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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쓰는 말은 나를 낳은 어버이가 물려준 말입니다. 우리가 쓰는 말은 우리를 저마다 낳은 다 다른 어버이가 다 다른 우리한테 물려준 말입니다. 그래서, 고장마다 말이 달라 '고장말'이 있습니다. 커다란 고장에는 작은 고을이 있으니, 작은 고을에서는 '고을말'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을은 작은 마을이 모여서 이루어지니, '마을말'이 있습니다. 마을에서도 집집마다 다 다른 삶이기에, 다 다른 '집말'이 있습니다. 내가 쓰는 말은 바로 '집말'이 바탕입니다.

내가 태어난 집에서 어머니와 아버지가 쓰는 말,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쓰는 말, 언니가 쓰는 말, 이러한 집말이 맨 밑바탕입니다. 이 밑바탕인 집말에 마을말이 스며듭니다. 집말과 마을말이 어우러진 자리에 고을말이 깃듭니다. 집말과 마을말과 고을말이 어우러지는 곳에 고장말이 찾아들지요. 마지막으로 '한 나라에서 표준으로 삼는 말'이 '내가 쓰는 말'에 젖어듭니다.

인간의 기본구조에 속하는 모든 요소는 앞서 주어진 것이다. 인간이 그것을 취하여 사용하기 이전인 태초부터 이미 인간을 위해 마련되어 있었다 … 인간이 말을 시작하기 이전부터 언어는 인간 속에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인간은 처음부터 말을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16쪽)

말을 담는 글에는, 글을 쓰는 우리 마음이 깃듭니다. 곧, 글을 쓰는 사람은 말을 할 때와 똑같이 마음을 나눕니다.
 말을 담는 글에는, 글을 쓰는 우리 마음이 깃듭니다. 곧, 글을 쓰는 사람은 말을 할 때와 똑같이 마음을 나눕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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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앞서까지 사람들은 그저 '말'을 했습니다. 얼마 앞서까지 사람들은 제 보금자리나 마을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제 보금자리나 마을을 떠났을까요? 요즈막에는 '더 나은 사회 환경이나 교육 환경이나 문화 환경'을 따져서 보금자리나 마을을 떠납니다. 1970∼80년대는 새마을운동 바람이 모질게 불어서 보금자리나 마을을 떠나도록 부추겼습니다. 1960∼70년대에는 산업화와 공업화를 내세우는 경제발전 정책이 보금자리나 마을을 떠나도록 내몰았어요. 1950년대에는 전쟁이 보금자리와 마을을 떠나도록 떠밀었지요. 1800년대 끝무렵부터 1940년대까지는 일본 제국주의 군홧발이 휘두르는 식민지 정책이 보금자리와 마을을 떠나도록 들볶았어요.

사람들이 제 보금자리와 마을을 떠나야 하는 때부터 말이 흔들립니다. 사람들이 먼먼 옛날부터 손수 집을 짓고 마을을 가꾸며 살림을 지을 적에는 모든 곳에서 '제삶짓기(자급자족)'를 했습니다. 가까이 1980년대 무렵까지도 깊은 두멧시골 작은 마을 사람들은 굳이 면소재지나 읍내에 볼일을 보러 다니지도 않으면서 언제나 손수 지은 흙에서 손수 거두는 밥을 먹었어요. 기껏해야 호박알을 내다 팔아 고무신 한 켤레쯤 장만했을 테지요. 닭 한 마리 내다 팔아 손자한테 초코파이를 사 주었을 테지요(영화 <집으로>에 나오듯이).

의사소통을 위한 최소한의 필요를 충족시키는 선에서 그치고 마는 인공언어는 인간을 최소한의 세계, 축약된 세계로 이끌게 되며 그로 인해 인간 자체를 최소한의, 축약된 존재로 만들어 버린다. (27쪽)

겉그림
 겉그림
ⓒ 봄날의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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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스 피카르트 님이 빚은 이야기책 <인간과 말>(봄날의책, 2013)을 읽으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사람하고 말이 어떻게 이어지는가 하는 대목을 곰곰이 돌아보면서 빚은 이야기가 흐르는 책입니다. 사람이 지은 말이 삶을 빚고, 말은 새롭게 사람을 가꾸며, 다시 태어나는 사람은 말을 새삼스레 빚으며, 새삼스레 태어난 말은 더욱 눈부시게 삶을 가꾸는 얼거리가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차근차근 짚는 <인간과 말>입니다.

한국에서 국어학자는 어원 연구도 하고 문법 연구도 합니다. 그런데 몇 가지 낱말을 놓고 말밑(어원)을 살피거나 밝힌다 한들 거의 모두 덧없기 마련입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국어학자는 거의 다 '옛책에 남은 글'을 바탕으로 말밑을 살피기 때문입니다.

아직 어느 국어학자도 '말'이라는 말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못 밝힙니다. '밥'이나 '집'이나 '옷'이라는 말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아무도 못 밝힙니다. '해'와 '하얗다'를 같이 놓고 살핀다 한들, '하얗다'를 누가 언제부터 썼는지 아무도 알지 못해요. '먹다'라든지 '보다'라는 낱말을 언제부터 누가 썼을까요? 쑥은 왜 '쑥'이고, 마늘은 왜 '마늘'일까요? 감나무는 왜 '감'이고, 배나무는 왜 '배'일까요? '일'이나 '노래'는 무엇이며, '두레'나 '나락'은 무엇일까요? '씨앗'이나 '꽃'이나 '풀'이나 '나무'는 그야말로 언제부터 누가 지어서 썼을까요?

소리가 정신에 복무하는 것에 대한 보상인 양, 정신은 소리에게 정신처럼 자유로울 수 있는 권리를 선사한다. 그로 인하여 소리는 소리 이상의 것이 된다. 즉 소리는 음악이 될 수가 있다. (60∼61쪽)

한국에서는 한국사람이 쓰는 말을 놓고 여러 가지 이름을 붙이곤 합니다. 이른바 개화기라고 하는 때까지는 그저 '말'이라고만 했습니다. 이 땅에 사람이 처음 나타나서 삶을 지을 무렵부터 1800년대 끝무렵까지는 그냥 '말'이었습니다. '우리말(또는 우리 말)'이라고 하는 이름은 왜 태어났을까요? 이 땅에 아프고 슬픈 발자국이 있기 때문입니다. 총칼을 앞세운 제국주의 권력 때문에 모질게 아프고 더없이 괴롭도록 슬픈 나날을 보내던 이 나라 사람들은 '우리 삶(이 나라)'을 지키고자 '우리말'을 외쳤습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쓰던 말을 되찾고 일본말을 몰아내고자 독립운동을 하며 '우리말'이라는 이름이 태어납니다.

그런데 목숨을 바치는 독립운동은 아주 오랫동안 펼쳐야 했고, 이동안 아주 많은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일본 한자말이나 일본 말투에 젖어들었어요. 해방이 되었어도 제 말을 제대로 찾은 사람이 몹시 드뭅니다. 이리하여 '토박이말'을 찾자는 물결이 일어납니다. 나라도 되찾았는데 왜 말을 되찾지 못하느냐고 하는 몸부림이라고 할 만합니다.

게다가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주의 권력자는 '국어'라는 말을 바보스레 퍼뜨렸어요. 중국에서는 '중국말(중국어)'이었고, 조선(아직 한국이 아닌 조선)에서는 '조선말(조선어)'으며, 일본에서는 '일본말(일본어)'이었는데, 일본 제국주의 권력자는 '아시아는 이제 천황 폐하를 섬기는 나라가 되어야 하고, 천황 폐하를 섬기는 백성(국민)은, 천황 폐하를 받드는 말(국어)'을 쓰도록 교육칙어라는 것을 내리지요.

'국어'는 '국민'이 쓰는 말이에요. '국민'은 바로 '천황폐하를 섬기는 나라에서 사는 사람'이고, '국어'도 바로 이러한 얼거리입니다. 그래서 '국민학교'라는 이름을 '초등학교'로 바꾸자고 하는 물결이 일었고, 이 물결은 '민주가 아니었던 정부'하고 오랫동안 싸운 끝에 비로소 학교 이름에서는 '국민'을 몰아냈습니다. 다만, 학교 이름은 '초등학교'가 되었어도, 아직까지 정치꾼들은 '국민 여러분'을 외칩니다. 신문사 가운데에도 '국민'을 이름으로 쓰는 곳이 아직 있지요. 다들 한겨레 발자국을 너무 모르거나 아예 생각을 안 하니 이런 '말'을 아무렇지 않게 씁니다.

언어가 단순한 상징이라면, 인간에게 미래란 존재하지 않는다. (82쪽)

함께 글을 쓰는 놀이를 하면서, 마음을 여는 새로운 길을 연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함께 글을 쓰는 놀이를 하면서, 마음을 여는 새로운 길을 연다고 할 수 있습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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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는 그런 급격함을 원하지 않는다. 정신의 변화 속도와 언어의 표현 능력 사이의 괴리가 너무나 커서 언어는 감히 변화를 따라갈 엄두를 내지 못한다. 커다란 변화가 일어날 때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말없는 비명이나 침묵뿐이다. (134쪽)



막스 피카르트 님은 <인간과 말>이라는 책에서 스물한 가지 갈래를 지어서 '사람과 말 사이에 얽힌 수수께끼'를 천천히 풉니다. 갈래는 스물한 가지로 지었으나, 첫 갈래부터 마지막 갈래에 이르기까지 모두 '같은 이야기'입니다. 조금씩 말투를 바꾸었을 뿐, 한결같이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수수께끼를 풀어냅니다.

막스 피카르트 님은 우리 마음속에 '말'이 없다면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 '사랑'이 없다면 아무 사랑도 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마지막으로, 우리 마음속에 '시(노래)'가 없다면 아무 시(노래)도 부를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스도가 사물의 이름을 부르면서 사물은 상승하였고, 저절로 시적인 존재가 되었다. 아이의 영혼은 그림으로 충만하다. 그래서 아이의 영혼은 수줍어한다. (207쪽)

모든 말은 우리 마음속에 있습니다. 왜 그러할까요? 모든 말이 우리 마음속에 있지 않다면, 우리는 모든 말을 몽땅 처음부터 새로 배워야 합니다.

누구나 아기로 태어나서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말을 새롭게 배우니, 언뜻 보자면 '모든 말을 몽땅 처음부터 새로 배운다'는 대목이 맞다고 여길 수 있겠지요. 그러나, 어떤 아기도 '모든 말을 몽땅 처음부터 새로 배우'지 않습니다. 언뜻 보기에는 어머니와 아버지가 이르는 대로 말을 하나씩 배우는 듯하지만, 아기 마음속에 '그 말이 있'기 때문에 비로소 아기는 '그 말을 압'니다. '그 말'이 마음속에 없는 아기는 끝끝내 말을 못 배웁니다.

어른 사이에서도 이와 같아요. 사람들이 서로 '의사소통'을 한다고 하지만, 정작 서로 '들려주는 말'을 못 알아듣기 일쑤입니다. 낱말만 떼어놓고 보자면, '모두 아는 낱말'일 테지만, 다 아는 낱말을 엮은 '말'을 주고받는 '의사소통'을 하는데 두 사람은 아주 엉뚱한 생각을 합니다. 다른 뜻을 헤아려요. 아주 쉬운 말을 나누었다고 하지만, 서로 엉뚱하게 생각한 나머지, 그만 다툼이 생겨요. '의사소통'만 생각하는 말은 으레 '시시비비'가 붙고 '토론'이 붙다가 그만 '싸움박질'로까지 나아가요.

무슨 소리인가 하면, '그 말'이 서로서로 마음속에 없으면, '지식으로는 안다고 여기는 낱말'이 있어도, '그 말이 들려주려는 뜻'을 서로서로 알 수 없다는 소리입니다. 서로서로 '그 말'이 마음속에 있을 때에는 말없이 빙그레 웃으면서 한마음이 되지만, '그 말'이 마음속에 없을 때에는 천 마디나 만 마디 말을 주고받아도 그저 마음만 다치면서 틈이 벌어지고 싸울 뿐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람은 말을 의사소통을 하려는 뜻으로만 쓸 수 없어요. 의사소통만 해야 한다면 이진법 기호나 숫자만 쓰면 되겠지요. 사람이 '말'을 하는 까닭은 의사소통만 하려는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처음부터 마음속에 품은 말'을 새롭게 가꾸거나 빚으면서 주고받으려고 하는 까닭은 '삶을 새롭게 지어서' 하루를 누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한국사람으로서 애먼 일본 말투나 일본 한자말을 털어낸다든지, 지식자랑처럼 영어를 함부로 쓰지 말자고 한다면, 이렇게 말하는 까닭은 '더 나은 의사소통' 때문이 아니라, '우리 마음을 스스로 제대로 그려서 기쁨을 함께 나누는 삶'으로 나아가고 싶기 때문입니다.

시인은 모든 말을 매번 원천으로부터 새로이 퍼올려야 한다. 그래서 시인은 신의 흔적에 가까이 있다. 원초적 말에는 신의 흔적이 더욱 선명하므로, 그것이 시인이 얻는 은총이다. (225쪽)

'말'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글'이란, 마음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하는 셈이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말'을 눈으로 볼 수 있는 '글'이란, 마음도 눈으로 볼 수 있도록 하는 셈이 아닌가 하고 느낍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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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한국사람한테는 '한국말'이 있습니다. 우리말도 국어도 토박이말도 아닌 '한국말'이 있습니다. 한국 사회에는 이주노동자나 '이주며느리'가 무척 많습니다. 이주노동자나 이주며느리는 한국사람일까요 아닐까요? 한국사람이지요. 한국말은 무엇일까요? '한 가지 핏줄기 한겨레'만 쓰는 한국말이 아니라, 이 땅에서 함께 살며 서로 아끼는 사람들이 쓰는 한국말입니다.

한때 '토박이말 찾기 바람'이 불었으나, 이 바람은 이내 가라앉았습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토박이말'에서 '토박이'는 '한자 + 한국말' 얼거리인데, '土'는 "흙"이에요. '토박이'란 '흙박이'입니다. 흙박이란 무엇일까요? 바로 '시골박이'입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면서 가꾸고 흙을 먹는 삶을 짓는 사람이 쓰는 말이 '시골박이말'이고 '흙박이말'이며 '토박이말'입니다. 그러니까, '시골말'이자 '흙말'을 두고 '토박이말'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토박이말 찾기 바람'을 일으킨 분들은 시골에서 흙을 만지며 살지 않았어요. '토박이말 찾기 바람'은 시골이 아닌 도시에서만 불었어요. 마땅한 노릇인데, 시골사람은 그저 예부터 시골말을 썼으니 이런 바람이 불 까닭이 없었어요. 도시에서만 신문과 방송과 책과 학교에서 '토박이말 찾기 바람'이 불었고, 도시에서도 사무직이나 전문직으로 일하는 사람이 이 바람을 일으켰지요.

흙이나 시골을 모르거나 등진 채 지식으로만 '깨끗한 토박이말을 찾아서 쓰자'고 하니, 이러한 시골말(흙말)은 다른 이웃인 도시사람한테는 너무 어렵습니다. 마치 외국말처럼 모두 새로 외워야 하는 말이 되었어요. 시골(흙)하고 동떨어진 사람들이 지식논쟁으로만 '토박이말 찾기'를 따지는 일은 너무 부질없기 때문에, 이 바람은 얼마 못 가서 어영부영 잠들었어요.

언어는 언어를 말하는 당사자의 의지를 넘어서 그 이상을 창출한다. (19쪽)

나는 시골에서 곁님이랑 아이들하고 살면서 말을 가만히 돌아봅니다. 오늘은 시골에서 살지만, 나를 낳은 어버이는 도시에서 나를 낳았습니다. 나는 서른 살까지 도시에서 살았고, 서른을 넘은 뒤부터 차츰 시골에서 일하고 지내다가 아예 시골에 눌러앉았습니다. 내가 쓰는 말은 아직 '시골말(흙말)'이 아닙니다. '도시말 티를 조금씩 걷어내는 시골말'로 나아갑니다.

시골에서 아이들이 마음껏 뛰놀도록 하면서 아이들하고 '말을 섞는' 동안, 아이들이 어버이한테서 어떤 말을 배우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아이들은 언제나 '사랑말'을 배우려 합니다. 어버이가 아이를 따스하게 아끼면서 보살피려고 하는 말을 기쁘게 웃으면서 배운 뒤, 새롭게 노래하면서 온몸으로 익히려고 해요. 이 모든 모습을 즐겁게 바라보다가 한 가지를 새삼스레 알아차립니다. 사람은 이 지구별에서 다 다른 겨레나 나라를 이루면서 태어납니다. 다 다른 겨레나 나라는 다 다른 말을 씁니다. 어느 겨레나 나라에서도 시골에서 흙을 만지며 제삶짓기(자급자족)를 하던 사람들은 책이나 글이나 학교 없이 어머니가 아이한테 말을 가르쳤습니다. 온누리 모든 어머니는 바로 이녘 마음결이 책과 글이 되었습니다.

어떤 어머니도 아이한테 어원이나 문법을 안 가르칩니다. 어떤 어머니도 아이한테 그저 말을 가르칩니다. 그러니까, 아이는 어머니한테서 어원이나 문법이 아닌 '말'만 배우는데, 이 말은 언제나 '사랑말'이요 '꿈말'이며 '기쁨말'인데다가 '노래말(노랫말)'입니다.

인간은 앞서 주어진 사랑으로 사랑을 한다. 그는 사랑하기 이전에 사랑을 받는다. 하지만 모든 "앞선" 것과 "나중" 것은 사랑 안에서 나란히 있다. (38쪽)

아이와 함께 글쓰기를 하거나 글놀이를 하다 보면, 그야말로 새롭게 터지는 '말결'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숨결인가 하고 놀라면서 마음이 움직입니다. 사랑을 담은 말이요 글이라면 언제나 마음을 움직이겠지요.
 아이와 함께 글쓰기를 하거나 글놀이를 하다 보면, 그야말로 새롭게 터지는 '말결'이란 얼마나 아름다운 숨결인가 하고 놀라면서 마음이 움직입니다. 사랑을 담은 말이요 글이라면 언제나 마음을 움직이겠지요.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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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가 아이한테 물려주는 말은, 어머니가 아이한테 물리는 젖이 '어머니젖'이듯이 '어머니말'입니다. 그리고 온누리 모든 겨레와 나라는 저마다 다른 '숲'을 이루면서 '숲'을 가꾸고 돌보아요. 제삶짓기를 하는 사람들은 들도 일구지만, 들만 일구지 않고 숲에 깃들어 작은 보금자리와 작은 마을을 사랑하면서 살지요.

지구별 모든 사람들은 전쟁무기 아닌 평화와 사랑으로 아주 오랫동안 삶을 지었습니다. 오직 평화와 사랑으로 삶을 지은 어머니와 아버지는 아이가 태어나서 자랄 곳이 '숲'이어야 하는 줄 몸과 마음으로 압니다. 그러니까, 이 지구별에서 다 다른 겨레와 나라는 '다 다르면서 새로운 숲말'을 쓴 셈입니다. 한국사람은 한국에서 한국다운 '숲말'을 쓰고, 일본사람은 일본에서 일본다운 '숲말'을 쓰지요.

숲말을 물려주거나 물려받는 어버이와 아이는 책이나 글이 없어도 됩니다. 아니, 숲말을 배울 적에는 책이 덧없지요. 오직 삶으로 배우는 숲말입니다. 밥짓기와 옷짓기와 집짓기는 책으로 안 배워요. 언제나 삶으로만 배웁니다. 사랑을 책으로 배우는 사람은 없어요. 꿈을 책으로 배울 수 없어요. 모두 삶으로 배웁니다.

삶으로 배우는 숲말이니, 어원이나 문법을 따질 까닭이 없으면서도, 온누리 모든 것을 누구나 다 알면서 서로 아끼고 돌보는 사랑이 흐르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넘칩니다. 지식이 아닌 삶일 때에 비로소 '말다운 말'이요, 어원이나 문법을 내려놓고서 '어머니가 아기한테 가르치는 말'일 때에 비로소 '사람말'입니다. 숲에서 사랑을 짓는 삶으로 나누는 말이기에 '사람이 쓰는 말'인 사람말이에요.

인공언어를 사용해서는 진리를 말하는 것이 불가능해 보인다. 단지 진술을 할 뿐이다. (29쪽)

아이들한테 '말' 때문에 자격시험을 치르도록 하지 않기를 빌어요. 영어 능력 점수나 한자 능력 점수를 왜 따야 할까요? 어른도 아이도 '말'을 말답게 해야 할 뿐입니다. 한국말을 누가 더 잘 하느냐를 따지는 '한국말 자격(능력) 시험' 따위가 생긴다면, 그야말로 끔찍합니다. 그저 서로 사랑하면서 말을 나누면 될 뿐입니다. 아니, 오직 서로 사랑하면서 말을 나누어야 할 뿐입니다.

영어도 한문(한자가 아닌 한문, 또는 중국말)도 일본말도 새롭게 배워서, 새로운 이웃하고 사귀는 징검다리가 되도록 할 때에 아름답습니다. 억지스레 지식이나 시사상식 따위로 아이들 머릿속에 쑤셔넣지는 말아야 합니다. 아이들은 '우리말 달인'이나 '한자 달인' 따위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영어 박사'나 '영어 천재'가 되어야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사랑스레 삶을 지으면서 서로 아끼는 따뜻하고 넉넉한 사람으로서 말을 아름답게 쓰는 넋'이면 됩니다. 어른도 아이와 함께 '삶을 온통 기쁨으로 노래하고 춤추는 꿈을 물려주는 숨결'이면 돼요.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글쓴이 누리사랑방(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

책이름 : 인간과 말
막스 피카르트 글
배수아 옮김
봄날의책 펴냄, 2013.6.24.
13000원



인간과 말

막스 피카르트 지음, 배수아 옮김, 봄날의책(2013)


태그:#인간과 말, #막스 피카르트, #말넋, #삶넋, #한국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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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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