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찾아오는 이가 거의 없는 시에나 '푸블리코 궁전' 안 '시립 박물관'. 이곳 '9인의 평화의 방'에 아름답진 않지만, 눈을 뗄 수 없는 매력적인 프레스코 연작이 있습니다. 바로 암브로조 로렌체티의 '좋은 정부의 효과 알레고리'와 '나쁜 정부의 효과 알레고리'입니다. 중세 시절, 이런 그림을 남겼다는 것 자체가 특이한데, 그림들을 이루고 있는 부분이 말 그대로 '좋은 정부'와 '나쁜 정부'의 알레고리, 즉 은유입니다.

'좋은 정부'와 '나쁜 정부'를 비유한 작품들

암브로조 로렌체티, '좋은 정부의 효과 알레고리', 시에나 푸블리코궁전. 시에나 화파의 거장 로렌체티의 프레스코로 심판, 절제, 관대, 신중, 강인, 평화 등의 긍정적 가치들이 의인화되어 있습니다.
▲ 좋은 정부 알레고리 암브로조 로렌체티, '좋은 정부의 효과 알레고리', 시에나 푸블리코궁전. 시에나 화파의 거장 로렌체티의 프레스코로 심판, 절제, 관대, 신중, 강인, 평화 등의 긍정적 가치들이 의인화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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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브로조 로렌체티, '나쁜 정부의 효과 알레고리', 시에나 푸블리코궁전.  독재자 옆엔 사기, 공포, 전쟁, 나쁜 습관, 잘못된 심판 등의 부정적 가치들이 의인화되어 있습니다.
▲ 나쁜 정부 알레고리 암브로조 로렌체티, '나쁜 정부의 효과 알레고리', 시에나 푸블리코궁전. 독재자 옆엔 사기, 공포, 전쟁, 나쁜 습관, 잘못된 심판 등의 부정적 가치들이 의인화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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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좋은 정부를 은유하는 그림에는 각각 심판, 절제, 관대, 신중, 강인, 평화 등의 긍정적 가치들이 의인화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오른쪽으로는 좋은 정부의 효과, 즉 생업에 열중하고 축제를 즐기는 백성들, 평화롭고 아름다운 농촌 풍경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마치 14세기 시에나의 일상을 풍속화처럼 생생하게 묘사해 놓았지요.

반대로 그림의 왼쪽에는 악마처럼 뿔이 달린 독재자의 모습이 형상화되어 있는데 물론 '나쁜 정부'의 은유입니다. 독재자 옆엔 역시 사기, 공포, 전쟁, 나쁜 습관, 잘못된 심판 등의 부정적 가치들이 의인화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나쁜 정부가 가져온 효과는 당연히 백성들의 고통입니다. 비록 프레스코화의 여기저기가 훼손되어 그림의 전체적인 모습을 제대로 알 수는 없지만, 시에나 화파의 마지막 거장이라 할 수 있는 암브로조 로렌체티의 진면목을 확인하기엔 충분합니다.

암브로조 로렌체티, '좋은 정부의 효과 알레고리', 시에나 푸블리코궁전. 좋은 정부의 효과, 즉 생업에 열중하고 축제를 즐기는 백성들, 평화롭고 아름다운 농촌 풍경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마치 14세기 시에나의 풍속화같습니다.
▲ 좋은 정부 알레고리 2 암브로조 로렌체티, '좋은 정부의 효과 알레고리', 시에나 푸블리코궁전. 좋은 정부의 효과, 즉 생업에 열중하고 축제를 즐기는 백성들, 평화롭고 아름다운 농촌 풍경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마치 14세기 시에나의 풍속화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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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브로조 로렌체티, '나쁜 정부의 효과 알레고리', 시에나 푸블리코궁전. 나쁜 정부가 가져온 효과는 당연히 백성들의 고통입니다.
▲ 나쁜 정부 알레고리 2 암브로조 로렌체티, '나쁜 정부의 효과 알레고리', 시에나 푸블리코궁전. 나쁜 정부가 가져온 효과는 당연히 백성들의 고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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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나는 이 프레스코 연작을 보면서 내가 떠나온, 그리고 몇 주 후 다시 돌아가야 할, 내 나라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지금 내 나라의 현실은 과연 어떤 정부 아래서, 국민들이 어떤 효과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의인화된 긍정적 가치들, 과연 내 나라에서는 지켜지고 있는 것일까?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금부터 600여 년 전 중세 말기의 유럽에서도 이처럼 '좋은 정부'와 '나쁜 정부'를 고민하고 있는데 우리의 그들은 과연 자신들의 권력의지나 이해득실이 아니라 국민의 삶을 중심에 놓고 고민하고 있는지 의문입니다.

'푸블리코 궁전'을 나와 시에나의 또 다른 상징, '두오모 성당(Duomo di Siena)'으로 향합니다. '만자탑'에서 먼저 보았던 '두오모'. 멀리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시에나 '두오모'의 특징은 독특한 가로줄무늬입니다. 성당의 측면과 후면, 그리고 종탑까지 모두 흰색 바탕 위에 짙은 초록색 스트라이프 무늬를 입혀 독특한 미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하부 구조 위에 섬세한 조각들로 장식된, 고딕 양식의 성당 정면 파사드도 고딕 양식 특유의 화려함으로 눈길을 빼앗기는 마찬가지입니다. 며칠 전 만났던 같은 고딕 양식의 오르비에토의 '두오모'가 오히려 소박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조반니 피사노·두치오·베르니니의 작품들, 감탄이 절로 나와

시에나의 두오모. 고딕 양식의 파사드에 토스카나 지방 특유의 줄무늬가 아름다운 외관입니다.
▲ 두오모 시에나의 두오모. 고딕 양식의 파사드에 토스카나 지방 특유의 줄무늬가 아름다운 외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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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나의 두오모는 두 차례에 걸쳐 공사가 진행되었는데, 1339년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을 만든다는 계획으로 남쪽에 본당 회중석을 짓는 2기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흑사병 창궐로 시에나 인구의 거의 반이 사라져, 계획은 중단되고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완성된 것입니다(두오모 남쪽에 미완성 상태인 본당 회중석과 벽이 남아 있는데 오페라 박물관을 통해서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런데 '두오모'의 문이 굳게 닫혀 있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시에스타를 지키는 경우가 많아서 성당 문 여는 시간을 잘 확인하라고 하던 여행 선배들의 말이 떠오릅니다. 어쩔 수 없이 '두오모'의 부속 박물관인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Museo dell' Opera del Duomo)'에 먼저 가봅니다.

‘두오모’의 파사드를 장식했던 진품 조각물들로 대부분 조반이 피사노가 족각한 것들입니다.
▲ 두오모의 장식 조각들 ‘두오모’의 파사드를 장식했던 진품 조각물들로 대부분 조반이 피사노가 족각한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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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첫 번째 방에는 '두오모' 파사드를 장식했던 진품 조각물들이 전시되어 있습니다. 오랜 세월 비바람에 깎였을 조각물들은 의외로 훌륭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대부분 조반니 피사노의 작품들로, 보는 이를 감탄하게 합니다. 그리고 필리포 리피의 디자인을 바탕으로 제작한 스테인드글라스도 전시되어 있는데,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를 아주 가까운 곳에서 볼 수 있는 특별한 경험이었습니다.

작은 규모이지만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에서 꼭 놓쳐서는 안 되는 작품이 바로 두치오의 '마에스타(Maesta)'입니다. 계속 언급했지만 14세기 서양 회화사는 곧 시에나 화파의 역사라 할 만큼 시에나 화파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앞서 '푸블리코 박물관'에서 보았던 시모네 마르티니나 로렌체티 형제, 그리고 두치오까지, 이들의 그림은 이후 100년 동안 이탈리아 회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으며 르네상스 거장들의 바탕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 시에나 화파의 시초가 바로 두치오입니다.

두치오, '마에스타', 시에나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 시에나 화파의 시조, 두치오가 그린 '마에스타'는 시에나의 상징으로, 성모자와 수많은 성인들과 천사들을 완벽한 대칭 구조로 배치한 전형적인 고딕 양식의 그림입니다.
▲ 마에스타 두치오, '마에스타', 시에나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 시에나 화파의 시조, 두치오가 그린 '마에스타'는 시에나의 상징으로, 성모자와 수많은 성인들과 천사들을 완벽한 대칭 구조로 배치한 전형적인 고딕 양식의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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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치오의 '마에스타'는 우리나라로 치면 시에나판 '팔만대장경'쯤 되는 작품입니다(물론 여기서 가치의 우열을 논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나에게 팔만대장경은 당연히 비교 불가의 대상입니다. 단지 시에나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그림이 그 정도로 중요한 문화유산이란 뜻입니다). 전쟁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제작된 이 작품이 성당에 봉헌될 때 시에나 시민들이 모두 나와 이 그림이 가는 길을 촛불로 밝혔다고 합니다.

그림은 패널 앞부분에 성모자와 수많은 성인들, 그리고 천사들을 완벽한 대칭 구조로 배치한 전형적인 고딕 양식입니다. 그리고 뒷면에 예수의 생애를 스물여섯 장면으로 나누어 그렸는데 지금은 맞은편과 왼쪽에 함께 전시해 놓았습니다(몇몇 장면은 런던과 뉴욕 등의 미술관에 나뉘어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을 보면서 나는 우리나라 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탱화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가운데 본존불을 배치하고 주변에 수많은 보살들과 나한들을 그린 그림 말입니다. 어쩌면 이렇게 구도나 배치가 판에 박은 듯이 비슷할까요? 중세의 유럽과 아시아는 그렇게 다른 종교지만 같은 표현 방식의 회화를 구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화려한 스트라이프 무늬가 인상적인 시에나의 두오모 실내입니다. 바닥에는 '인타르시아'라는 돌상감 모자이크가 섬세합니다.
▲ 두오모의 실내 화려한 스트라이프 무늬가 인상적인 시에나의 두오모 실내입니다. 바닥에는 '인타르시아'라는 돌상감 모자이크가 섬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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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페라 박물관'을 나와 다시 '두오모'로 향합니다. '두오모'는 내부도 외부 못지않게 화려한 스트라이프 무늬의 기둥들이 질서 정연하게 배치되어 장엄함과 조화로움을 느끼게 해 줍니다. 그리고 성당 바닥 곳곳에는 40여 명의 작가들이 200여 년에 걸쳐 완성한 '인타르시아(intarsia)'라고 부르는 돌상감 모자이크가 섬세하게 장식되어 있어 색다른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특히 니콜라 피사노가 아들 조반니와 함께 조각한 '설교대'는 '두오모'의 가장 중요한 유물로 고딕 조각의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을 만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시에나의 두오모에 대한 내 공부가 좀 부족했던 탓일까요? '두오모' 내에 있는 한 카펠라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조각들을 발견했는데, 인물이 '막달레나 마리아'와 '성 히에로니무스'인 것은 눈치껏 알겠지만, 작가가 누구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어쩔 수 없이 구글링을 합니다. 그랬더니 역시나였습니다. 작가는 바로 베르니니였습니다. 로마에서부터 찬탄을 금치 못했던 바로크 조각의 정점, 그 베르니니 말입니다. 나는 또 내 부족함을 절감하며, 뜻하지 않게 섬세하고 아름다운 베르니니의 작품들을 만난 것에 전율합니다.

시에나의 '두오모' 바닥에는 이처럼 인타르시아라고 불리는 섬세한 돌상감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 인타르시아 (돌상감) 시에나의 '두오모' 바닥에는 이처럼 인타르시아라고 불리는 섬세한 돌상감들이 새겨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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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오모'의 북측 회랑에는 '피콜로미니 도서관(Biblioteca Piccolomuni)'이 있습니다. 교황 비오 3세는 당대 최고의 인문학자이자 교황 비오 2세였던, 자신의 삼촌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의 장서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 이 도서관을 조성했습니다. 도서관이라고는 하지만 듣던 대로 화려한 프레스코로 가득합니다. 다양한 색채를 뽐내고 있는 프레스코화는 핀투리키오가 그린 것으로 정확한 내용은 파악할 수 없지만, 교황 비오 2세의 삶을 그린 것이라고 합니다. 또 천장을 장식하고 있는 소품들과 화려한 기하학적 패턴도 눈을 즐겁게 합니다. 

몸은 로마에, 머리는 시에나에... 성 카트리나의 무덤은 두 곳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비오 2세)의 장서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 비오 3세가 두오모 내에 조성한 도서관입니다. 핀투리키오가 그린 프레스코가 벽과 천장 전체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습니다.
▲ 피콜로미니 도서관 에네아 실비오 피콜로미니(비오 2세)의 장서들을 한데 모으기 위해 비오 3세가 두오모 내에 조성한 도서관입니다. 핀투리키오가 그린 프레스코가 벽과 천장 전체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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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콜리미니 도서관'을 끝으로 '두오모'를 나와 '산 도메니코 성당(Basilica di San Domenico)'으로 향합니다. 이곳에는 시에나의 수호성인, 성 카트리나의 무덤이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주 로마에서 만났던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에도 그녀의 무덤이 있습니다. 성녀 카트리나의 무덤을 두고 로마와 시에나, 두 도시가 경쟁하다가 결국 몸은 로마에, 머리는 고향 시에나에 묻었다고 하니 성녀 카트리나에게 후손들이 정말 몹쓸 짓을 한 건 아닌지 안타까운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기독교인이 아닌 내 눈엔, 성녀 카트리나의 무덤보다 무덤을 장식하고 있는 안드레아 디 반니의 극적인 그림, '카트리나의 일생'에 더 관심이 가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산 도메니코 성당'에 있는 시에나의 수호 성인, 성 카트리나의 무덤으로 로마의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에도 그녀의 무덤이 있습니다. 안드레아 디 반니의 그림 ‘카트리나의 일생'이 그녀의 극적인 삶을 보여줍니다.
▲ 성 카트리나의 무덤 '산 도메니코 성당'에 있는 시에나의 수호 성인, 성 카트리나의 무덤으로 로마의 ‘산타 마리아 소프라 미네르바 성당’에도 그녀의 무덤이 있습니다. 안드레아 디 반니의 그림 ‘카트리나의 일생'이 그녀의 극적인 삶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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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도메니코 성당'을 나와 잠시 '성녀 카트리나의 집'에 들렀다가 다시 '캄포 광장'으로 왔습니다. 아직 피렌체로 돌아갈 버스 시간이 좀 남아서 여행 선배들의 조언대로 '팔리오 깃발(각 콘트라다를 상징하는 깃발)'을 몇 개 샀습니다. 생각보다 비싼 팔리오 가격에 좀 놀라긴 했지만 그래도 시에나에서 가장 시에나다운 건 역시 팔리오 깃발이라는 생각에 기념으로 구입한 것입니다. 기회가 된다면 정열적인 '팔리오 축제'를 꼭 봐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10편. 성 프란체스코의 고향, 아시시로 이어집니다.) 

○ 편집ㅣ박정훈 기자

덧붙이는 글 | 2014년 12월 5일부터 2015년 1월 4일까지 이탈리아 미술기행을 다녀왔습니다.



태그:#두오모, #좋은정부나쁜정부, #로렌체티, #시에나, #이탈리아미술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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