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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어귀에서 자라는 배롱나무. 언제나 오래도록 고운 꽃을 피우면서 마을을 밝힌다.
 우리 마을 어귀에서 자라는 배롱나무. 언제나 오래도록 고운 꽃을 피우면서 마을을 밝힌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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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마실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두 아이는 저만치 앞서 달린다. 이제 마을 논에도 나락이 제법 자랐다. 요즈음 나락은 유전자를 건드려서 키가 무척 작지만, 그래도 아이들 키하고 엇비슷하다. 먼 발치에서 바라보니 작은아이 머리가 빼꼼 보인다. 작은아이는 자동차를 한손에 들고 빨래터 울타리에 굴린다. 배롱꽃이 곱게 흐드러지고, 큰아이도 어느새 작은아이 앞으로 달려 나와서 까르르 웃는다. 여름이 저물려고 한다.

그런데, 늘 마을에서 지내면서 집과 도서관 사이를 오가다 보면, 마을 어귀에 자동차를 댄 '도시 사람'을 곧잘 볼 수 있다. 이들은 왜 이 깊은 시골마을까지 찾아올까? 우리 마을에서 흐르는 싱그러운 샘물을 떠 갈 생각일까? 어쩌면 샘물을 떠 가는 사람도 있겠지.

오늘 두 아이하고 빨래터 물이끼를 걷으러 가서 웃통을 벗고 신나게 물이끼를 걷는데, 자동차 한 대가 서더니 늙수그레한 아저씨가 "저기 배롱나무 가지 하나 얻을 수 있을까요? 약으로 쓰게" 하고 묻는다. 어디서 온 누구인지 밝히지도 않고 대뜸 배롱나무 가지를 달라고 하는 까닭은 뭘까?

그러고 보니, 우리 마을 배롱나무 가지가 좀처럼 늘지 못하고 자꾸 꺾이거나 줄어든다고 느꼈다. 아하, 바로 이런 사람들이 몰래 베거나 잘라 갔는가 보구나.

약 되는 나무? 나무 사랑하는 마음 먼저

아이들은 배롱나무 밑에서 배롱꽃을 줍거나 밟으면서 온통 꽃아이가 된다.
 아이들은 배롱나무 밑에서 배롱꽃을 줍거나 밟으면서 온통 꽃아이가 된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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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나무인데 함부로 안 베지요. 그리고 다들 약으로 쓴다면서 가지를 잘라 가면 나무가 남아나겠습니까? 다른 데 가서 알아보세요. 산에 가거나 길에서 베거나 하세요."

"약으로 쓴다는데, 갑갑하게 구네."

"여보세요. 이 나무는 아저씨 나무가 아니라 우리 마을 나무입니다. 나무를 아낄 줄 모르면서 무슨 약으로 쓴다는 말입니까?"

늙수그레한 아저씨는 잔뜩 욕을 늘어놓고 자동차 문을 쾅 닫고 간다.

마을 빨래터에 물이끼가 끼고, 배롱꽃이 잔뜩 떨어지면, 슬슬 빨래터를 치우러 나온다.
 마을 빨래터에 물이끼가 끼고, 배롱꽃이 잔뜩 떨어지면, 슬슬 빨래터를 치우러 나온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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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터에 낀 물이끼하고, 빨래터에 떨어진 배롱꽃을 모두 걷어내면, 이제부터 이곳은 아이들 놀이터로 바뀐다.
 빨래터에 낀 물이끼하고, 빨래터에 떨어진 배롱꽃을 모두 걷어내면, 이제부터 이곳은 아이들 놀이터로 바뀐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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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저 사람 왜 나무를 벤데?"
"이 나무가 약이라서 가져가겠대. 그래서 가져가지 못하게 했어."

가만히 보면, 도시 사람은 외지고 깊은 시골 마을로 몰래 들어와서 나뭇가지뿐 아니라 이것저것 몰래 캐거나 뜯거나 파 가곤 한다. 그러면서 마을 사람한테 들키거나 들통이 나면 '인심 좀 쓰라'고 핀잔을 하다가 '인심을 안 쓰겠다'고 하면 온갖 욕을 내뱉는다.

어디에 어떤 약으로 쓸 생각인지 모를 노릇이나, 고약한 마음으로 찾아와서 고약한 마음으로 빼앗거나 훔치면 어떤 약이 될까? 마음을 곱게 다스린다면 몸이 아플 일이 없으리라 느낀다. 배롱나무도 뽕나무도 후박나무도 초피나무도 자귀나무도... 제발 찾지 마라. 방송에서는 제발 엉터리 같은 약초나 약나무 이야기 좀 내보내지 마라. 약이 안 되는 풀이나 나무가 어디에 있는가?

우리 마을 배롱나무 가지를 또 훔치려고 했던 사람은 '마을 할매가 낮잠을 자거나 쉴 겨를'에 마을 어귀에 나타났다. 오늘 바로 그때에 아이들하고 빨래터를 치우러 나오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참으로 끔찍한 노릇이다.

늦여름에 분홍빛 꽃송이가 더욱 빛나는 배롱꽃.
 늦여름에 분홍빛 꽃송이가 더욱 빛나는 배롱꽃.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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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 사는 이웃들이여, 마을에서 사랑을 받으며 자란 배롱나무가 '약으로 더 쓸 만한' 줄 우리도 잘 안다. 그런데, 나뭇가지를 잘라서 달여 먹어야만 약이 되지 않는다. 날마다 이 배롱나무 둘레에서 배롱꽃 냄새를 맡고, 싱그러운 샘물을 마시며, 맑은 바람 흐르는 시골에서 들일을 하면, 몸에서 아픈 것은 저절로 떨어져 나간다.

시골에 있는 것에 부디 욕심을 내지 않기를 빈다. 한두 사람이 가져간다면서 배롱나무 가지를 자르면 배롱나무는 어떻게 되나? 도시에서 찾아오는 이웃도, 이곳 시골에서 사는 마을 사람도 언제나 기쁘게 올려다보고 쓰다듬는 나무가 되면, 누구나 이 나무한테서 사랑을 나누어 받을 수 있다. '약이 되는 나무'에 앞서 '사랑이 되는 마음'부터 찾을 수 있기를 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최종규 시민기자의 누리사랑방(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시골살이, #시골살이 일기, #삶노래, #시골노래, #배롱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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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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