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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정부는 연일 노동시장 구조개혁을 이뤄내자고 소리친다. 청년 실업자의 고달픈 처지와 대기업 정규직의 기득권을 대비하며, 임금피크제와 해고요건 완화로 기득권은 해소하고 다 함께 잘 살기 위한 개혁을 이루자고 한다.

정부의 말만 들으면 임금피크제를 통한 절감 비용은 청년노동자의 임금으로 사용되고, 해고요건 완화로 생긴 일자리에는 유능한 청년노동자가 채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이해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로 쉬운 계산법이다. 계산을 실행하는 데 문제가 되는 대기업 정규직이라는 걸림돌만 없다면 말이다.

이 계산법은 이번 노동개혁 국면에서만이 아니라 흔히 사용되어 온 익숙한 계산법이다. "기업이 살아야 일자리가 생긴다"는 은행 광고에서부터, 규제를 완화하고 기업이 살아나면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수사에 이르기까지 한 해도 빼놓지 않고 들어봤음직하다. 정부가 추진하려는 노동개혁 역시 임금피크제를 도입하면 기업이 살아나고, 기업이 살아나야 일자리가 늘어난다는 익숙한 틀에 근거한다.

서민 생활이 어려우니 부자와 대기업에 더 많은 소득을 보장하자는 역설적인 주장이 힘을 가졌던 것은 증대된 소득이 결국 투자로 돌아오고, 노동자와 서민의 소득을 보장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는 설명 때문이었다. 부자와 대기업의 역할은 증대된 소득을 투자로 매끄럽게 이어가면 되는 것이었고, 서민들은 부자와 대기업의 소득이 증대되는 것을 합리적으로 용인해왔다.

기업이 살아나면, 생활은 나아졌나?

"기업이 살아야 일자리가 늘고 나라가 산다"는 이야기는 티비, 신문 등 광고에서도 매일같이 나오고 있다
▲ "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기업이 살아야 일자리가 늘고 나라가 산다"는 이야기는 티비, 신문 등 광고에서도 매일같이 나오고 있다
ⓒ 기업은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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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수효과로 일컬어지는 이 계산법에 힘입어 대기업은 소득 증대를 가로막는 세금, 규제, 취업규칙, 노동조합을 경기 회복을 저지하는 주범으로 지목했다. 하지만 기업을 살리면 만사형통이라는 간단한 계산법에 숨겨진 함정은 바로 대기업 자신에 있었다. 정부가 고용규제를 완화하여 파견업종을 확대하고 해고 요건을 완화하여 정리해고를 가능하게 만들어준 지 17년이 지났다. 그렇다면 그 효과는 어디에 있는가?

설마 소득이 충분히 늘지 않아서인가? 그래서 노무현 정부에서는 무역규제를 완화하기 위해 열심히 자유무역협정을 맺었고, 공공부문이 시장 경쟁을 방해한다 하여 민영화 정책도 수행했다. 이명박 정부는 "부자감세"라는, 아예 직접적인 수단을 동원했다. 박근혜 정부 들어서는 다시 임금을 낮추고 고용을 유연화하자고 주장한다. 하지만 17년을 돌고 돌아 제자리다.

17년이라는 세월의 대가는 어떠했나? 고용규제를 완화한 결과 임금노동자의 절반인 850만 명이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 대졸 초임 연봉의 1/4이 깎여나갔다. 근로빈곤층(워킹푸어)은 400만 명이 되었다. 실질임금상승률은 1.3%에 머무르고 있다. 청년실업률은 결국 16년 만에 최대치를 기록했다.

반면 재벌은 외환위기 이후 수차례나 사상최대실적이라는 소식을 전하며 성장했다. 2000년 이후 기업소득증가율은 고도성장기에 비해 2배 수준으로 늘었다는데, 가계소득 증가율은 고도성장기의 1/4 수준으로 급락하였다.

낙수효과 계산의 오작동을 감추는 연극
역대 정권은 매번 재벌들에게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열어주었다.
▲ 역대 정권의 재벌 정책 역대 정권은 매번 재벌들에게 '기업하기 좋은 나라'를 열어주었다.
ⓒ 재벌사내유보금 환수운동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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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산법이 정작 재벌 때문에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오랜 시간 체감하였음에도 기업 집단, 특히 재벌들이 사회적 지탄을 피해가고 낙수효과라는 계산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은 정부와 재벌이 만들어낸 한 편의 드라마 덕분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재벌 총수들을 만나 2006년 출자총액제한제도 완화와 환율 절상 대책을 약속할 때 재벌은 대규모 투자와 일자리 창출을 약속했다. 이명박 정부 시절에도 민관합동회의, 재계 면담 등을 통해 규제완화와 감세정책을 대가로 투자활성화와 일자리 창출을 약속했다.

박근혜 정부 역시 청년고용대책과 노동개혁을 화두로 던지며 대기업의 협조를 당부했다. 실제로 외환위기 이후 정부는 기업이 살아야 한다며 적정유보초과소득에 대한 과세를 폐지하고 출자총액제한제도를 폐지했으며, 환율전쟁을 수행하며 수출길을 보장해주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전무했다. 노무현 정부 때는 물론이요, 이명박 정부는 재벌에 대해 "탐욕스럽고 무책임한 경영"이라는 표현을 써나갈 정도였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이 모습은 다르지 않다. 올 여름 정부가 임금피크제와 청년실업 문제를 엮어 노동개혁의 태세를 갖춘 직후인 8월 18일, 재벌들이 최대규모의 고용 창출에 나선다는 언론 보도가 잇따랐다.

하지만 그 실체는 고용디딤돌이라는 이름으로 협력사 취업을 확대하고, 인턴과 직업교육 채용 확대 등 부실하기 짝이 없었다. 낙수효과에서 재벌이 제 역할을 매끄럽게 수행하고 있는 모습을 "17년 위기시대" 내내 연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 무대를 걷어내면 경제위기의 손실은 한없이 사회화하면서, 정작 이윤은 사유화하는 재벌의 모습이 드러난다.

"재벌에게 책임을", 어떻게?

올해 하반기는 "최대규모 고용창출"과 같은 자극적인 보도에 걸맞게 외환위기 이후 다시 한 번 해고요건을 완화하고 임금을 깎고 비정규직을 양산하는 지각변동이 예정되어 있다. 정규직 일자리마저 저임금, 유연화 체제로 전환하려는 노동개혁이 이대로 추진된다면 수년 안에 노동시장의 모습은 판이하게 달라질 것이다.

이번만큼은 노동자, 서민에게만 가해지는 손실의 사회화를 막아내고 그 책임을 재벌에게 지워야 한다는 문제의식도 팽배하다. 민주노총이 하반기 투쟁에서 재벌개혁 구호를 채택하고, 각종 시민사회단체에서 재벌 문제를 의식하는 것도 정부와 재벌의 억지 연극을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 있음을 방증한다.

그러나 정부와 재벌이 같은 편에 서있는 상황에 그 연극을 멈추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기업에게 부담을 주자는 주장은 필연적으로 반발을 수반한다. 손실의 사회화-이윤의 사유화라는 모순은 감춰져 있지만, 기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주장은 17년의 세월 동안 이미 관성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손실의 사회화-이윤의 사유화라는 악순환을 끊어내고 노동개혁이라는 화살을 재벌에게 돌리기 위해서는 그만큼 과감한 대안과 시도가 필요하다.

지난 8월 18일 노동자계급정당 추진위가 주최한 사내유보금 환수운동 선포 기자회견
▲ 사내유보금 환수운동 선포 기자회견 지난 8월 18일 노동자계급정당 추진위가 주최한 사내유보금 환수운동 선포 기자회견
ⓒ 재벌사내유보금 환수운동본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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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첫 번째는 지금까지 재벌이 경제위기의 책임을 면피해오면서 쌓은 사내유보금을 환수하는 운동이다. 손실을 사회화하는 대신 재벌이 사유화한 이윤이기 때문에 사내유보금을 되찾아야 하며, 더 이상 재벌에게 면피용 책임을 물을 것이 아니라 실질적 책임을 물어야하기 때문에 어중간한 과세가 아니라 환수여야 한다. 5대 기업만 따져도 504조 원에 달하는 사내유보금은 배당과 과세로 돌아가고 축장되어있는 이윤이다.

그 형태는 다양하나, 10대 재벌의 사내유보금 중 현금성 자산에 가까운 금융자산만 260조 원에 달한다. 현대자동차그룹이 온갖 엄살은 다 부리면서 10조원을 쏟아 부어 한국전력 부지를 매입하듯 투기를 일삼아온 결과이기도 하다. 당장의 청년실업 문제, 저임금,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7년 동안 강탈당한 노동자와 서민의 몫을 되찾을 긴박함도, 재벌에게 전적으로 책임을 물어야 할 절박함도 충분하다.

두 번째는 재벌을 사회화하는 운동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당장 긴급한 사내유보금 문제를 넘어 온갖 편법과 투기를 통해서, 규제완화와 노동유연화를 몰아붙이면서 이윤을 축적해가는 재벌의 관성을 바꾸어야 한다. 이를 위한 가장 핵심적인 방책은 재벌의 운영 자체를 사회적 통제 하에 놓는 것이다. 실제로 재벌과 같은 독점자본의 관성 그 자체가 이윤을 소수의 손에 끊임없이 축적하게 만드는 사회적 낭비이며, 독점자본이 그 지위를 존속하는 것 역시 국가의 환율개입, 규제완화, 위기 시 공적자금 투입 없이는 지속 불가능하다.

이러한 사실이 명백하기 때문에 양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유럽에서 노동계급이 힘을 얻을 때 독점자본 국유화가 대중적인 요구가 될 수 있었다. 국유화 바람을 멈추기 위해 자본가들이 열심히 선전한 구호가 기업의 낭비적 행동이 소득증대로, 사회 전체의 성장으로 돌아간다는 낙수효과였다. 우리가 보고 있는 위기시대 17년의 연극 역시 영국 보수당 정부가 감세정책, 규제완화, 노동유연화 정책을 관철하며 본격적으로 개막한 것이다.

문제는 정부와 재벌이 벌이는 연극을 걷어낼 '운동'과 '투쟁'이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다는 한탄, 문제는 노동조합이 아니라 대기업에 있다는 주장이 지난 몇 년보다도 큰 공감을 얻고 있다. 그러나 단지 정부와 재벌에게 억울함을 호소하는 데 그친다면 정부와 재벌의 연극에 우는 아이 달래는 장면 하나 더 넣는 것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잘 달래고 나면 지난 17년과 같은 장면은 반복될 것이다. 이왕 재벌에게 책임을 물으려면 시급한 민생과제 해결을 위해 재벌 사내유보금을 환수하고, 나아가 재벌마저 사회화하는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정주회 시민기자는 노동자계급정당 추진위원회 학생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노동자계급정당 추진위는 2012년 무소속 김소연 선거운동본부를 함께했던 이들이 노동자계급정당 건설을 목표로 활동하는 단체입니다.



태그:#사내유보금, #환수운동, #재벌 사내유보금, #재벌 정책
댓글12

문제는 재벌이다. 사내유보금 환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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