 "그래요. 베토벤 연주도 물론 꽤 대단했어요. 그러나 우리는 베토벤 곡은 많이 들어봤기에, 아무래도 둔감해진 측면이 적지 않아요…. 그러나 극동의 음악은… 어떻게 이렇게나 근사할 수 있죠! 맞아요. 이렇게나 감격한 사람은 저뿐만이 아닐 거에요. 오늘 이곳에 온 모든 이들이 그럴 거예요. 정말 좋은 음악회였어요!"

문밖으로 나서자, 광장 멀리 왕궁의 지붕 끝에 남국의 석양이 남아 있었다. 넓은 포장도로를 걸으며, 마음속으로 나도 모르게 "오늘은 정말이지 경축일일세"를 연신 반복하고 있었다.

안군은 국립 동경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고학하는 사이, 필라델피아 콩쿠르에 입선하여 유럽유학의 기회를 얻었다. 유럽에서 안군은 빈에서 바인가르트너(Felix Weingartner)에게서 지휘를 지도받고, 부다페스트에서 코다이(Zoltan Kodaly)로부터 작곡을 공부했다. 유학기간이 지나간 뒤에도 미국의 어떤 노은행가로부터 송금을 받아 그럭저럭 연구를 이어나가다가, 전쟁으로 인해 송금이 불가능해졌다. 하지만 유럽에 머물며 공부를 계속하고 싶었던 안군은 나에게 상담을 받고자 찾아 왔다. 안군을 아는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그를 대성시키기를 바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으나, 우리의 작은 힘이라도 보탤 그런 좋은 지혜가 떠오르지 않았다. '어찌 되든 내 집에 오면 ....', 하는 것으로 되어, 독소전쟁이 시작되던 해부터 베를린에서 그와 함께 살게 되었다.

안군은 참으로 공부를 열심히 했다. 음악회와 오페라는 빠짐없이 참석했다. 그는 담배도, 술도 하지 않았으며, 여성과의 교제도 삼가고, 먹고 자는 것 빼고는 오로지 음악에 빠져 생활했다. 그는 닥치는 대로 작곡을 시도했다.

당시, 내가 뫼리케의 시를 번역하고 있는 것을 보고서, 그는 여기에 음을 붙여 작곡하였다. '풍주금'과 '4월의 노란나비'가 그것이다. 그리고 이를 완성하자, 우에노(일본 동경의 지명)에 살던 마리아 토르씨에게 노래를 부탁했다. '우하라 재유再遊'를 교향시로 만들고 싶다고도 말했지만, 이는 나와 함께 사는 동안에는 완성되지 못했다. 그는 본래 첼리스트였기에 첼로 독주곡 '흰백합화' 등을 자작, 자연하기도 했다.

안군은 당시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지도를 받고 있었는데, 범접하기 어려운 노대가의 환심을 산 그의 수완에 우리도 놀랐다. 하지만 그것은 수완이라기 보다 그의 천성이자 타고난 능력이라 말하는 것이 낫겠다. 그 당시 그는 중국의 멜로디를 따, 나의 작사 부분을 곡 말미 합창 부분에 넣어 한 시간 정도의 연주가 요구되는 그런 축전곡을 만들었다. 빈에서 이를 발표할 때를 비롯해, 그 밖의 안군의 연주회장에도 슈트라우스 자신이 직접 그의 연주회장에 참석해 곡의 영광된 출발을 기뻐해 주었다.

어느 날, 갑자기 근무처로 전화 벨이 울렸다. 베를린 필하모니의 매니저였다. "신인 소개 차원에서 안군에게 지휘를 맡기고 싶은데요, 안군은 어떻게 생각할까요?"라는 이야기였다. 안군의 소원이 실현될 때가 도래한 셈이었다. 며칠 전 한 모임 자리에서 이 사람이 "과거에는 돈을 내면 필하모니에서 지휘도 할 수 있었지만 현재로썬 그것도 힘들어졌어요. 회(會) 쪽에서 바로 이 사람이다! 싶은 사람에게 의뢰하는 길만이 유일하니 더욱 어려워졌죠."라는 이야기를 한 직후였기에 다소 의외였다. 안군이 때마침 부다페스트로 연주여행을 떠나 있었던 터라, 내가 있는 이곳에 연락이 온 것이기에 조속히 연락을 취해 이야기를 정리했다.

그는 베를린 외에도 함부르크, 빈, 로마, 파리, 부다페스트, 부쿠레슈티와 같은 유럽 각지에서 지휘봉을 흔들었다. 1944년에는 파리의 팔레 샤이요에서 3일간 베에토벤축제를 시도했다. 첫째 날은 티보(Jacques Thibaud)와 바이올린협주곡을, 둘째 날은 코르토(Alfred Cortot)와  황제 협주곡을, 그리고 셋째 날에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지휘하여 이를 성황리에 마쳤다. 그 후, 그는 파리에서 바르셀로나로 가서 베를린 이 함락되는 날까지 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학도와 같은 순진함, 음악에 대한 뜨거운 열정과 그 희망을 실현하고자 하는 멈추지 않은 강한 집념을 가지고 있는 그가 가는 앞에는 어떠한 장애도 그 길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렇게 그는 지금도 여전히 유럽 천지를 종횡으로 활보하고 있다.   

에하라 고이치(전 주독 외교관,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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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플러스 에디터. 여성·정치·언론·장애 분야, 목소리 작은 이들에 마음이 기웁니다. 성실히 묻고, 세심히 듣고, 정확히 쓰겠습니다. Mainly interested in stories of women, politics, media, and people with small voice. Let's find ho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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