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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20년 전 쯤 어느 화창했던 날 오후 일이다. 선배가 씩씩거리며 학보사 문을 밀치고 들어오는데 손에는 흙이며 음식찌꺼기가 잔뜩 묻은 학보 한 뭉텅이가 들려 있었다. 학생회관 앞 잔디밭에서 낮술을 먹고 있던 한 무리가 떡 하니 학보를 깔고 술판을 벌렸더랜다. 마침 학내 취재를 마치고 돌아오던 선배 눈에 딱 걸렸는데 그게 그렇게 열불이 났다고 한다.

대판 시비를 붙고는 여봐란듯이 깔려있던 학보를 싹 주워가지고 왔다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수습기자 나부랭이 눈에도 그 선배의 행동이 멋있어 보였다. 감히 우리가 피땀 흘리고 날밤을 까며 만들어낸 신문을 술자리 깔개 취급하다니 용납할 수가 없었다. 우리는 비록 대학신문을 만드는 '아마추어' 기자들이었지만, 나름의 사명감과 자존심으로 뭉친 '똘끼' 충만한 '신문쟁이'였다.

신문 만드는 일은 고달팠다. 학업과 기자를 병행해야 하는 상황에서 매주 돌아오는 원고마감과 조판은 피를 말리는 전쟁과도 같았다. 기획, 취재, 마감, 교정, 편집 디자인까지 일주일에 꼬박 이틀은 밤을 새워야했지만, 고된 조판작업을 마치고 기울이는 소주 한 잔의 맛에 취해 또 그 다음 일주일을 버텼다. 힘은 힘대로 드는데 수시로 들어오는 학교측의 원고 검열과 편집권 간섭에 맞서 싸우다 보면 체력이 방전돼 학보사 구석 낡은 소파에 나가 떨어지기 일쑤였다.

당신이 읽고 있는 이름을 가진 사람들의 체력으로 한 권의 책이 만들어졌다. 행여 책을 읽다가 오탈자나 비문이 많다거나 더 나아가 책이 생각보다 시선이 싱거웠다면, 전화나 메일로 연락해 판권장 속 만든 사람의 이름을 불러 보라. 물론 판권장 속 이름들이 그러한 연락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그러니 너무 자주는 말고. 자주 하면 체력이 떨어질 수도 있으니.(52쪽)

이 책을 보니 새록새록 옛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학보사 건너편 방에서 교지를 만들던 후배 녀석은 출판 기획자가 되어 아예 책 만드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다. 프로들의 세계에 비할 바는 못되겠지만, 대학 4년 동안의 학보사 기자 경험에 비춰봤을 때 출판 노동이 그야말로 '쌩 노가다'라는 것쯤은 알고 있다. <출판, 노동, 목소리>는 '이상한 책의 나라'에서 '쌩 노가다'를 하며 살고 있는 앨리스들의 이야기다.

'이상한 책의 나라'에 사는 앨리스들

 <출판, 노동, 목소리> 표지
ⓒ 숨쉬는 책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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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마케터, 북디자이너 등 덤덤하게 자기 이야기를 풀어놓은 11명의 출판 노동자들은 각기 나름의 '성장통'을 겪고 있다. 어떤 가치를 좇아 입문했든 생업의 필요성 때문에 선택했든지 간에, 시작은 달랐을지 모르지만 그들은 공통으로 '노동'이라는 두 글자 앞에서 울고 웃으며 매일을 살아내고 있었다.

사실 '출판 노동자'라는 말은 그다지 익숙한 단어가 아니다. 책은 한 권의 책으로 탄생하기까지 투여된 모든 노동의 집합체다. 하지만 출판과 노동을 쉽게 연결짓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출판 노동자들의 목소리가 홀대되고 그들의 처지에 무관심하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상대적으로 언론 노동자들은 잘 조직된 노동조합을 통해 파업같은 단체행동권 행사도 가능한 노동자로 인식되고 있지 않나. 당사자들이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고 시끌시끌하게 해야 세상은 귀를 기울여준다. 이 책의 의미는 이런 것 같다. 이들의 진솔한 고백은 우리 사회도 이제 출판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라는 걸 말해주고 있다.

한편, 출판을 단순히 책이라는 상품을 찍어내는 행위 정도로 여기는 것도 그 의미를 다 담아내지 못한다. 책을 만드는 행위란 분명하게도 만드는 이가 추구하는 세계관이나 가치를 전달하려는 의도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출판을 '노동권'이 아닌 '사회혁신'이나 '사회운동'의 연장선에서 접근하려는 시도는 출판에 내재된 숭고한 사명과는 무관하게 '가치'를 앞세워 '노동'을 소외시키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연출하기도 한다. 출판의 숙명과도 같은 이 '딜레마'를 극복하는 키워드도 '노동'에 있지 않을까.

책을 만드는 일을 예술로 보는지 노동으로 보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또 그걸 경계 짓는 일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가 우리의 일을 노동의 인식하는지, 우리 스스로를 노동자로 생각하는지는 우리 삶의 질을 결정하는 중요한 지점이 되는 듯하다. 일을 하면서 '이게 아닌데' 하고 느끼거나 회의가 들었을 때, 나 자신이 일로 인한 자존감을 찾지 못하고 헤맸던 때를 떠올려 보면 대부분 너무 많은 일에 치이거나, 의미없이 일하고 있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나는 잘하고 있는 걸까? 지금 잘 살고 있는 걸까? 하는 불안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이수정 프리랜서 북 디자이너, 74쪽)

출판이라는 문화예술 산업에 대한 허영과 실질적인 경영 사이의 괴리. 결국, 그 출판사들 대부분의 노사 문제는 그 괴리를 인정하지 않거나 위장해서 터진 문제였을 테다. 대부분 처음 사건보다는 그 대응 방식이 더 큰 문제였다. 말도 안 되는 현학적 변명을 나열한 뒤 결국은 사원과 노동조합원의 근무 태도를 지적하는, 뻔하고 역겨운 인문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의 성명서와 대응 방식 말이다. 그것은 어쩌면 그들의 진심이었는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적 성장을 하면서도 인문의 옷을 입은 채 그 품위를 유지하고픈 그 속물적 허영 말이다. 그런데 책에 대한 그러한 마음은 스스로에게 잘 인지되지도 인정되지도 않는다. 그리고 그 허영은 책 만드는 사람 모두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정우진 프리랜서 편집자, 117~118쪽)

이제 그들의 '노동'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

출판 노동자들은 하나같이 '노동자'로서의 목소리가 정당하게 수용되고 대접받는 출판 환경을 바라고 있다. 그들은 '좋은 사회'를 위해 책을 만들면서 정작 책을 만드는 회사의 비상식적인 모습에 절망한다. 비교적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출판계에 근로계약서도 쓰지 않은 노동자, 비정규직, 임시계약직 노동자들이 넘쳐난다.

편집자 황현주는 출판계에 노동조합이 보편화되지 못한 것, 좋은 책을 만들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들의 노동에 대한 이중적 태도, 자신의 노동환경에 대한 무지 등 출판과 노동의 괴리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지(173쪽) 의문을 던진다. 어쩌면 출판계에 '노동자성'이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은 '책'이라는 결과물에 모든 것이 수렴되어버리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책을 내는 과정의 일들이 책이라는 결과물이 나오는 순간 지나간 추억이 되고 다음 책을 기획하는 장정이 다시 시작된다.

편집자 정유민은 "책에 강요된 숭고한 자세를 버리자 머리가 가벼워지고 오히려 모든 문제들이 담백해졌다"(129쪽)고 고백한다. 과도하게 짊어지고 있던 사명의 무게를 내려놓고 노동자라는 정체성을 분명히 하자 오히려 책을 만들어야 하는 이유도 더 단단해졌다는 것이다.

그는 출판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담은 <뫼비우스의 띠지>라는 팟캐스트 방송을 내보내고 있다. 정유민은 "출판 노동자들의 고백이 바깥으로 나오자 '책을 만든다'는 그럴싸한 그림에 가려졌던 출판 '노동자'들이 여기 저기서 저요, 저요라고 손을 들었다"며 "사장이나 대표를 비롯한 경영진, 관리자 말고 동료와 동료들이 손을 맞잡고 마음을 나누기 시작한 것"(132쪽)이라고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출판 노동권의 회복을 위해 독자들의 역할은 무엇일까 생각했다. 먹거리에 관심을 갖다보면 더 좋은 것, 더 안전한 것을 찾게 되고 자연스럽게 그 먹거리가 만들어져 유통되는 과정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책도 마찬가지 아닐까. 책의 생명력은 본디 일방성이 아니라 상호성에 기반을 둔다.

작가는 글을 쓰면 되고 출판사는 책을 찍어내지만, 책은 독자에 의해 읽혀졌을 때 비로소 온전한 생명력을 획득한다. 결과물 뿐만 아니라 책이 생산되고 유통되는 과정에 독자들이 조금만 더 관심을 갖는다면 출판 노동자와 독자들 사이에도 소통할 수 있는 폭이 더 생기지 않을까.

○ 편집ㅣ최은경 기자

덧붙이는 글 | <출판, 노동, 목소리>(고아영, 김신식, 양현범, 이수정, 이용석, 장미경, 정우진, 정유민, 진영수, 최진규, 황현주, 강준선, 양선화 지음 / 숨쉬는 책공장 펴냄 / 2015. 07.)
이 기사는 이민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yes24.com/xfile340)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출판, 노동, 목소리 - 지금껏 보이지 않았던 11인의 출판노동 이야기

고아영 외 10인 지음, 숨쉬는책공장(2015)


태그:#출판 노동자, #출판사, #출판 기획자, #북 디자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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