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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 학생과 심사위원 모두가 참여한 '3차 토론'이 진행되었다. 이주노동자, 미혼모, 알바 등의 제시어를 아이들 눈높이에서 어떻게 설명하는가를 엿보려는 공동체 놀이였다.
▲ 토론을 '놀이'처럼 참가 학생과 심사위원 모두가 참여한 '3차 토론'이 진행되었다. 이주노동자, 미혼모, 알바 등의 제시어를 아이들 눈높이에서 어떻게 설명하는가를 엿보려는 공동체 놀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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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색이 '전국' 대회다. 학교 안팎에서 토론깨나 해봤다는 고등학생들이 한데 모인 자리인데, 5.18 광주민주화운동(이하 5.18)에 대해 설마 모를까 싶었다. 더욱이 올해로 열네 해째 인데다, 참가 경험이 있는 학교 선배들의 권유로 오는 경우가 태반이니, 참가 신청을 하기 전에 대회의 이름이 궁금해서라도 한 번쯤 5.18에 대해 조사해 봤을 거라 여겼다.

착각이었을까. 우리나라 민주주의 역사의 변곡점으로 당당히 자리매김한 5.18에 대해 낯설어 했다. 설령 알아도 교과서에서나 등장하는 '그렇고 그런' 사건으로 간주했다. 아이들에게 5.18은 6. 25 전쟁이나 임진왜란처럼 기억되는 박제화한 과거일 뿐이었다. 왜곡되고 간과돼온 우리나라 현대사 교육의 당연한 귀결일지도 모른다. 시험에서조차 거의 다루지 않으니, 어쩌면 당연지사다.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 현대사는 역사의 '변방'이다. 이태 전 '한국 근현대사'라는 과목은 '한국사'로 통합되어 갑자기 사라졌다. 그나마 현 정권 들어서는 수능에서 전근대사 영역의 출제 비율을 높이겠다면서 의도적으로 현대사의 비중을 깎아내리고 있다. 5.18과 같이 '최근'의 사건인 경우에는 아직 역사적 평가가 내려지지 않았다고 눙치며 교과서 서술조차 '한 줄 평'으로 일관한다.

그러한 외면 속에 많은 아이들에게 5.18이란 '어수선한' 숫자로 전락했다. 5.18을 5.16 군사쿠데타와 헛갈려 하는 아이들이 적지 않다. 하긴 7월 17일 제헌절이 무얼 기리기 위한 기념일인지도, 일제로부터 언제 해방이 되었는지도 모르는 아이들이 태반이고 보면, 그 두 숫자의 구분이 쉽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들에게 5.18 정신을 운운하는 건 '공자 왈 맹자 왈'일 수밖에 없다.

기획위원이기 전에, 학교에서 또래 아이들을 가르치는 한국사 교사로서, 토론대회의 형식을 빌어서나마 그들에게 '5.18 수업'을 해주고 싶었다. 민주, 인권, 평화라는 5.18 정신을 어떻게 가슴으로 전할까 고민을 거듭했다. 그들이 다시 학교로 돌아갔을 때 가슴에 품은 5.18 정신을 친구들과 나누고 공감할 때라야 비로소 토론대회가 마무리되는 것이라 스스로 규정했다.

그러나 본선에 진출한 아이들 대부분은 대회의 이름인 '5.18'보다 '토론대회'라는 행사의 성격에 방점을 찍은 듯했다. 제시된 토론 주제들을 5.18과 전혀 관련지어 생각해보려하지 않았다. 논리성, 협동성, 창의성, 발언 태도 등과 같은 '뻔한' 심사기준에 매몰된 탓인지, 다들 정작 5.18 정신에 대해 관심을 쏟을 만한 여유가 없어 보였다.

결선과 시상식이 끝이 아니라, 그들이 학교로 돌아가 친구들과 5. 18 정신을 나누고 공감할 때라야 비로소 토론대회가 마무리되는 것이다.
▲ 결선 토론 장면 결선과 시상식이 끝이 아니라, 그들이 학교로 돌아가 친구들과 5. 18 정신을 나누고 공감할 때라야 비로소 토론대회가 마무리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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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TV 너머에는 누가 있을까?' 이번 대회의 슬로건이다. SNS의 확산과 TV의 채널마다 관찰 리얼리티 예능 프로그램이 범람하는 요즘, '자발적 감시 사회'에 대한 고등학생들의 다양한 생각들을 나눠보고 싶었다. 그러다 보면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빅데이터와 빅브라더의 문제로 논의가 확산될 테고, 자연스럽게 5.18 정신의 고갱이인 민주주의와 인권의 문제로 귀결될 것이라 예상했다.

논제가 지나치게 까다로웠던 걸까. 아니면 5.18 정신을 담아내기에는 적절치 못한 주제였을까. 파놉티콘과 빅브라더, SNS와 빅데이터의 개념과 순기능, 역기능까지는 논의가 이어졌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어느 누구도 5.18을 예시하지 않았다. SNS의 순기능을 말할 때, 적어도 '당시 SNS가 있었다면 5.18 학살은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이야기 정도는 나오리라 내심 기대했다.

심사하는 내내 회의가 들기도 했다. 과연 토론이라는 방식을 통해 5.18 정신에 다가서도록 만들 수 있을까. 사실 행사를 기획하면서 가장 중점을 둔 사항이기도 하다. 주제뿐만 아니라 토론의 '형식'에도 5.18 정신을 담아내고자 했다. 토론대회에 참가한 경험이 허다한, 속된 말로 토론에 이골이 난 아이들에게 5.18 토론대회만의 '색깔'을 보여주려고 무진 애를 썼다.

아이들이 '복병'이라 부를 만큼, 여느 대회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진행됐다. 네 차례의 본선 토론 때마다 개인별 원탁 토론, 키워드 토론, 팀별 주도토론 등 그 방식을 각각 달리한 것이다. 특히 제시된 키워드에서 즉흥적으로 논제를 추출하는 방식과 자신의 주장을 도중에 번복할 수 있다는 규칙에 대해서는 다들 생소해 했다. 토론의 ABC에 대해 '도통'한 아이들인데도 당황한 빛이 역력했다.

대립 토론 방식에 익숙해진 탓이다. 대부분의 토론대회는 전가의 보도처럼 논제를 보고 찬성과 반대의 입장을 정해 논리를 다투는 방식이다. 찬반이 갈리지 않을 때는 제비뽑기를 통해 결정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논리력이 확연히 드러나고, 준비하는 과정에서 상대방의 주장을 이해해볼 수 있다는 나름의 효과가 분명 있지만, 5.18 토론대회는 이를 가급적 지양한다.

필경 승부에 과도하게 집착하게 된다는 판단에서다. 토론이 승리와 패배의 문제로 치환되면, 각 대회마다의 취지를 아이들에게 구현시키기가 난망하게 된다. 주지하다시피, 토론은 논리로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과정이 아니라, 서로의 논리를 바탕으로 공존의 지점을 찾아가는 가장 민주적인 절차다. 토론과 민주주의를 동전의 양면이라고 일컫는 이유다.

조금 복잡하고 번거롭더라도 토너먼트보다 리그 방식을 선호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승부를 떠나, 가능한 한 전국에서 온 많은 팀들과 토론하며 그들의 다양한 주장을 들어보는 것이 더 효과적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토론 때마다 심사를 하고 순위를 매기기는 하지만, 상장에다 행사를 후원한 기관장의 명의만 적고, 시상식 때 등위를 굳이 밝히지 않는 것도 그래서다.

5. 18 국립민주묘지 답사는 토론대회의 가장 중요한 '부대행사' 중 하나다. 무더운 날씨에도 다들 진지하게 답사에 임했다.
▲ 5. 18 '구'묘역 입구에서 5. 18 국립민주묘지 답사는 토론대회의 가장 중요한 '부대행사' 중 하나다. 무더운 날씨에도 다들 진지하게 답사에 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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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독특한 토론 방식만으로 청맹과니 아이들에게 5.18 정신을 일깨우는 데에 한계 또한 분명했다. 토론 못지않게 '부대 행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까닭이다. 2박 3일간 일정 중 하루는 5.18 국립민주묘지와 사적지를 답사하고, 저녁 시간에는 저명인사를 모시고 특강을 듣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5.18 토론대회가 다른 대회와 확연히 구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또, 참가팀 간 딱딱하고 긴장된 분위기를 해소하기 위한 레크리에이션도 서로 힘을 모아야하는 공동체 놀이 위주로 구성된다. 전년도의 경우, 저녁 식사도 모둠별로 재료와 메뉴를 달리해 직접 조리해 먹도록 만들기도 했다. 식사를 함께 준비하면서 협력과 공존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체득하도록 유도하려는 것이다. 이름 하여 '소셜 다이닝' 프로그램이다.

사실, 기획 단계에서부터 명칭을 토론'대회'로 할 것인지, 토론'캠프'로 할 것인지를 두고 많은 이야기가 오갔다. 이는 아이들에게 5.18 정신을 일깨우는 데에 정작 토론보다 답사나 특강, 공동체 놀이 등의 '부대 행사'가 더 효과적일 수도 있다는 일종의 문제제기였다. '대회'든 '캠프'든 행사의 성공 여부를 판가름하는 기준은 바로 그것일 테니 말이다.

2박 3일간의 모든 행사가 끝났다. 어느 팀이 결선에 올랐고, 누가 우승을 했는지는 기억조차 가물가물하다. 대신 본선 토론 자리에서 한 아이가 소감을 말하며 쏟아낸 울음이, 또, 헤어질 때 한 아이가 건넨 우리 역사에 대한 다짐 한 마디가 훨씬 더 강렬한 기억으로 남았다. 토론 능력이 향상됐다거나, 좋은 친구들을 만나 즐거웠다는 말보다 백배는 더 감동적이었다.

"5.18 당시의 영상을 보고 놀라 밤에 엄마한테 전화를 걸었는데, 엄마가 펑펑 우시는 거예요. 까맣게 몰랐는데, 엄마가 당시에 광주에 사셨고 그걸 다 겪으셨다는 거예요. 여태껏 엄마는 제 앞에서 한 번도 5.18을 입에 담지 않으셨어요. 참혹한 영상 속 사람들 곁에 엄마가 계셨을 걸 떠올리니 너무나 슬픈 거예요. 휴대전화를 들고 저도 함께 펑펑 울었죠."

2시간에 걸쳐 특강과 문답이 이어지며 5. 18 정신에 대해 공유할 수 있었다.
▲ 강용주 광주 트라우마센터장의 특강 모습 2시간에 걸쳐 특강과 문답이 이어지며 5. 18 정신에 대해 공유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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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론을 마치고 돌아가며 소감을 나누는 자리에서다. 말하는 내내 그는 눈물을 글썽였고, 듣고 있던 심사위원들도 함께 눈이 붉어졌다. 그러면서도 '지금 내가 울면 함께 참가한 짝이 싫어할 것'이라며 심사 결과를 걱정하는 그의 '순진한' 모습이 더욱 슬펐다. 그는 뒤늦게 알게 된 엄마의 가슴에 멍울진 상처를 통해 5.18을 또렷이 기억하게 될 것이다.

"수업시간 한 번도 접하지 못한 5.18을 직접 현장에 와서 배우게 되어 느낀 게 많아요. '일베'처럼 5.18을 조롱하는 사람들 앞에서 이젠 당당히 맞설 수 있을 것 같아요. 5.18처럼 슬프고도 자랑스러운 역사를 너희들이 알기나 하느냐고. 이참에 일본 역사 교과서만 욕할 게 아니라 우리나라 교과서의 내용도 다시 꼼꼼히 살펴보면 좋겠어요."

다른 한 아이가 작별인사처럼 내게 건넨 말이다. 5.18을 '슬프고도 자랑스럽다'고 표현한 그의 뒷모습이 든든하게 느껴졌다. 이만하면 토론대회는 성공한 거라며 자위했다. 집에 돌아와 간만에 신문을 펴니 교육부가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 전환을 강행할 거라는 보도가 났다. 이를 두고 아이들은 뭐라고 답할지 갑자기 묻고 싶어졌다. 이를 토론 주제로 삼을 걸 그랬다.


태그:#5. 18 광주민주화운동, #토론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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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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