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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첫째가 바다에 가자며 연신 졸라댄다. 이번 여름은 너무 더워 집 앞 공원에도 안 나가고 무조건 방콕이었는데…. 괜히 찔려 '해수욕장에 가볼까?' 생각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제 막 뒤집기에 재미 붙은 젖먹이 둘째를 데리고 갈 생각을 하니 막막하다. 물놀이가 끝난 뒤 옷에 묻은 모래를 털어낼 생각을 하니 더더욱 바다는 피하고 싶다. '나가서 개고생할 바에 그냥 집에서 시원하게 지내겠다!'는 나의 목적이 요런 저런 핑곗거리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내 핑계도 첫째의 바다 사랑 앞에 한풀 꺾이고 말았다.

아직은 바다가 차갑고 낯설다.
▲ 첫째가 바닷물에 발을 담그던 순간 아직은 바다가 차갑고 낯설다.
ⓒ 송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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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두 아이를 데리고 용감하게 바다로 떠났다. 그런데 시작부터 뭔가 허술하다. 아뿔싸! 첫째의 래시가드를 어린이집에 두고 왔다. 뒤늦게 주문한 튜브는 아직도 배송중이다. 해수욕장에서 도착해서야 집에 두고 온 모래 놀이 도구들이 떠올랐다. 분명 짐을 한가득 바리바리 싸왔는데, 정작 물놀이에 필요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때마침 비가 조금씩 내려서 인지, 주말임에도 해수욕장이 한산했다. 그런데 아침부터 바다에 가자고 조르던 첫째가 막상 바다에 오니 뒷걸음친다. 멀리서 보기만 하던 바다에 막상 발을 담그려니 낯설었던 걸까? 검은 모래가 더럽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싫은 표정을 한가득 지으며 자꾸만 뭍으로 가려고 한다.

그렇게 꿈에 그리던 바다에 와 정작 물에 들어가기를 주저하는 첫째를 보니, 이수지 작가의 <파도야 놀자> 그림책이 떠올랐다. 처음 도서관에서 이 책을 만났을 때의 당혹스러움이란…? 책장을 넘겼는데 글 밥이 하나도 없다! 하지만 책장을 넘기다 보니 이 책에 글 밥이 있으면 더 이상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백한 그림 그 자체로도 파도와 놀다 온 소녀의 이야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수지 작가의 <파도야 놀자> 겉표지
 이수지 작가의 <파도야 놀자> 겉표지
ⓒ 이수지(비룡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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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로 길쭉한 판형을 가진 이 그림책은 왼쪽과 오른쪽 페이지로 나누어지는 경계인 '제본선'을 탁월하게 활용했다. 왼쪽에는 바닷가에 놀러 온 아이가, 오른쪽에는 철썩이는 파도가 그려져 있다. 아이는 파도에 기가 눌려 뒷걸음치다가 두 손을 번쩍 들어 달려갈 기세로 바라보기도 한다. 그러다 문득 용기를 내어 파도가 넘실대는 오른쪽 바다의 장으로 발을 담근다.

신나게 파도와 뛰어놀던 아이는 바다와 하나가 된다. 그러면서 새하얗던 그림책 배경에 파란 물이 들고, 소녀의 옷에도 파란 물이 든다. 처음에는 엄마가 멀리서 지켜보고 있는 왼쪽 면에서만 놀던 소녀가 자유롭게 모래사장과 바닷물을 왔다 갔다 한다. 그리고 다음 여름을 기약하는 듯, 바다에게 인사를 하며 그림책은 끝난다.

조심스럽게 바다를 탐색하던 첫째도 이내 바다와 친해졌다. 얼굴에 모래가 묻은 줄도 모르고 뛰어다닌다. 밀려오는 파도를 향해 괴성을 지르며 호기롭게 달려가기도 한다. 그깟 튜브와 모래 놀이 도구가 없으면 어떠랴? 없으면 없는 대로 조그만 대야에 바닷물을 받아 여기저기 뿌려대며 깔깔 웃는다. 처음에는 바닷물에 발도 안 담그려고 했건만, 어느새 혼자 바닷물과 모래사장을 오가며 한바탕 즐겁게 논다.

바다와 친해진 첫째
 바다와 친해진 첫째
ⓒ 송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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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야 놀자>의 앞 면지(표지와 속지를 이어주는 장)에는 불투명한 물결이, 뒤 면지에는 파도가 가고 난 자리에 남은 조개껍데기들이 그려져 있다. 바다와 신나게 놀다 온 첫째의 마음도 이 그림책의 면지와 같지 않을까? 물놀이를 가기 전에 느꼈던 바다에 대한 호기심이 불투명한 물결이었다면, 바다를 다녀온 후 아이의 마음에는 파도의 추억이 담긴 조개껍데기가 남아있을 것이다.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는 엄마 품이 온 우주와 같다. 아기는 그 우주의 폭신함과 엄마 냄새에 흠뻑 젖어, 조금만 그 품을 벗어나도 자지러지게 울곤 했다. 그러다가 엄마의 사랑에 안정감을 얻고 조금씩 자신의 세상을 넓혀 나간다. 뒤집기와 배밀이를 시작하면서 온몸으로 땅을 느끼고, 무언가 짚고 우뚝 서면서 시야는 더 높아진다. 걷기 시작하면 엄마 손도 뿌리치고 혼자 더 넓은 세상으로 발걸음을 디딘다.  

아이는 자라면서 더 큰 세상 속으로 혼자 저벅저벅 걸어갈 것이다. 사나운 파도에 휩쓸려 옷이 흠뻑 젖을 때도 있을 것이고, 잔잔한 파도에 몸을 맡기며 웃는 날도 있겠지. 부모라는 핑계로 '저기는 위험하니까 여기서만 놀아!'라며 꼰대 노릇을 하고 싶지 않다.

사랑과 안쓰러움이 뒤섞인 시선을 애써 감추며, 묵묵히 지켜볼 것이다. 그리고 아이가 저 스스로 선택한 삶을 온전히 살아내도록 응원하겠다. 아이가 제 생애 물밀 듯이 밀려오고 다시 스르르 사라지는 삶의 파도와 한바탕 놀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림책 육아 일기④] 아기 똥싸는게 대수? 엄마 아빠는 물개박수

덧붙이는 글 | * 기사에 소개한 그림책: <파도야 놀자> / 이수지 그림 / 비룡소 펴냄.



태그:#그림책 육아 일기, #이수지, #파도야 놀자, #육아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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