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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새롭게 소개하는 인물은 중세 초기 기독교 철학의 선두주자입니다. 그의 이름은 아우구스티누스 기독교 내에서는 어거스틴이라고 불리기도 합니다. 앞으로는 기독교 철학자들이 주로 등장하니까 알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일단 그의 생애부터 살펴보겠습니다. 그의 생애를 가장 쉽게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은 고백록이라는 책입니다. 그는 354년 오늘날의 알제리에 해당하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인 북아프리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파트리키우스는 이교도였으나, 어머니 모니카는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어머니 모니카가 아우구스티누스를 교육했으나 어렸을 때 세례를 받지는 않았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향과 인근 도시 마다우로스 혹은 마다우라(Madaura)에서 초등교육을 받은 후, 카르타고에서 공부를 하려 했지만 어려운 집안 형편으로 잠시 학업을 중단하기도 했습니다. 370년 집안의 사정이 나아지자 아버지는 16살의 아우구스티누스에게 수사학을 배우고 가르치기 위해 카르타고로 유학 보냅니다.

어머니 모니카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자기와 같은 그리스도교인 이 되기를 원했지만, 당시 철학에 심취해 있던 그는 마니교의 이성적이고 체계적인 교리에 매력을 느껴 마니교도로서 10여 년을 머무르기도 하는 등, 마니교를 지지하여 실질적으로 기독교를 거부합니다.

또, 이 시기(371년) 열입곱 살에 그는 한 젊은 여성과 동거생활을 시작하여 14년 동안 같이 살면서 아데오다투스(신으로부터 주어진)라는 아들을 낳기도 합니다. 이 아들은 389년 어린 나이에 죽을 때까지 아버지 품에 살았습니다. 이러한 아들의 행동을 받아들일 수 없던 어머니 모니카는 아들과 절교를 선언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곧 마니교 지도자들의 지적 수준이 그다지 높지 않다는 것을 알고 회의를 느껴 잠시 신플라톤주의자가 되었다가, 마니교도 동료의 추천으로 타가스테, 카르타고, 로마, 밀라노 등에서 수사학과 철학을 가르칩니다.

그러다가 밀라노의 주교인 성 암브로시우스를 만납니다. 암브로시우스 주교는 아우구스티누스와 같이, 수사학이나 철학에도 능한 언변의 달인이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강론을 듣고 큰 감동을 받아 그를 따르기로 결심했습니다. 한동안 심한 내적 갈등을 겪은 끝에 아우구스티누스는 결국 386년 여름, 부활주일 날에 암브로시우스에게 세례를 받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의 <로마서>를 읽게 된 사건이 회심의 계기라는 주장도 있다. 그것은 그가 밀라노의 한 정원에서 "집어 읽으라"는 어린 아이의 노랫소리를 듣고, 로마서 13장 13절~14절을 읽고, 그리스도인이 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후 아우구스티누스는 세례를 받고 낙향하여 북아프리카로 돌아와 수도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가 고향에 도착하기 전 그의 어머니와 아들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나지만, 고향에 돌아온 아우구스티누스는 동료들과 스스로 수도회를 설립하는 등 수도사 생활에 전념합니다.

391년 북아프리카의 도시 히포 레기우스에서 발레리우스 주교에 의해 사제로 서품 받은 후 아우구스티누스는 과거 자기가 몸 담았던 마니교를 비판하는 등 많은 설교 활동도 했으며, 인간의 도덕적 완성을 주장하는 펠라기우스주의에 대해서도 단호히 반대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의 공로보다 하느님의 은총을 강조하였으며, 특히 은총론, 신학적 인식론, 교회론, 영성신학 등의 분야에서 많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그의 입장은 중세 초기부터 은총론을 둘러싼 신학 논쟁에서 아우구스티누스주의자들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395년 발레리우스 주교가 노쇠하자 그의 공동주교로 선출되어 4년 동안 주교를 보좌하다가, 이듬해 그가 죽자 이집트 히포 교구의 주교가 되어 평생 동안 히포 교회와 북아프리카 교회를 위해 사역하였습니다.

427년 반달족이 북아프리카를 쳐들어왔을 때, 피난민들이 전쟁을 피해 아우구스티누스 주교가 살고 있던 히포에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주교였으므로 안전한 곳으로 찾아가거나, 교회에 은둔할 수도 있었지만, 기꺼이 피난민들을 위해 봉사했습니다.

결국 아우구스티누스 주교는 430년, 반달족이 히포를 점령하기 얼마 전 피난민들을 돌보다가 걸린 열병으로 76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합니다.

생애는 이 정도로 살펴보겠습니다. 세부분으로 나누는데 기독교인 이전의 삶, 기독교인으로서의 삶, 그리고 기독교가 공인되고 난 뒤 이단과 싸우는 삶으로 구분해 볼 수 있습니다.

일단 그의 사상의 진행 방법을 살펴보겠습니다. 그는 자신의 의지로 기독교를 거부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기독교로 돌아왔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돌아오기 위한 방법을 그는 어떠한 신적인 도움, 기도나 환상 같은 것이 아니라 이성으로 하나님을 찾으려고 합니다.

일단 먼저, 신앙을 가져야 하는데 가질 때는 그냥 가지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 작업으로 그것이 맞고 틀린지를 알아봐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신앙을 가질 때 이 신앙은 완전한 신앙이 아닙니다. 이 신앙도 확실하게 맞고 틀린지를 이성적으로 검사를 해봐야 한다고 합니다. 이성적 확증을 한 다음의 영혼과 생명이 무엇인지 생각하면서, 감각적 인식과 이성적 인식의 조화를 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저희가 기독교 하면 무조건 비이성적으로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아우구스티누스는 그렇게 믿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성을 사용해서 그것에 대한 잘못된 점이 없다고 판단이 섰을 때 믿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이성적 작업을 그는 의지라고 말하고 이 의지는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즉, 사랑하면 의지를 하려고 하는데 그 의지는 신을 향해야 하고 신을 향한 의지가 우리를 믿음의 길로 이끈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그가 궁극적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의 의지 자체가 신의 은총이라고 말하지요.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와는 상반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신의 대한 이성적 탐구가 신에 대한 사랑과 맞물리면 결국은 신의 은혜로 신에게 갈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렇게 가면서 그는 신국론을 펼칩니다. 이 책의 원래 이름은 신의 나라, 이교도와의 대결입니다.

이 책은 전반부 10권은 지상의 나라를 후반부 12권은 신의 나라로 묘사하고 있는데요, 목적은 신의 나라를 소개하는 것도 있지만 고트족에 의한 로마 함락을 기회로 분출한 기독교에 대한 비난에 대응하여 이 책을 저술했습니다.

신의 나라에서 유출된 이 땅의 나라를 비교하는 것은 플로티노스가 주장했던 이데아와 유출개념과 딱 맞는 것입니다. 이데아가 있는데 그 이데아에서 유출된 것들이 이데아를 증명한다는 것을 그대로 차용해서 이 세상의 나라들이 있는 것은 하나님나라가 있기 때문이라고 아우구스티누스는 주장합니다.

조금 생각해 봐야 하는 문제는 아우구스티누스가 플라톤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지만, 개인적으로 플라톤의 사상보다는 플로티노스, 신플라톤주의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옳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그의 이성적 작업은 끝나지 않습니다. 일단 그가 몸담았던 마니교와 한판 붙습니다. 일단 마니교가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태초의 '신'이 있었는데, 그 신이 구원을 약속했습니다.

구원의 약속을 아담이 들었고, 아브라함이 신에게 구원을 약속 받습니다. 그 구원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예언자들이 지상에 내려오게 되는데, 그 예언자들이 예수, 부처, 조로아스터 등인 것입니다. 그 구원의 약속을 마지막으로 전한 최후의 예언자가 바로 '마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의 사상은 특별한 종교에서만 즉, 유대교나 기독교만 구원이 있는 것이 모든 이들이 구원을 받을 수 있는데, 구원을 받는 방법은 더러운 육체에 속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영혼을 가다듬고 사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영혼이 이번 생애 다듬어지지 않았다면 다음 생을 기약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이 마니교의 특집입니다.

이 주장을 플라톤 사상에 빠져있던 젊은 아우구스티누스가 받아들였지만, 기독교로 회심한 아우구스티누스는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는 다음 생은 일단 없고 자신의 영혼을 가다듬는 것도 중요하지만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예수그리스도의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마니교는 결국 이단이라고 해서 아우구스티누스가 배척합니다.

두 번째 논쟁은 펠라기우스와의 자유의지 논쟁입니다. 펠라기우스는 354년에 브리타니아에서 태어난 기독교 수도사입니다. 4세기 말에 로마에 와서 법률을 배운 듯하며 이어 수도생활에 들어갔습니다. 금욕적 생활태도, 도덕적 엄격성 때문에 대단한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는 인간의 자유의지와 노력을 강조하고, 구원에 있어서 은총의 의의를 부정하였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그를 비난합니다. 자유의지로 구원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다고 주장합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배경은 이 둘의 생애와도 관련이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신이 자유의지로 향락에 빠져서 살았던 시절이 있었기 때문에 자유의지로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이고, 펠라기우스는 자신의 자유의지로 절제하고, 하나님에게 열심을 냈던 것이기 때문에 자유의지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다시 돌아와 아우구스티누스는 결국은 자신의 주장을 밀고 나가면서 펠라기우스를 이단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생애와 사상이 이렇게나 관련이 있다는 것이 정말로 놀라운 일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가 살았던 시기는 기독교가 공인받았던 시기이고, 기독교가 공인을 받으면서 이단과 물리치면서 기독교의 기초를 세우던 시기였습니다. 오늘 살펴봤던 아우구스티누스 단어로 한 번 더 정리하고 방송을 마치겠습니다.

중세시대, 기독교, 고백록, 신플라톤주의, 이데아, 유출, 사랑, 마니교, 자유의지입니다. 너무나 많지만 정말로 중요한 내용들만 정리한 것이니까 부족한 것은 다음 주에 보충하도록 하겠습니다. 한주 동안 건강하시고 다음시간에 다른 인물로 찾아뵙도록 하겠습니다.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덧붙이는 글 | 팟캐스트, 팟빵에서 방송하는 '철학인물사' 아우구스티누스편을 기사로 만든 것입니다.



태그:#철학, #인물, #아우구스티누스, #어거스틴, #철학인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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