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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어느 가을날이었다. 대학원을 다니면서 연구조교로 일하던 학과 사무실에 낯선 중년 남자가 들어왔다. 양복 차림을 한 사내는 근엄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넨 뒤 얄따란 책자 하나를 건네주었다. 1950~1960년대 대표 잡지였던 <사상계>(1953년 4월 창간, 1970년 5월 종간) 영인본 목록표였다.

책 한 질값이 거의 20여만 원이었다. 백만 원이 채 안 되는 월급을 받는 연구조교로서는 선뜻 구입하기 힘들게 하는 액수였다. 잠깐의 고심 끝에 '질렀다'. "대학원에서 인문학 공부를 한다면 이 정도 자료는 구비하고 있어야죠"라는 사내의 말에 고개를 끄덕거린 결과였다. <사상계>는 당대 '지성'의 상징이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 20여만 원을 주고 그 이미지를 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2000년 교직에 입문했다. 이른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하루 일정이 정신없이 돌아가는 인문계 고교였다. <사상계>는커녕 교과서와 전공 서적 하나 제대로 볼 겨를이 많지 않았다. 고전 보는 재미에 살짝 빠져 한 권에 3~4만 원 하는 두툼한 양장본을 구해 하루에 몇 장씩 읽는 게 당시 책 읽기의 거의 전부였다.

고전 양장본을 구해 읽는 '호사스런' 독서보다 나를 '자랑스럽게' 만든 책 읽기 목록이 하나 있긴 했다. 계간 문학지 <창작과 비평>(아래 <창비>)이었다. 한 계절에 한 번씩 나오니 시간에 쫓기듯 읽지 않아도 됐다. 그즈음 <창비>는 <사상계> 못지않은 강한 아우라와 '상징 자본' 아래에 있었다. 모든 글을 낱낱이 읽지 않아도 늘 기분이 뿌듯했다. 그때 나는 '창비빠'였다.

'꼰대리즘', '표절 옹호' 실망스러운 창비

신경숙 작가
 신경숙 작가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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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엔가 2010년 즈음에 <창비> 정기구독을 끊었다. 평소 책을 많이 읽지 않은 탓일까. 매 권 제대로 읽지 않고 남겨두는 글들이 갈수록 많아졌다. 세상 사람들의 목소리와 동떨어진 듯한 시와 소설들, 요령부득의 내용을 길게 풀어놓은 평론들이 선뜻 와 닿지 않았다. <창비>에서 '꼰대리즘'이 느껴졌다.

<사상계>나 <창비>가 고작 내 지적 허세나 채워줄 정도로 어떤 '이미지'만으로 이루어진 잡지들이 아님은 물론이다. 어두운 시대의 한복판을 뜨겁게 내달리다 장렬하게 '전사'한 <사상계>는 살아생전 수많은 명 논설들과 실력 있는 필자들을 두루 배출했다. 1980년대의 엄혹함을 온몸으로 맞섰던 <창비>는 그 자체로 살아 있는 문학의 진수를 보여주었다.

거기까지였다. 시대가 변하고 사람들이 바뀌었다. <창비>는 '꼬장한' 봉건 선비 같았다. '르포'를 '르뽀'로 적고, '도쿄'와 '후쿠시마'와 '쓰나미'를 '토오꾜오'와 '후꾸시마'와 '쯔나미'로 적는 '창비맞춤법통일안'은 그들만의 성채를 굳건히 지키려는 사소하지만 중대한 사례일지 모른다.

<창비> 읽기를 멈추었지만 '창비'라는 출판사에 대한 애정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다. 서점에 가서 책을 고를 때 '창비' 두 글자가 있으면 일단 집어 들었다. 창비 책을 향한 내 마음의 점수는 늘 후했다. 누군가 책 추천을 해오면 맨 먼저 창비가 낸 책들부터 살펴봤다. 나 같은 애송이 독자의 눈에도 창비의 도서 기획력은 감각적으로 보였다. 작품성과 대중성이 어우러진 책들의 수준이 좋았다.

창비에 대한 애정이 차갑게 식은 것은 창비의 '주전선수' 소설가 신경숙씨가 표절 논란에 휩싸이면서였다. 발단은 지난 6월 16일 시인이자 소설가인 이응준이 인터넷 매체 <허핑턴포스트>에 올린 <우상의 어둠, 문학의 타락 - 신경숙의 미시마 유키오 표절>이라는 글이었다. 이응준은 신경숙의 소설 <전설>이 일본 극우 작가인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의 <우국> 일부를 훔쳐 썼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논란이 촉발된 다음날인 6월 17일, 창비 문학출판부가 신경숙 표절 논란에 대해 입장을 표명했다. 문제의 작품들이 특정 장면의 몇몇 문장에서 유사성이 있더라도 이를 근거로 표절을 운운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주장했다. 표절 시비에서 다투는 '포괄적 비문헌적 유사성'이나 '부분적 문헌적 유사성'으로 따지더라도 표절로 판단할 근거가 약하다고 말했다.

문학적, 법적 차원에서 표절 시비를 가르는 상황에서는 창비의 해명이 일면 타당할지 모른다. 하지만 평범한 독자나 일반 시민의 눈에도 그럴까. 하나의 긴 문단이 서로 다른 두 작품에서 거의 똑같이 서술되어 있는 것을 보고 "표절이 아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았다. '포괄적', '부분적' 운운이 내겐 '궤변'처럼 다가왔다.

아직도 궤변 늘어놓는 '원로'

백낙청 명예교수 페이스북 글 내용 일부 갈무리
 백낙청 명예교수 페이스북 글 내용 일부 갈무리
ⓒ 백낙청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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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7일,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가 페이스북에 '창비의 입장 표명 이후'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창비> 편집인이자 소유주이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문학 비평가다. 표절 논란이 촉발된 이후 두 달여 만이었다. 많은 이들이 기대감을 갖고 백 명예교수의 글을 보았다.

내용은 실망스러웠다. "문제 된 대목이 표절혐의를 받을 만한 유사성을 지닌다는 점을 확인하면서도 이것이 의도적인 베껴쓰기, 곧 작가의 파렴치한 범죄행위로 단정하는 데는 동의할 수 없다는 입장"이라고 했다. "우리 나름의 오랜 성찰과 토론 끝에 그러한 추정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입장에 도달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이해해 주기 바란다"라는 말을 덧붙였다.

백 명예교수는 "반성과 성찰은 규탄받는 사람에게만 요구할 일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차분한 토론과 검증의 필요성을 원론적으로 강조하는 대목에서였다. 보기에 따라서는 표절 혐의를 제기하고 비판하는 이들을 '공격'하는 언사로 들릴 수도 있었다. 백 명예교수의 글에 달린 댓글에서 '궤변'이라는 단어가 보였다.

백 명예교수의 입장은 <창비>의 것과 일치했다. 백영서 편집주간은 최근 나온 <창비> 가을호에서 "신경숙의 해당 작품(<전설>)에서 표절 논란을 자초하기에 충분한 문자적 유사성이 발견된다는 사실에 합의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런 유사성을 의도적 베껴쓰기로 단정할 수는 없다"라고 주장했다. 백 명예교수와 백 편집주간은 '의도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그들의 '관심법'이 궁금했다.

첸싱춘은 중국 고전소설을 학문적으로 정리하는 데 큰 업적을 남긴 학자였다. 1928년 <태양월간> 제3호에 쓴 <죽어버린 아Q시대>에서 정치사상이 참신함에서 진부함으로 변모하고 정치인이 시대를 따라잡지 못해 격랑에 침몰해온 특징이 당시 문단에도 나타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몇몇 늙은 작가의 처지에서 보면 중국 문단이 여전히 그들 '유머'의 세력권이고, '취미'의 세력권이며, '개인주의 사조'의 세력권인 듯하다. 하지만 실제로는 문단의 중심 역량은 이미 암암리에 전환하여 혁명문학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왕후이, <아Q생명의 여섯 순간>, 164쪽에서 재인용)

<창비>와 <문학동네>가 양대 '계파'가 되어 한국 문단을 휘어잡고 있음은 두루 알려진 사실이다. 그 중심에 백 명예교수와 같은 문학계의 '원로'와 '권위자'들이 있다. 그들의 탁월한 지성과 양식이 한국 문단을 "그들 '유머'의 세력권이나 '개인주의 사조'의 세력권" 정도로 여기지는 않았을 것임을 믿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세상은 이미 그렇게 보고 있는 듯하다.

먼 데서 근거를 찾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창비>로부터 시나브로 멀어져간 지난 십여 년 간의 나를 조그만 사례로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창비표' 문학을 열렬히 사랑했다. 그런데 어느 샌가 그들'만'의 점잖고 고상한 '꼰대리즘'을 참지 못하게 되었다. 내가 변한 걸까, '창비'가 변한 걸까.

창비가 '전면적인 불신임'의 대상이 되지 않기를...

4.19 혁명 이후 정치 열풍이 조성되면서 문단 내부에서 문학 잡지가 팔리지 않는 세태를 걱정하는 목소리가 나왔던 모양이다. 시인 김수영(1921~1968)은 이해 8월에 쓴 <독자의 불신임>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말했다.

혁명이란 이념에 있는 것이요, 민족이나 인류의 이념을 앞장서서 지향하는 것이 문학인일진데, 오늘날처럼 이념이나 영혼이 필요한 시기에 젊은 독자들에게 버림을 받는 문학인이 문학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사실을 고백하자면 나는 그 기자의 말을 듣고 내심으로는 오히려 통쾌한 감이 들었고, 우리나라 문학계도 이제야 비로소 응당 받아야 할 정당한 평가를 받게 되었다 하고 쾌재를 부르짖었다.

젊은 층의 전면적인 불신임을 받아야 할 것은 정치계에만 한한 일이 아니라 문학계도 마찬가지이고, 이러한 각성의 시기는 빨리 오면 빨리 올수록 좋은 것이기 때문이다. (김수영, <김수영 전집>, 159쪽)

백 명예교수는 예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창비를 아껴주시는 많은 분들께 큰 심려를 끼쳐드린 점을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저희가 도저히 수용 못 하는 주문도 있다고 해서 성찰과 발전을 다그치는 말씀의 무게를 저희가 외면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진정한 사과가 아니라며 분개하는 댓글도 있지만, 그의 진정성은 믿고 싶다.

백 명예교수의 말이 수사로만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현실의 나는 '반창비파'이지만 김수영이 말한 "전면적인 불신임"이 창비를 향하는 일은 원하지 않는다. 문학으로 인간의 영혼을 살찌우고 세상을 바꾸려 하는 창비의 유서 깊은 '문학 계몽주의'는 '헬조선'으로 치닫는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태그:#백낙청 창비 편집인, #신경숙 표절 논란, #문학권력, #의도적 베껴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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