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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 <킬링필드>의 한장면
 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 <킬링필드>의 한장면
ⓒ Bophana audiovisual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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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산부인과 의사입니다. 그런데도 7개월 만에 아이를 조산한 아내를 도와줄 수가 없었어요. 수술도구 없이 맨손으로도 뭔가 할 수도 있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어요. 당장 제왕절개수술이 필요했지만, 그들이 내가 의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면 그들은 분명 나와 아내 그리고 아이 모두를 그 자리에서 죽였을 거예요."


'캄보디아판 홀로코스트'로도 불렸던 1970년대 크메르 루주 정권 시절에 살아남은 한 생존자가 미국 TV 토크쇼에 출연해 밝힌 내용이다. 1980년대 중반 무렵 오래된 아날로그 TV화면 속에 등장, 검은 뿔테 안경을 쓴 채 크메르 루주의 만행을 담담하게, 때론 격정적으로 털어놓은 그의 이름은 헤잉 응오르(Haing S. Ngor). 대부분 그의 이름이 매우 낯설겠지만, 거장 롤랑 조페 감독이 1984년에 만든 영화 <킬링필드>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영화 주인공이었던 그의 얼굴을 어렴풋이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 외곽 다케오주(州)의 유복한 환경에서 자란 그는 의학공부를 마치고 수도 프놈펜에서 산부인과 의사의 삶을 살던 엘리트였다. 그러던 1975년 4월 어느 날, 그는 유리창 밖을 통해 AK소총으로 무장한 공산 게릴라들이 수도를 함락하는 광경을 목격한다. 미국이 물러갔다며 시민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크메르 루주군을 반기는 장면도 보게 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운명에 불운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예감은 불행하게도 적중했다. 미국의 공습을 피한다는 명분으로 폴폿 정권은 수도 함락 3일 만에 도시 소개령을 내렸고, 수백만 명에 이르는 도시인들이 강제로 시골 노동수용소로 끌려갔다. 그 역시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던 아내와 함께 그곳으로 보내졌다.

산부인과 의사라는 사실을 숨겨야 했던 남자

악명 높은 킬링 필드 시대의 서막이 시작된 것이다. 그곳에서 그는 차마 기억하고 싶지 않은 참혹한 도륙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게 된다. 임신한 여성이 제대로 먹지 못해 맨 땅에 쓰러져 죽자, 야생 들개들이 덤벼들어 시신을 갈기갈기 찢는 처참한 광경부터 크메르 루주군이 한 여성의 젖가슴을 도려내는 잔혹한 장면까지 접하게 된다. 굶주림에 지쳐 먹을 것을 훔치다 걸린 자들이 하룻밤 사이에 처형되거나 끌려가 돌아오지 못하는 모습도 숱하게 봤다.

그 역시 배가 고파 집 근처에 자란 야채를 가져갔다가 10살 남짓한 감시원의 제보로 걸려 흠씬 두드려 맞은 후 며칠 밤 동안 망고나무 아래 손발이 묶인 채 있기도 했다. 이듬해 임신한 아내가 "먹을 것이 있으면 아무것이라도 달라"고 애걸했지만, 그는 아무것도 갖다 줄 수 없었다.

그는 한때 벤츠를 몰 만큼 부유했고, 대도시에서 잘나가는 산부인과 의사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과거와 직업마저도 철저히 숨겨야 했다. 의사, 대학교수 등 소위 지식층으로 분류된 사람들은 이유를 막론하고 모두 그 자리에서 처참하게 살해됐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의 과거를 숨기기 위해 외국어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시력이 나빴지만, 안경조차 쓰지 않았다. 심지어 그는 임신한 아내가 조산을 해 위험에 처했을 때도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결국 그의 아내는 그를 원망하며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는 핏덩어리나 다름없는 자신의 첫아이와 아내를 혼자 땅에 묻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후 그는 이성을 상실했다. 삶에 대한 집착과 미련도 버렸다. 그 후로는 살기 위해서가 아닌, 죽기 위해서 뭐든 훔쳐 먹으며 미치광이처럼 변해갔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베트남군의 포성이 점점 더 가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크메르 루주 시대가 끝나가는 소리였다. 

베트남과의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른 무렵, 그는 극적으로 수용소를 탈출했다. 그리고 태국 국경을 향해 무작정 도망쳤다. 하지만 그 과정 역시 쉽지 않았다. 오솔길과 풀숲에는 엄청난 양의 대인지뢰들이 매설되어 있었다. 일부는 크메르 루주군이, 나머지는 태국군이 설치한 것이었다. 처음 출발할 때는 200여 명이 넘었지만, 태국 국경에 무사히 도착한 사람들은 17명 정도에 불과했다. 결국 그는 난민캠프가 있는 태국국경지대에 극적으로 도착했다. 그의 실제 탈출과정과 루트는 영화 <킬링필드> 촬영 당시에도 많이 반영됐다.

LA 차이나타운에 울려퍼진 총성

 태국국경 캄보디아 난민캠프에서 자원봉사활동하던 당시 모습.
 태국국경 캄보디아 난민캠프에서 자원봉사활동하던 당시 모습.
ⓒ Dr. Haing S. Ngor Arch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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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민캠프에 도착한 그는 의사로서 부상당한 난민들을 도왔다. 그리고 살아남은 여자 조카와 그 이듬해인 1980년 미국으로 건너갔다. 그는 그 곳에서 더 이상 의사로서 일을 하지 않았다. 죽은 아내를 그리워한 탓인지 재혼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1984년, 우연찮게 그에게 영화 출연의 기회가 찾아왔다. 인생의 전환점이 된 <킬링필드>였다. 그는 이 영화에서 프놈펜 함락 당시 서양기자들의 목숨을 구한 실제인물 캄보디아 기자 딧 프란 역을 맡았다. 개봉 첫해 영화는 흥행에 성공을 거두었고, 그는 아카데미 영화제에서 조연상까지 거머쥐는 영광을 얻었다.

연기 경력이 전무한 아마추어 배우가 전 세계적 권위와 명성을 자랑하는 영화제에서 연기상을 수상한 사실은 당시로선 매우 충격이었다. 더욱이 백인이 아닌 아시아인에 대한 편견이 여전히 존재했던 서구영화제에서의 수상은 그 자체로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그 역시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이 상을 받을 줄을 몰랐다고 밝혔다.

그는 이 영화 한편으로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이후에도 여러 편의 영화를 찍으며, 배우로서 또 다른 새 삶을 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것이 과거의 자신의 삶과의 완전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는 운명의 신이 자신에게 남겨준 삶과 시간을 보다 가치 있는 곳에 쓰기로 결심하고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그는 그동안 번 돈을 모아 자신이 지내던 태국 국경 난민캠프로 다시 날아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캄보디아 난민들을 돕는 일을 시작했다. 다시 미국에 돌아와서는 전국 네트워크 방송에 출연하거나, 신문 언론매체들과의 인터뷰를 통해 크메르 루주의 잔혹상과 전쟁의 비참함을 국제사회에 알리고, 이를 상기시키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캄보디아 난민을 돕기 위한 자선행사들을 열었고, 비행기를 타고 미국 전역은 물론 전 세계를 돌며 특강도 했다. 그는 캄보디아 난민들을 돕기 위한 기금활동과 더불어 자신의 이름을 딴 재단을 건립하고, 전쟁이 끝난 1990년대에는 고국 캄보디아로 돌아가 학교를 짓고 가난한 사람들이 생계를 이어갈 수 있도록 목재소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삶은 계속 순탄하게 흘러가지 않았다. 그의 이런 행동을 몹시 불편해하는 세력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1979년 전쟁에서 진 후 정글 속으로 들어간 크메르 루주 잔존세력들이 그들이다. 그렇게 시간은 흘로 영화 <킬링필드>가 나온 지 12년이 되던 1996년 2월 어느 날 밤. 미국 LA 차이나타운 그의 집 앞 주차장에서 총성이 울렸다. 정체 모를 괴한들의 습격을 받은 한 남자는 그 자리에서 숨을 거뒀다. 헤잉 응오르, 그였다.

2년 후 범인들이 잡혔는데, 차이나타운 거리에서 활동하던 갱 조직원 3명이었다. 이들은 법정에서 단순히 금품을 털기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진술했지만, 그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은 여전히 가시지 않았다. 사망 당시 그의 주머니에는 무려 2900달러가 있었는데,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의문스러운 정황은 이뿐만 아니었다. 갱들은 '금 목걸이를 달라고 협박했지만 거부해 총을 쐈다'고 진술했지만, 그의 금목걸이는 당시 셔츠에 가려져 있어서 겉으로 보이지 않았다. 담당검사도 바로 그 점을 추궁했지만, 피의자들은 끝내 명쾌한 대답을 내놓지 못했다.

결국, 배우 헤잉 응오르의 살해에 가담한 갱단원 3명은 미국 LA 법정에서 열린 판결에서 각각 종신형과 56년형, 26년형을 선고받아 재판은 일단락됐다. 그들이 판결을 받은 날짜는 공교롭게도 킬링필드의 주역 폴 폿이 사망한 1998년 4월 16일이었다. 그 후로 11년이 지난 2009년 열린 유엔 크메르루주전범재판(ECCC)에서 악명 높은 수용소 S21 교도소장 카엥 구엑 이에우(별명 두잇)는 폴 폿이 헹 응오르의 암살을 지시했다고 증언했다. 그러나 이미 미국 법정에서 크메르 루주가 암살에 개입했다는 증거를 밝혀내지 못한 채 그의 살인사건이 종결된 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은 크메르 루주 잔당이나 그 동조세력들이 갱단원을 시켜 그를 암살했을 것이란 믿음을 갖고 있다. 중국계 미국인 영화감독 아서 동(Arthur Dong)씨도 바로 그런 사람들 중 한 명이다. 그는 배우 헤잉 옹오르의 삶과 죽음을 포함한 일대기를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 <헹 응오르의 킬링필드(원제: The Killing fields of Haing S. Ngor)>를 제작한 영화감독이자 작가다.

"그의 이름이 아주 오랫동안 기억되길 바란다"

 프놈펜 보파나 시청각 센터(Bophana Audoivisual Resource Center)에서 지난 26일(현지시각) 가진 미디어 초청 시사회를 겸한 워크샵에 참석한 영화감독 아서 동(Arthur Dong)이 헹 옹오르의 지난 삶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모습.
 프놈펜 보파나 시청각 센터(Bophana Audoivisual Resource Center)에서 지난 26일(현지시각) 가진 미디어 초청 시사회를 겸한 워크샵에 참석한 영화감독 아서 동(Arthur Dong)이 헹 옹오르의 지난 삶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모습.
ⓒ 박정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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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최근 자신의 다큐멘터리 시사회와 강연을 위해 캄보디아 프놈펜을 방문했다. 프놈펜 보파나 시청각 센터에서는 지난달 26일 현지 영화전문가들과 미디어 매체 관계자들을 초청한 가운데 시사회를 겸한 워크숍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아서 동 감독은 크메르 루주가 직접 암살에 개입했다는 증거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 아직까지는 추론에 불과하다고 전제한 뒤, 그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을 파헤치기 위한 노력이 더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26일과 28일 각각 시내 멀티플렉스 상영관과 보파나 시청각 센터에서 시사회를 겸해 열린 워크숍에는 미국대사관 외교관들도 일부 참석했다. 캄보디아 양민 학살의 또 다른 책임을 갖고 있는 미국이 이 다큐를 후원했다는 사실은 놀랍다. 당시 북베트남 공산세력을 섬멸한다는 명분으로 캄보디아 국경지대에 엄청난 폭탄을 쏟아 부어 최소 30만~40만 명 이상의 무고한 캄보디아 민간인들의 목숨을 앗아간 나라가 바로 미국이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미국도 킬링필드의 단초를 제공하는 데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그 때문에 많은 역사학자들은 크메르 루주 전범재판이 공정한 역사의 심판이 되기 위해서는 200만 명을 학살한 크메르 루주 전범들뿐 아니라, 미국 닉슨 전 대통령과 지금까지도 생존해있는 당시 국무장관 헨리 키신저도 함께 법정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날 워크숍에 참석한 펜실베이니아 출신 전직 기자라 밝힌 한 60대 남성은 "나는 미국인으로서 이 점에 대해 정말 부끄럽게 생각한다"고 말해 장내를 잠시 숙연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 다큐멘터리 역시 서구의 시각으로 만들어진 영화 <킬링필드>가 가진 스펙트럼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게 사실이다. 이날 워크숍에 참석한 캄보디아인 현지 기자 역시 그 점을 지적했다. 이에 대해 아서 동 감독 역시 전적으로 동감한다며, 미국뿐만 아니라 중국과 주변국들도 당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개인의 삶을 조명하는 데 치우쳐 폭 넓게 담아내지 못한 점에 대해서 본인 스스로도 유감이라며, 다음과 같은 말로 워크숍을 마무리했다. 

"크메르 루주 생존자이자 의사이자, 배우였던 헤잉 응오르의 삶을 통해 나는 캄보디아의 아픈 역사를 알리고자 노력했다. 과거의 아픔을 알지 못하거나 기억하지 못하는 전후세대들에게는 그의 개인적인 삶에 대해서도 말하고 싶었다. 물론, 그의 죽음을 파헤치고 진실을 파헤치는 것 역시 우리에게 남겨진 숙제다. 이번 작품을 통해 그의 영화도, 그가 일군 업적, 그의 이름이 아주 오랫동안 기억되길 바란다. 우리 모두의 가슴속에..."

○ 편집ㅣ최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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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프라자 뉴스 편집인 겸 재외동포신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