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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1996년 호암상 수상직후 뇌졸중으로 쓰러지고 6개월 만에 초인적 투병으로 다시 일어났고 그에 대한 사람들의 존경심은 날로 더 높아갔다. 그래서 1997년 그 권위를 자랑하는 '괴테상'과 1998년 '교토상'을 수상한다. 이어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에서 '미술학 명예박사'도 받는다. 그는 뉴밀레니엄이 시작되는 2000년 2월 뉴욕미술계를 뒤흔든 '구겐하임회고전'을 통해 금세기 최고의 작가임을 만천하에 선포한다. - 기자 말

1997년 '괴테상', 1998년 '교토상' 수상

백남준 I '20세기를 위한 32대의 자동차' 빈티지자동차 32대 1997. 자동차 8대씩 4그룹으로 배치한 이 작품은 1924년형 윌리(wheely)로부터 1959년형 뷰익(buick)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자동차의 변천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현재 삼성화재 교통박물관에 소장
 백남준 I '20세기를 위한 32대의 자동차' 빈티지자동차 32대 1997. 자동차 8대씩 4그룹으로 배치한 이 작품은 1924년형 윌리(wheely)로부터 1959년형 뷰익(buick)에 이르기까지 20세기 자동차의 변천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현재 삼성화재 교통박물관에 소장
ⓒ 삼성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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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6년 4월 백남준이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 겪은 치열한 투병기는 지난번에 소개했다. 그는 몸의 왼쪽을 쓰지 못했지만 다행히 오른쪽과 오른손은 사용할 수 있었고 그의 명석한 두뇌는 여전했다. 백남준의 진정한 가치는 그가 쓰러지고 난 후부터 더욱 빛났다. 그래서 그를 존경하는 세계미술계는 그에게 가장 권위 있는 미술상을 연이어 수여했다.

1997년 9월 18일에 65세의 백남준은 자신을 베토벤 이상으로 존경하는 독일에서, 독일의 노벨상이라고 하는 '괴테상'을 받았다. 독일에서는 그를 비디오아트의 창시자뿐만 아니라 존 케이지처럼 '새로운 음악(Neue Musik)'의 개척자로 평가했다.

그래서인가. 그해 백남준은 10년마다 독일 북서부 뮌스터 베스트팔렌 미술관에서 열리는 '뮌스터 조각프로젝트(Skulptur Projekte Münster)'에 초대받고 '20세기를 위한 32대의 자동차'를 출품한다. 여기 32대는 백남준이 탄생한 1932년에서 유래한다. 부제는 '모차르트 미사곡을 조용히 연주하라', 자동차의 종말을 위한 미사곡이었던 걸까.

김홍희 저서 <굿모닝 미스터 백>에 보면 백남준은 20세기 3가지 특징으로 '조직폭력, 미디어, 자동차 숭배'를 거론하면서 이를 풍자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는 쇠와 중력 등 20세기 하드웨어시대의 종말을 선언하고 인터넷 SNS 등 21세기 소프트웨어시대가 왔음을 알린다. 20세기 차속도와 21세기 전자초고속속도는 그 게임에서 경쟁이 안 된다.

백남준은 1997년 괴테상에 이어, 또 다음해 11월에는 일본의 노벨상이라 하는 '교토상'(상금 약 5억 원)을 받았다. 백남준은 답례로 <위너와 맥루한: 커뮤니케이션의 혁명>이라는 수상 연설을 했다. 또한 수상 인터뷰에서 "표현은 인간에게 자유를 주며 예술은 인간의 배설행위로 사회의 안전벨트 역할을 한다"라면서 표현의 자유가 인간행복의 핵심임을 밝힌다.

1998년 6월 권력가 앞에서의 해프닝

백악관 만찬장(1998년 6월 2일)에서 백남준과 악수하다 그의 바지가 흘러내린 걸 보고 당황해하는 클린턴대통령
 백악관 만찬장(1998년 6월 2일)에서 백남준과 악수하다 그의 바지가 흘러내린 걸 보고 당황해하는 클린턴대통령
ⓒ 청와대사진기자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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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6월 2일 김대중 전 대통령 방미에 맞춰 백남준 부부도 백악관 만찬장에 초대받았다. 거기서 백남준다운 해프닝이 일어났다. 그 엄숙한 자리에서 백남준은 클린턴 대통령과 악수하다 멜빵끈이 풀어졌다. 바지가 아래로 스르륵 내려갔는데 속옷도 안 입은 채라 아랫도리가 다 노출되는 대형사건이 터졌다. 보도는 안 됐지만 카메라에는 잡혔다.

당시 클린턴 대통령 부부는 물론 초대받은 고위인사들도 경악했다. 이걸 백남준이 몸이 불편해 생긴 실수라고 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에 대한 사람들의 의견은 지금도 분분하다.

예컨대 이건 연이은 섹스 스캔들을 일으킨 부도덕한 클린턴을 비꼰 것이라는 설과 백남준의 전자초고속도로 아이디어를 클린턴이 훔쳐가 선거 공약으로 도용한 걸 비판했다는 설이 있다. 또 '플럭서스' 출신인 백남준이 미국 대통령 같은 세계적 권력자 앞에서도 예술가로서의 굽히지 않는 기상을 제대로 보여준 퍼포먼스라는 설도 있다.

예상할 수 없는 이런 사건을 두고 그의 플럭서스 동료들은 "브라보"를 외쳤고, 다음날 전 세계에서 축하전화가 쏟아졌다. 미국 기자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무슨 의도냐고 물었지만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시게코 여사는 백남준이 "백악관 국빈만찬이라는 게 평생에 한 번 갈까 말까 하는 기회인데 이왕 갔으면 뭔가 해봐야지"라고 하는 말을 들었단다.

세계 최고 권력가 앞에서 전대미문의 해프닝을 보여준 그의 배짱, 이것은 그의 문화 칭기즈칸의 한 면모다. 그 의도가 어쨌든 아무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뉴욕 '프랫 인스티튜트'가 그에게 '미술학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는데 단상에 올라가서 한 말이라곤 "땡큐"뿐이었다. 이것 역시 화제가 됐다.

'백팔번뇌' '호랑이' 등 통해 세기말 표현

백남준 I '백팔번뇌(百八煩惱)' TV모니터 108개 1998. 경주세계문화엑스포
 백남준 I '백팔번뇌(百八煩惱)' TV모니터 108개 1998. 경주세계문화엑스포
ⓒ 경주세계문화엑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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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 후반기 역시 백남준은 분주했다. 국내에서 9월 7일부터 열린 제1회 경주세계문화엑스포에서 불교도시의 이미지를 살려 108개의 TV모니터가 만든 '백팔번뇌(百八煩惱)'를 출품했다. 이 작품은 동서 문화와 역사를 백팔번뇌로 번안한 것으로 낙관적 세계관을 보여줬다. 이후에 2007년 마드리드에서 열린 '아르코(ARCO)' 전에도 초청된다.

20세기 끝 해인 1999년 국내에서는 모교인 경기고 개교 100주년 판화전을, 양평 바탕골 예술관에서는 백남준 특별전을 열었다.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되면서 뉴욕 발 인터넷 강의도 했다. 뇌졸중으로 고생한 한 백남준은 누구보다 병원환자의 고초를 잘 알았기에 이들을 격려하려 '안심낙관'이라는 전자문자를 만들어 '우리들병원'에 설치하기도 했다.

그해 국외에서는 독일 루트비히미술관에서 '20세기 대표 작가'전과 브레멘미술관에서 '대형회고'전이 열렸다. <아트뉴스>지는 그를 20세기 최고작가 25인 중 하나로 선정했다.

백남준 I '호랑이는 살아 있다' DMZ 2000: The Millennium Celebration 45분 2000. 세종문화회관 1층 로비에 설치
 백남준 I '호랑이는 살아 있다' DMZ 2000: The Millennium Celebration 45분 2000. 세종문화회관 1층 로비에 설치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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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20세기를 보내고 21세기가 시작되는 2000년 1월 1일 0시에 판문점 임진각에서 새천년 통일기원으로 45분짜리 생방송 '호랑이는 살아있다(Tiger Lives)'를 선보였다. 그의 애국주의가 살짝 드러난 작품이다. 당시 나도 이 방송을 KBS에서 봤는데 그때가 생생하게 기억난다. 온몸이 찌릿찌릿할 정도로 큰 감동을 받았다.

이 작품은 미국공영방송 PBS와 영국 BBC가 주관해 미국 ABC가 송신을 받아 미국 전역방송 전 세계 77개국 방송망을 탔다. 백남준이 전 세계를 향해 던진 발언이었다.

한민족의 생동감 넘치는 모습을 형상화한 이 비디오를 보고 있으면 우리가 마치 신화적 민족이 된 듯하다. 백남준이 '금강에 살어리랏다'의 노래로 시작되는 이 작품은 지구의 평화와 한반도 통일에 대한 열망이 담겨있다. 그래선 가 아프리카 사자 싸워 이긴 백두산 호랑이가 나오는 북한 비디오도 포함시켰다. 뇌졸중 후 첫 위성 작품이라 의의가 더 컸다.

뉴밀레니엄 구겐하임전... 뉴욕을 뒤흔들다

구겐하임 레이저아트 전시초안을 위해 그린 백남준 스케치. 컬러사진 위에 아크릴물감 61×50.8cm 1999. 핸하르트 소장. 이 구겐하임회고전에서는 기존의 비디오작품과 함께 지그재그 초록색 레이광선을 구현한 TV정원과 한데 묶은 '동시변조', '3원소', '달콤하고 숭고한', '야곱의 사다리' 등 그의 레이저 작품이 한꺼번에 다 소개되었다. 이 작품을 하면서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기술진까지 동원됐다는 후문
 구겐하임 레이저아트 전시초안을 위해 그린 백남준 스케치. 컬러사진 위에 아크릴물감 61×50.8cm 1999. 핸하르트 소장. 이 구겐하임회고전에서는 기존의 비디오작품과 함께 지그재그 초록색 레이광선을 구현한 TV정원과 한데 묶은 '동시변조', '3원소', '달콤하고 숭고한', '야곱의 사다리' 등 그의 레이저 작품이 한꺼번에 다 소개되었다. 이 작품을 하면서 미국항공우주국(NASA)의 기술진까지 동원됐다는 후문
ⓒ 백남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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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간의 긴 준비 끝에 2월 11일부터 4월 26일까지 2000년 벽두에 뉴욕미술계를 뒤흔드는 '구겐하임 회고전 백남준의 세계(The World of Nam June Paik)'가 뉴욕을 강타했다. 휘트니미술관이 백남준의 데뷔전이었다면 68세 맞아 구겐하임에서 열린 그의 회고전은 그가 다시 세계적 예술가로서 우뚝 서게 하는 빅뱅 같은 대사건이었다.

1996년에 쓰러진 후 합병증으로 백내장까지 생긴 그가 어떻게 4년 만에 이런 큰일을 해냈을까. 시게코의 책을 보면 백남준은 "시게코, 내가 왼쪽은 못 썼지만 오른쪽은 살아 있잖아, 이건 내가 아직 창작을 해야 한다는 계시야, 안 그래"라며 열정으로 다시 불태웠다. 시게코는 그의 모습을 보고서 "이 사람이 정말 예술의 신으로 다시 부활하려는구나"라고 적어놨다.

사실 이 구겐하임 회고전이 성사되기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 과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이용우 미술평론가는 그의 책 <백남준, 그 치열한 삶과 예술>에서 당시 가장 힘든 건 전시비용을 마련하는 일이었다고 적었다. 이 때문에 지옥 같은 지난한 시간을 보냈고 가슴을 조이는 마음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단다.

물론 그를 돕는 조수와 후원자도 많았지만 백남준은 이 과정에서 미국주류 미술계 인사들과 파워게임 같은 팽팽한 긴장과 대결을 피할 수 없었음을 이용우씨는 책을 통해 전했다.

그건 그렇고, 이 전시는 어떻게 성사됐나? 이를 제안한 사람은 당시 구겐하임 관장 '토머스 크렌스(Thomas Krens)'다. 그는 1993년 백남준 베니스비엔날레 관전 후 그에게 매료됐다. 그에게 뉴밀레니엄 전시를 제안했고 1997년 12월에 결정이 났지만 예산 확보 때문인지 1998년이 돼도 이 전시를 외부에 공식적으로 발표하기를 꺼렸다.

백남준 I '3원소' 레이저, 거울 방, 프리즘, 모터, 연기 1997-2000. 이 작품은 만물의 기본형을 형상화한 것 구겐하임미술관과 서울 로댕미술관에서 소개되었다. 백남준은 모니터와 거울에 반사되는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 프리즘에 의해 분산된 레이저 빛이 밀폐된 공간에 오색찬연한 전자문양을 낸다. 또 그는 내가 죽을 때가 되니 이런 명상적이고 사색적인 작품이 좋다고 지인들에게 말했단다
 백남준 I '3원소' 레이저, 거울 방, 프리즘, 모터, 연기 1997-2000. 이 작품은 만물의 기본형을 형상화한 것 구겐하임미술관과 서울 로댕미술관에서 소개되었다. 백남준은 모니터와 거울에 반사되는 원리를 이용한 것으로, 프리즘에 의해 분산된 레이저 빛이 밀폐된 공간에 오색찬연한 전자문양을 낸다. 또 그는 내가 죽을 때가 되니 이런 명상적이고 사색적인 작품이 좋다고 지인들에게 말했단다
ⓒ 백남준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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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백남준은 속이 탔고 동료 큐레이터 핸하르트 등과 후원자 물색에 동분서주했다. 그는 1998년 운좋게 교토상 수상자가 돼 상금으로 무려 40만 달러(약 5억 원)를 받았다. 그래서 백남준은 생활비 10만 달러를 빼고 나머지는 다 구겐하임에 기증했다. 그때서야 구겐하임도 이 전시를 공식화하기 시작했다.

백남준의 교토상 기부에도 미술관 측에서 세운 예산에서 보면 아직 예산이 충분히 확보된 건 아니었다. 그래서 1999년 10월까지도 전시 성사가 결정나지 않았으나 마침 11월 중순 삼성전자가 전자장비 제작비 등을 지원하겠다고 나서 그 위기를 넘겼다.

21세기 벽두 300백만 달러가 들어간 이 전시는 이 미술관 개관이래 총 25만8187명이 입장해 관객 수에서도 기존의 기록을 깼다. 전시가 개막하자 방송과 언론에서 '백남준의 구겐하임 점령'이라는 제목이 터져 나왔고, <뉴욕타임스> 다음날 이례적으로 2쪽짜리 대서특필을 내보냈다. CBS는 30분짜리 백남준 특집방송을 편성했다.

3일간 열린 오프닝 리셉션에는 2000여 명의 후원자와 작가와 미술관계자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그리고 인터뷰도 쇄도해 백남준은 몸살을 앓았다. 그때 백남준은 "성공 뒤 나른한 피곤이 즐겁다"라는 남을 남겼다고 이용우씨는 전한다. 힘든 병마와 싸운 지 3년 만에 선보인 그의 이 전시를 상상해보면 마치 베토벤의 '환희의 송가'를 듣는 것 같다.

백남준 포스트비디오, '레이저아트'

백남준 I '동시 변조'와 '감미로움과 숭고함' 레이저 2000. 구겐하임회고전과 서울 전 때 선보인 작품으로, 특히 서울 로댕미술관에서는 천장에 설치된 50대 TV화면에 주역의 괘에 따라 움직이는 레이저그래픽을 보여줘 이 세계가 우주의 원리에 따라 돌아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백남준 I '동시 변조'와 '감미로움과 숭고함' 레이저 2000. 구겐하임회고전과 서울 전 때 선보인 작품으로, 특히 서울 로댕미술관에서는 천장에 설치된 50대 TV화면에 주역의 괘에 따라 움직이는 레이저그래픽을 보여줘 이 세계가 우주의 원리에 따라 돌아가고 있음을 알려준다
ⓒ 삼성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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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마침내 뉴밀레니엄에 최첨단 '레이저아트'시대를 열었다. 그런데 이게 오래전부터 착상된 것임을 시게코는 알려준다. 1965년 이미 백남준은 스웨덴 전자기술자 및 예술가인 '빌리 클뤼버(Billy Llüver)'에게 "전자분야에서 획기적 발전을 가져온 레이저 기술이 앞으로 예술분야에서도 큰 역할을 하길 기대한다"라는 편지를 보낸 적이 있단다.

실제로 백남준은 1980년 초 독일의 실험예술가 '호스트 바우만'과 함께 레이저를 활용한 비디오 작품을 발표했고, 베니스 비엔날레가 끝나고 2년 후에는 독일 뭔스터에서 바로크건축에 레이저를 쏘아 올리는 작품 '바로크 레이저(Baroque Laser)'도 발표했다.

구겐하임 전시에서 하이라이트인 '야곱의 사다리'는 인공 광선이 주는 감미로운 숭고미를 구현한 것으로, 구약에 신의 축복을 받아 일취월장하는 전설적 인물 '야곱'을 주인공으로 한 것이다. 이는 지상과 천상을 잇는 네트워킹으로 그의 예술이 이제는 지구촌뿐만 아니라 전 우주와도 연결되고 확장됨을 입증했다.

이렇게 해서 백남준은 다시 예술의 거장으로 거듭났다. 레이저 빛으로 TV모니터에 갇힌 전자 빛을 해방시켰다. 비디오 이후 레이저 작업을 하게 된 걸 백남준은 "과일도 사과만 먹는 것보다 키위도 먹고 망고도 먹는 게 더 즐겁고 새롭지 않은가"라고 정당화했다. 다만 그는 작가인 아내가 자신 때문에 작업시간을 너무 뺏기는 걸 늘 미안해했다.

이 전시를 당시 현장에서 본 <동아일보> 김민경 기자는 백남준이 기자회견 말미에 "우리나라가 20세기에 고생을 많이 했지만 21세기엔 동북아 중심이 될 것이다"라고 한 덕담을 전하면서 당시 그 현란하고 환상적인 전시 분위기를 다음과 같은 기사로 남겼다.

"백남준은 떨어지는 물줄기 사이로 녹색 레이저 광선을 지그재그 모양으로 거울에 반사시킨 '야곱의 사다리'로 땅과 천장을 연결해 완전히 새로운 공간을 창조했다. 바닥에는 100개의 TV모니터가 빛났고 천장에는 땅에서 쏘아올린 레이저가 수학적이고 절대적인 미를 상징하는 원을 그려냈다. 이로써 하늘과 땅은 완전히 하나가 됐다."

구겐하임 건물 그 자체가 예술품

나는 백남준 리서치를 위해 올 6월 한달 간 뉴욕에 갔다 지인을 통해 백남준 조수를 7년간 한 '라파엘레 셜리'을 만났다. 또 그녀의 소개로 구겐하임미술관 수석매니저 '마이클 사르프(M. Sarff)'도 알게 되었다. 운 좋게 그의 초대로 2015년 6월 25일 '도리스 살세도(Doris Salcedo)전' 오프닝 리셉션에도 참석했다. 이 사진은 행사가 막 시작되는 때라 관객이 적다
 나는 백남준 리서치를 위해 올 6월 한달 간 뉴욕에 갔다 지인을 통해 백남준 조수를 7년간 한 '라파엘레 셜리'을 만났다. 또 그녀의 소개로 구겐하임미술관 수석매니저 '마이클 사르프(M. Sarff)'도 알게 되었다. 운 좋게 그의 초대로 2015년 6월 25일 '도리스 살세도(Doris Salcedo)전' 오프닝 리셉션에도 참석했다. 이 사진은 행사가 막 시작되는 때라 관객이 적다
ⓒ 김형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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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은 또 <아트뉴스>와 인터뷰에서 "다양한 작품을 유기적으로 전시할 수 있게 해준 구겐하임 건축가 '프랑크 로이드 라이트'가 고맙다"라고 했지만 이 건물은 실로 전시하기 데 난이도가 높았다. 그럼에도 백남준은 이 미술관 자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보고 이마저 예술화했다. 그래서 전시 후 이 미술관을 가장 잘 활용한 작가로도 평가받는다. 

그런 평가를 받는 데는 숨은 노력이 있었다. 달팽이꼴의 이 건물을 다각도로 검토하려고 백남준도 현장을 여러 번 갔으나 이에 만족 못하고, 이정성씨 외 미국 조수에게 명령을 줘 도면을 비밀 촬영하게 했다. 몇 번 관리인에게 걸리는 수모 끝에 전체 촬영을 완료했다. 이걸 받아본 백남준은 뛸 듯이 좋아했다. 그걸 기초로 전시 계획을 짰다.

또한 시게코는 백남준이 "한국창제의 원리인 '천지인' 개념을 도입해 7층 미술관 천장은 '천(天)'으로, 아래 100대의 TV가 널린 TV정원은 '지(地)'로, 중간 전시물과 레이저 사다리를 타고 승천하는 야곱은 '인(人)'으로 보면서 전시를 자리매김했고, 거기다 기마 민족의 활기찬 기상을 담는 등 '그의 상상력은 가히 천재적이었다'"라고 추켜세웠다.

삼성 주최로 '구겐하임 회고전' 서울순회전

삼성미술관 주최로 2000년 7월 21일부터 10월 29일까지 호암갤러리와 로댕갤러리에서 열린 백남준 구겐하임회고전 서울순회전 포스터
 삼성미술관 주최로 2000년 7월 21일부터 10월 29일까지 호암갤러리와 로댕갤러리에서 열린 백남준 구겐하임회고전 서울순회전 포스터
ⓒ 삼성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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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 7월 21일부터 3개월간 삼성 미술관 주최로 백남준 구겐하임 회고전 서울전이 호암갤리리과 로댕갤러리에서 다시 열렸다. 1992년 국내에서 '비디오 때, 비디오 땅' 이후 가장 큰 백남준 전시였다. 로댕갤러리에서는 구겐하임 미술관과 다르게 파빌리온(유리원형)을 암실로 바꾸고 거기에 레이저를 쏴 색다른 공간을 연출했다.

이 기념비적인 작품은 구겐하임 때와 마찬가지로 서울 전에서도 미국의 레이저 작가 '노만 발라드(N. Ballard)'와 다른 협력자 그 중 '라파엘레 셜리(Raphaele Shirley)'도 참여했다. 여기에 삼성 레이저 팀도 추가돼 전시가 진전됐다.

백남준은 뉴욕 구겐하임전과 새천년 준비위원 활동 등 공로로 김대중 정부로부터 2000년 '문화의 날'에 '금관문화훈장'을 받는다. 이날 수상 소감에서 "내가 이런 좋은 상을 탈 줄 알았다면, '백'씨 대신 '천'씨 성을 타고나 오래오래 살면서 훌륭한 작품을 더 만들면 좋았을 것"이라며 농담을 던지는 여유도 보였다.

2001년에는 이 순회전이 스페인 '빌바오 구겐하임미술관'으로 옮겨졌다. 그리고 백남준은 그해 영국에서 발간하는 <그로브 음악대사전>에 현대 작곡자로 등재됐다. 2002년 5월에는 용인민속촌에서 백남준 특별전 '세기말 새천년'이 열렸고, 2002년에는 뉴욕 한복판 록펠러센터에서 그의 레이저아트 '트랜스미션(전환)'이 소개됐다.

○ 편집ㅣ김지현 기자

덧붙이는 글 | 백남준 연재기사(1997-2002) 2부에서는 7년간 백남준 조수를 한 '라파엘레 셜리'와 인터뷰가 이어진다.



태그:#백남준, #시게코, #이용우, #김홍희, #뉴욕 구겐하임회고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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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중 현대미술을 대중과 다양하게 접촉시키려는 매치메이커. 현대미술과 관련된 전시나 뉴스 취재. 최근에는 백남준 작품세계를 주로 다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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