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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마토쿠 화폐를 구입하고 근처 가맹점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해결했다. 우리나라와 비교했을 때 결코 비싸지 않은 가격이었다. 1시 경 히타카츠를 떠나 동쪽에 있는 39번 지방도를 탔다. 도로 양쪽에는 높은 삼나무가 곧고 길게 솟아 있어 햇빛을 막아주었다. 더운 날씨임에도 자전거로 달리는 우리에겐 시원한 바람이 불어왔다.

섬 거의가 산악지대인지라 언덕이 자주 나왔다. 하지만 별로 높지 않아 오르막과 내리막을 번갈아 타며 자전거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었다. 도로는 왕복 2차선으로 좀 좁아 보였으나 다니는 차가 별로 없어 자전거 타기에는 아주 좋았다. 터널이 자주 나왔으나 대체로 입구에서 출구가 보일 정도로 짧았고 터널에 들어가면 시원함을 느낄 수 있었다.

조선통신사 이예 조선인 포로를 데려오다

 길 양쪽에 키 큰 삼나무가 빼곡
 길 양쪽에 키 큰 삼나무가 빼곡
ⓒ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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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타카츠에서 45킬로미터 정도 가니 사카(佐賀)라는 마을이 보였다. 이 마을은 1408년부터 78년간 대마도 영주인 소오씨(宗氏)가 살았던 곳이다. 마을 안 길가에 엔츠지(円通寺)라는 절이 나왔는데 절 옆에는 무덤을 뜻하는 비들이 즐비하게 놓여있었다.

소오씨 일가의 묘로 소오씨는 오랫동안 대마도를 지배한 집안이며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의 신정부로부터 백작을 수여 받았다고 한다. 이 절의 본존불상인 동조약사여래좌상은 고려 후기에 제작된 것이며 범종은 조선초기의 작품으로 본다.

절 앞에는 통신사 이예 공적비(通信士李藝功績碑)가 세워져 있고 누군가 바친 꽃다발이 놓여있었다. 이예(1373~1445)는 학성(鶴城) 이씨의 시조로 조선 전기 때 통신사였다. 조선에서 일본에 파견한 30건의 공식 외교에 6번이나 정사와 부사로 참여하여 일본에 가장 많이 왕래한 조선 제일의 외교관이라 적혀 있다.

또한 일본과 유구(현 오키나와) 그리고 대마도에 40여회나 파견되어 667명이나 되는 조선인 포로를 데려왔으며 일본인의 조선 입국 허가와 관련한 제도 등 조선과 일본의 문화교류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라 적혀 있다. 특히 대마도와 조선의 교역 조건을 규정한 계해약조 체결에 큰 공헌을 세워 대마도에 평화로운 시대가 찾아오게 하였다고 한다. 2005년 11월에 이 비를 설립했다.

일본과 러시아 대립의 산물 만제키 운하

 1996년 완공된 대마도 관광의 명소 만제키 다리
 1996년 완공된 대마도 관광의 명소 만제키 다리
ⓒ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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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카에서 23킬로미터 쯤 더 가니 두 섬을 연결하는 대마도의 명물 만제키 다리가 나왔다. 빨간 색의 아치형으로 주변의 녹색과 대비를 이루어 눈에 아주 잘 띄었다. 대마도는 본래 하나의 섬이었다. 서쪽의 아소 만과 동쪽의 미우라 만을 갈라놓는 육지의 폭이 매우 좁아 1672년 이를 뚫고 처음으로 수로를 개통해 배를 양쪽으로 다니게 했고 다리를 건설했다.

대마도가 나가사키 현에 편입되고 일본과 러시아가 대립하면서 대마도는 군사적으로 요새화 되었고, 그 결과 일제는 1900년 군함이 다닐 수 있도록 수로의 좁은 부분을 넓혀 운하를 만들었다. 운하의 개통으로 일본은 규수에서 만제키 운하를 거쳐 대한해협에 이르는 최단 거리의 항로를 확보했다.

아소만의 복잡한 리아시스식 해안에서 세계의 관심을 끌지 않으면서 일본의 함대가 전열을 가다듬은 결과 일본은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대마도로 유인해 쉽게 격파할 수 있었다고 한다. 1956년에는 자동차의 운행이 가능하도록 철교를 만들었다. 만제키 운하의 개통으로 북쪽은 상대마(上對馬), 남쪽은 하대마(下對馬)로 불린다. 현재의 이 다리는 1996년 완공한 것으로 오늘날 대마도 관광의 명소가 되었다.

일본말 몰라도 오케이!

여기서 오늘의 목적지인 이즈하라까지는 약 20킬로미터를 더 가야 했다. 시간은 예상보다 길어져 날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이즈하라에 다가갈수록 차량은 많아졌다. 처음으로 출구가 안 보이는 긴 터널이 나왔는데 그 길이가 1.2킬로미터에 달했다. 다행히 자전거가 안전하게 주행할 수 있는 갓길이 터널 안에 놓여 있어 안전하게 나올 수 있었다.

우리 중 누구도 일본말을 조금이라도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지만 지도를 보여주며 물어물어 오늘 예약한 숙소인 세산지(西山寺)를 찾았다. 저녁 7시에 도착했으니 85킬로미터를 6시간 걸려 온 셈이다. 절은 조금 언덕 위에 있다. 들어가니 젊은 승려가 나온다. 짧은 영어로 대화를 나누니 말이 통했다.

건물이 온통 나무로 이루어져 있어 나무 냄새가 은은히 나는 것이 기분을 상쾌하게 한다. 나무 계단을 따라 3층으로 올라가니 2인 1실의 방이 단 3개만 있다. 내부는 너무도 깨끗하고 창밖으로는 정원과 바다가 보이며 전망이 아주 좋았다. 아침을 포함해 1인당 8700엔으로 매우 비싼 숙소였으나 그 값을 하는 것 같다.

대마도와 한반도의 역사적 관계

 조선통신사 이예의 공적비가 있는 원통사
 조선통신사 이예의 공적비가 있는 원통사
ⓒ 이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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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와 일본 사이에 있어서 대마도는 옛날부터 석기문화와 청동기문화, 그리고 벼농사, 불교, 한자 등을 한반도에서 일본에 전해주는 창구 역할을 했다. 그러한 교류로 인해 대마도에는 한국식의 유적과 역사·문화적 흔적이 아직도 많이 남아 있다. 이러한 역사적 향수로 인해 많은 한국인이 대마도를 찾는 것 같다.

서기 663년. 멸망한 백제의 요청에 일본군 2만7천여 명이 출병한다. 그러나 금강하구(백촌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 패하면서 철수했다.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대마도에 군인을 주둔시키고 아소 만에 백제식 산성을 쌓았으니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산성으로 알려진 가네다(金田) 성이다.

12세기 후반에서 13세기에 걸쳐서는 고려와 일본 사이에 외교 관례의 형식을 갖춘 진봉(進奉) 관계가 이루어져 매년 두 척의 진봉선을 파견하는 형식으로 무역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1274년과 1281년에는 고려와 몽고의 연합군이 몽고의 조공 요청을 거부한 일본을 침략하면서 진봉선 무역은 종료되었다. 이에 교역 창구를 잃은 대마도는 왜구로 변해 노략질을 일삼기 시작했다.

왜구는 1233년에서 1392년 사이에 자그마치 529번이나 한반도를 침략했으며 14세기 이후에는 고려 내륙과 요동반도까지 쳐들어 왔다. 그러자 1389년 고려의 박위가 대마도를 토벌했다. 조선시대에도 여러 차례 대마도에 대한 정벌이 이루어졌고 1419년 세종 1년에는 이종무가 대마도를 정벌했다.

1420년 대마도는 조선의 속주가 될 것을 요청해 대마도를 경상도에 예속시키고 대마도주에게 구리로 만든 도장을 내렸다. 이에 대마도주는 조선으로 입국하려는 일본사람에게 문인(文引, 도항허가서)을 발행하여 조선무역을 독점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은 부산포, 염포, 제포에서만 대마도와 거래할 수 있게 했고 왜인에게 벼슬을 주기도 했다.

159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출병을 선언하면서 히데요시 부하의 딸을 대마도주와 결혼시켜 대마도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에서 조선 침략의 길잡이 역할을 하였다. 이에 조선은 대마도와의 무역을 끊었다. 그러나 1607년 일본과 국교를 회복하면서 1609년 대마도 무역은 다시 이루어졌다.

대마도는 에도(현 도쿄)까지 가는 통신사의 왕복을 모두 관장하는 등 조선의 대일본 외교 창구 역할을 하였다. 조선 후기 일본의 메이지 시대에는 일본군 경비대와 요새가 대마도에 들어섰다. 일본 막부에서 대마도를 정치적·행정적으로 편입함에도 조선은 여전히 대마도를 조선의 울타리로 인식하였으나 1910년 한일병탄이 되면서 대마도를 완전히 잃게 된다.

덧붙이는 글 | <참고도서>
대마도의 진실, 한문희·손승호, 푸른길, 2015
대마도 여행 가는 길, 안준희, 연두m&b, 2015
대마도 역사를 따라 걷다, 이훈, 역사공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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