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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현지시각) 칠레 산티아고의 오래된 한 서커스 극장 겸 문화센터 야외 정원. 이날 이곳에선 열다섯 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한창 바느질 중이었다. '실종', '체포', '정의' 등의 글자를 수놓는 사람, 나름의 디자인된 그림을 수놓는 사람 등. 각자 작은 손수건 크기의 천에 자신만의 이야기를 담고 있었다.

토요일 낮, 어느 극장 정원에 모여 바느질을 하는 사람들.
 토요일 낮, 어느 극장 정원에 모여 바느질을 하는 사람들.
ⓒ 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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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이 함께 모여 바느질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대답은 현재 칠레의 '기록 박물관'과 '산티아고 도서관'에서 나누어 전시되고 있는 <부재의 실>이라는 전시에서 찾을 수 있다.

이 전시는 현재 스페인 박사과정에 재학 중인 칠레의 젊은 예술가 비비아나 실바(29, 여)가 진행한 프로젝트의 결과물이다. 2014년부터 초부터 시작된 자료조사와 사전준비를 포함하여 꼬박 1년이 넘게 걸린 이 프로젝트는 그녀가 17살 때 본 오랜 신문의 기사로부터 시작됐다.

1975년 7월의 어느 날, 칠레 <라 세군다>라는 신문에 한 사건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콜롬보 작전 혹은 119명 사건으로 불리는 칠레 역사의 한 장면이기도 한 사건이다. 칠레 비밀경찰(DINA)은 1974년과 1975년 좌파운동과 연관된 사람들을 납치, 체포, 고문한 것도 모자라, 살해했다. 이후 비밀경찰은 이를 은폐하기 위해 칠레의 언론과 짜고, '좌파조직원들이 타국에서 내부 대립으로 인해 서로 살해했다'는 조작된 내용의 기사를 게재하면서 사망자 119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마치 쥐새끼들처럼 괴멸”이라는 타이틀로 <라 세군다>에 기재된 당시 기사.
 “마치 쥐새끼들처럼 괴멸”이라는 타이틀로 <라 세군다>에 기재된 당시 기사.
ⓒ 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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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보 작전에 대한 이야기는 들었지만 실제로 그 기사를 봤을 때 경악했죠. 어떻게 진실이 이렇게 조작될 수 있는지, 그리고 현재까지 이에 대해 어떤 해명도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어요. 그때 생각했어요. 이것을 위해 언젠가 뭔가 해야겠구나라고..."

피노체트 독재가 끝나고, 정부 차원의 조사가 진행됐지만 한 번도 제대로 된 진실규명과 판결은 이뤄지지도, 나오지도 않았다. 당시 고문과 살해 등의 책임을 물어 일부가 감옥에 가긴 했지만 편의시설이 다 갖추어진 호텔급 감옥이었다고 전해진다. 심지어 어느 일화에 의하면 1990년대 초, 정부는 피해자 일부 가족에게 산티아고의 한 체육관으로 모이라는 공문을 보냈고, 그곳에 모인 가족들에게 "조사결과 실종자들은 어느 바다에 매장된 것으로 밝혀졌지만 정확한 위지는 찾을 수 없다"는 짧은 발표로 책임을 회피해 가족들을 다시금 분노와 오열에 빠뜨렸다고 비비아나는 말했다.

119명의 생존 가족을 만난 그녀

그녀는 10년 후 '무엇인가'의 답을 '실'에서 찾았다. 사망자 119명의 생존 가족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하얀 손수건에 잃어버린 가족의 이름을 수놓는 작업이었다.

"'실, 바느질하기'는 많은 의미를 담고 있어요. 먼저 스페인어에서 '바느질하다'란 동사는 이야기를 '엮어간다'는 의미로 쓰이기도 해요. 기억을 이야기하며 그 이야기를 엮어가는 의미를 담고 있죠. 다른 측면으로는 바느질을 통해 구멍이 나거나 손상된 곳을 고치듯이 '상처를 치유한다'는 의미도 담고 있어요. 그리고 무엇보다 바느질하는 공간은 사람들을 모이게 하고, 바느질 하는 과정 안에서 자유롭게 여러 이야기들을 나누게 되는 공간을 만들어내죠."

사라진 가족의 이름을 수놓으며 그들을 기억하는 작업.
 사라진 가족의 이름을 수놓으며 그들을 기억하는 작업.
ⓒ Viviana Sil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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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그녀는 바느질하는 동안 나눈 이야기를 녹음한 오디오를 전시공간에 틀어놓았다. 때론 심각하고, 때론 웃음이 오가는 그 시간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아내고 싶었다고 했다. 또한 40명의 인터뷰를 담은 2시간짜리 다큐멘터리를 통해 실종과 체포 당시의 생생한 이야기도 들을 수 있었다. 대부분이 어느 날 갑자기 가족의 부재를 마주 해야 했다.

"토요일이었어요. 남편과 두 살 된 아이와 함께 공원에 나가기로 했는데 비가 많이 왔죠. 남편이 점심을 먹고 조금 기다려보자고 했고, 잠시 외출을 했어요. 저녁 8시인가... 초인종이 울렸죠. 당연히 남편이라고 생각하고 문을 열었는데 군인들이 있었죠. 그리고 '당신 남편은 체포되었다'고 말했어요. 그것이 끝이었죠." - 코카(69, 실종자 아내)

"갑자기 집에 들이닥쳐 아버지를 체포해갔죠. 당시 다섯 살이었지만 생생히 기억해요. 차 뒤창으로 돌아보던 아버지의 얼굴. 군인들이 아버지의 머리를 눌러 더 이상 볼 수 없었어요." - 베르나르도(43, 실종자 아들)

"오빠의 체포 소식으로 할머니는 쇼크를 받아 돌아가셨고, 다른 오빠는 체포를 피해 프랑스로 도망갔지만 못 견디고 자살했어요. 가족의 삶이 한순간에 파괴됐죠." -아드리아나(60, 실종자 동생) - 다큐멘터리 "Hilos de ausencia" - Viviana Silva Flores 실종자 가족 인터뷰 중


프로젝트 초기에는 가족들을 만나고, 연결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고 한다. 거의 한 달간을 무소식과 기다림으로 지냈는데 당시 실종자 동생을 둔 한 남성이 연락을 해 오면서 그를 통해 다른 가족들과도 이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80여 명의 가족과 가족의 친구들을 18번에 걸쳐 만났다. 그들은 함께 둘러앉아 수를 놓고, 다른 이들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한 여성은 처음에는 바느질을 하는 걸 거부하기에 '하기 싫으면 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죠.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그녀가 그녀의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알고 보니 그녀 역시 당시 체포되어 한동안 감옥에 있었는데 그때 억지로 바느질을 시켰다고 해요. 바느질이 그녀에게는 악몽이었던 거죠. 이야기를 끝낸 그녀가 비로소 바느질을 시작했어요. 무려 다섯 장의 손수건을 수놓았죠. 그녀에게 이제 바느질은 다른 의미로 기억되겠죠. 그런 게 제 기쁨이었어요."

형제이기도, 남편이기도, 자식이기도 했던 이들... 슈퍼에 갔다가 소식이 끊기고,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고, 약속한 곳에 오지 않고... 어느 날 예고 없이 사라진 이들의 이름이 그렇게 손수건 위에 하나 둘 새겨졌다.

18회에 걸쳐 매번 다른 실종자 가족들의 집에 모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18회에 걸쳐 매번 다른 실종자 가족들의 집에 모여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 Viviana Sil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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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기억하고, 함께 기억하는 것

지난 22일 바느질 모임은 2005년 9월 어느 날 칠레 남쪽 푸에르토 몬떼 지역에서 실종된 마푸체 출신 16세 소년 호세 우에난떼에 대한 공동 작업이었다. 사건이 발생한 날 새벽, 호세는 친구들과 함께 집에 가다가 경찰의 야간단속에 걸려 체포된 뒤 사라졌다. 이 사건은 민주주의 체제 안에서 발생한 첫 공권력에 의한 체포와 실종사건으로 기록되며, 논란이 되었다. 힘없는 가난한 인디오 가정의 한 소년이었던 호세. 하지만, 이후 그 어떤 정부도 이에 대한 입장을 내거나 책임자를 처벌하지 않았다. 40년 전 발생한, 추악한 역사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날 낮 12시 쯤 시작된 바느질은 밤 11시가 넘도록 이어졌다. 이날 바느질 모임에서 만난 40년 전 남동생이 실종된 로사리따(62, 여)는 말했다.

"동생의 이름을 수놓는 작업은 나를 한 번 더 살게 했다. 하지만 똑같이 그때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사는 것이다. 개인의 아픈 기억이 아닌, 기억을 나누고, 함께 기억하며 사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기억해주면 그 기억은 계속 현재에 남을 것이다. 바느질은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긴 시간 동안 로사리따의 바느질은 지치지 않고 이어졌다.
 긴 시간 동안 로사리따의 바느질은 지치지 않고 이어졌다.
ⓒ 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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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를 하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비비아나는 한 여성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녀는 같은 날 오빠와 애인을 동시에 잃었고 그녀 역시 체포되어 감옥에서 고문을 당했어요. 상처받은 몸과 마음으로 지금까지 길 위에서 싸우기를 멈추지 않고 있죠. 그럼에도 그녀는 누구보다 밝은 에너지를 가지고 있어 놀랐어요. '잊지 않고 현재를 살아야지. 그러기 위해선 현재의 즐거움을 놓치지 않아야 해. 그래야 오래 기억할 수 있어' 그녀의 말이 잊히지 않아요."

중요한 역사임에도 서서히 잊히고 있는 기억은 없는가. 그 수많은 기억들을 실로 엮어 다시 수면 위로 끌어내는 것, 그리하여 단단히 기억의 실을 부여잡고 현재를 살아가는 것의 중요함을, 난 칠레에서 봤다. 그리고 그 시간 안에서 문득 우리의 이야기와 과제를 보았다.

각자가 만든 조각들을 하나로 모으는 작업. 나 역시 '진실'이라는 글자로 함께 했다.
 각자가 만든 조각들을 하나로 모으는 작업. 나 역시 '진실'이라는 글자로 함께 했다.
ⓒ 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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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집ㅣ최유진 기자



태그:#칠레, #콜롬보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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