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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당시 조선수군 재건에 나섰던 이순신이 묵은 것으로 알려진 양산원의 집 터. 전남 보성군 득량면 박실마을에 있다.
 정유재란 당시 조선수군 재건에 나섰던 이순신이 묵은 것으로 알려진 양산원의 집 터. 전남 보성군 득량면 박실마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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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7년 8월 9일(양력 9월 19일), 보성 조양창에서 군량미를 손에 넣은 이순신은 김안도의 집으로 향했다(관련기사 : 백의종군한 이순신, 여기서 웃었다). 이순신은 자리에 눕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이튿날 아침, 이순신은 잠자리에서 일어나기가 버거웠다. 하룻밤 푹 잤는데도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이러다가 크게 아프지나 않을까 걱정됐다.

이런 몸을 이끌고 길을 나선다는 게 자칫 다른 군관들에게 짐이 될까 걱정됐다. 이순신은 배흥립에게 자신의 몸 상태를 얘기해주며 여기서 하루 더 머물자고 했다. 정읍 고부 출신의 배흥립은 이순신의 신망이 두터운 전장의 동지였다.

이순신은 김안도의 집에서 이틀을 쉬며 몸을 돌봤다. 하지만 그의 뇌리는 고뇌의 연속이었다. 확보한 군량미를 어떻게 옮길 것인지가 문제였다. 함께 있던 배흥립과 머리를 맞댔다. 최측근에서 보좌하고 있는 송희립, 최대성과도 만나 구체적인 방안을 상의했다.

그 사이 군사들은 허기졌던 배를 오랜 만에 채웠다. 군사들도 이순신을 핑계 삼아 푹 쉬면서 먼 길 떠날 힘을 얻었다. 몸이 아직도 성하지 않았지만 이순신은 더 이상 여기서 계속 머물고 있을 수 없었다. 해안의 출구를 확보하는 게 시급했다.

우천리 삼층석탑. 탑의 몸체부터 꼭대기의 장식까지 비례가 잘 맞아 미려하다.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보물로 지정돼 있다.
 우천리 삼층석탑. 탑의 몸체부터 꼭대기의 장식까지 비례가 잘 맞아 미려하다.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으로 보물로 지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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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내마을에서 박실마을로 가는 길에 만나는 감동마을 느티나무. 수령 380년을 자랑한다.
 고내마을에서 박실마을로 가는 길에 만나는 감동마을 느티나무. 수령 380년을 자랑한다.
ⓒ 이돈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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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조양창에서 군량미를 확보하고 이틀을 묵은 김안도의 집은 현재 정확한 위치를 추정할 수 없다. 이순신은 박실(박곡)마을로 향했다. 지금의 고내마을에서 오봉산 자락을 따라가는 길이다. 그 길을 따라간다. 지난 8월 11일이었다.

이순신이 지난 길은 지금의 대동마을을 거쳐 대동저수지와 신방저수지를 끼고 조성초등학교로 가는 노정이다. 오봉산(392m)은 다섯 봉우리의 기암괴석이 있다고 이름 붙었다. 신라 고승 원효대사가 수도했다는 산이다. 산정에서 득량만과 고흥반도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이순신이 지나던 당시에는 바다가 산자락 바로 앞에까지 펼쳐졌다. 바다에 큰 포구도 많았다. 하지만 방조제를 쌓으면서 바다가 막히고 포구도 사라졌다. 대동마을을 지나면서 만나는 '우천리 삼층석탑'이 반갑다. 옛날에 징광사의 말사가 있었다고 전해지는 들녘이다. 탑의 몸체에서부터 꼭대기의 장식까지 비례가 잘 맞아 미려하다. 통일신라시대의 석탑이다. 보물로 지정돼 있다.

우천리 삼층석탑을 보고 청능마을을 지난다. 길섶에 '석조인왕상'을 가리키는 작은 안내판이 서 있다. 석조상은 신방저수지 제방 밑 논두렁에 있다.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신방마을도 호젓하다. 바다가 보이는 마을답게 돌담이 줄지어 있다. 길은 감동마을과 호동마을을 거쳐 파청마을을 지난다. 2번 국도 상에 예당휴게소가 있는 마을이다. 파청마을을 지나면 바로 박실마을에 이른다.

보성 박실마을 표지석.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이순신에게 군량미를 안겨준 마을이다. 당시 양산원의 집이 이 마을에 있었다.
 보성 박실마을 표지석.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이순신에게 군량미를 안겨준 마을이다. 당시 양산원의 집이 이 마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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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당시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이순신이 군량미를 손에 넣고 묵었던 양산원의 집 터. 그 자리에 오매정이 복원돼 있다. 보성군 득량면 박실마을에 있다.
 정유재란 당시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이순신이 군량미를 손에 넣고 묵었던 양산원의 집 터. 그 자리에 오매정이 복원돼 있다. 보성군 득량면 박실마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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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박실마을에 들른 것은 영해부사 양산원의 집을 염두에 둔 행보였다. 양산원(양산항)은 참봉 양응덕의 아들이며 학포 양팽손(1488∼1545)의 손자다. 기묘명현의 후손이다. 기묘명현은 정암 조광조와 함께 중종 때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사림을 가리킨다. 이순신과는 대대로 정을 나눠온 가문이었다.

이순신이 양산원의 집에 도착했으나 집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하인들도 보이지 않았다. 집주인을 만나지 못한 이순신은 집의 창고에 관심을 가졌다. 양산원이 상당한 부자였기 때문이다. 양산원의 창고에는 곡식이 가득 쌓여 있었다. 이순신은 군사들로 하여금 양산원의 집 창고에 있던 식량을 거두도록 했다.

이순신은 고내마을의 조양창에서 구한 식량에다 양산원의 집에서 얻은 것까지 있어 군량미 걱정을 완전히 떨칠 수 있었다. 이제 무기와 전함만 갖춘다면 조선수군의 진용을 구축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보성 득량역 전경. 득량역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경전선의 간이역이다. 옛 간이역의 정취를 느낄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보성 득량역 전경. 득량역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경전선의 간이역이다. 옛 간이역의 정취를 느낄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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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량역 앞에 조성된 추억의 거리. 옛 이발관과 다방 등이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다. 1970년대 전후의 모습을 볼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득량역 앞에 조성된 추억의 거리. 옛 이발관과 다방 등이 지금도 영업을 하고 있다. 1970년대 전후의 모습을 볼 수 있어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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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골마을에 있는 열화정. 이진만이 후진 양성을 위해 지은 집이다. 강골마을에는 광주 이 씨 등의 옛집이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강골마을에 있는 열화정. 이진만이 후진 양성을 위해 지은 집이다. 강골마을에는 광주 이 씨 등의 옛집이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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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군사들이 먹을 식량을 구한 곳이 득량만 일대다. 이곳의 지명이 '득량(得糧)'으로 된 것도 여기서 유래한다. 득량만은 지금도 간척지에서 쌀이 많이 난다. 차진 갯벌에서 꼬막과 조개, 바지락 등도 넉넉하게 채취한다.

가까운 곳에 득량역이 있다. 득량역은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경전선(慶全線)의 역이다. 경전선이 개통된 1930년 문을 열었다. 지금은 옛 간이역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역사로 거듭나 많은 사람들이 찾고 있다. 역 앞에 추억의 거리도 있다. 1970∼1980년대 풍경이 살아있다.

강골마을도 여기서 멀지 않다. 강골마을은 광주 이씨 등의 옛집이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는 마을이다. 1845년 이진만에 의해 지어진 이용욱 가옥을 비롯 이금재 가옥, 이식래 가옥 등 고택이 남아있다. 이진만이 후진 양성을 위해 지은 열화정도 있다.

이순신이 양산원의 집에 머물고 있을 때였다. 저녁 나절에 군관 송희립과 최대성이 찾아왔다. 고흥 과역 출신의 송희립은 이순신을 최측근에서 보좌한 장수다. 보성 겸백 출신의 최대성은 보성의 후방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양산원의 집에서 가까운 데에 최대성 장군과 두 아들의 충절을 기리는 충절사가 있다. 최대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의 부하장수로 나서 한산대첩 등에서 큰 공을 세웠다. 정유재란 때는 두 아들과 동생을 포함한 의병 수천을 이끌고 순천과 고흥, 보성 등지에서 왜군을 무찔렀다.

최대성 장군과 두 아들의 충절을 기리는 충절사 전경. 양산원의 집 터가 있는 박실마을에서 가까이 있다.
 최대성 장군과 두 아들의 충절을 기리는 충절사 전경. 양산원의 집 터가 있는 박실마을에서 가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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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당시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이순신이 머물렀던 양산원의 집 터. 석축을 길게 쌓아 만든 연못과 맞닿아 있다. 전라남도 보성군 득량면 박실마을에 있다.
 정유재란 당시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이순신이 머물렀던 양산원의 집 터. 석축을 길게 쌓아 만든 연못과 맞닿아 있다. 전라남도 보성군 득량면 박실마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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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성이 보성 일대의 전시 상황과 왜군의 실태를 파악해 와서 보고했다. 이순신은 선소와 득량 일대 포구에 잔존하는 전선의 정보도 물었다. 선소는 이순신이 임진왜란 때 병졸을 주둔시키면서 무기와 군량미를 모으고 병선을 만들었던 곳이다. 이순신은 더 자세한 정보를 얻기 위해 연안 포구와 선소, 석대, 장흥 회령으로 전령을 보냈다. 보성 관원과 선소 군관들에게는 소집 전령을 전달했다.

보성군수가 전령을 받고 가장 먼저 들어왔다. 거제현령 안위와 발포만호 소계남도 뒤를 이어 합류했다. 안위와 소계남은 함대를 운항하는 기술이 뛰어난 장수들이었다. 첩보를 수집하러 나간 군관들도 속속 돌아왔다. 경상우수사 배설과 다른 장수들의 소재도 파악해 보고했다. 배설과 함께 칠천량 전투에서 살아남은 함대의 이동상황도 소상히 전했다.

정유재란 당시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이순신이 머물렀던 양산원의 집 자리. 보성군 득량면 박실마을에 있다. 지금은 양산원의 후손인 양재평(82) 씨가 살고 있다.
 정유재란 당시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이순신이 머물렀던 양산원의 집 자리. 보성군 득량면 박실마을에 있다. 지금은 양산원의 후손인 양재평(82) 씨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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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이 머문 양산원의 집은 박곡마을에 있다. 산자락에 차밭이 있다고 다전(茶田)마을로도 불린다. 제주 양씨의 집성촌이다. 양산원의 집 터에는 현재 그의 후손인 양재평(82)씨가 살고 있다. 석축을 길게 쌓아 만든 연못과 맞닿아 있다. 5그루의 매화나무 아래에 있던 오매정(五梅亭)이 복원돼 있다.

오매정은 2000년 초 이 마을이 문화마을로 조성되면서 세웠다. 지난 11일 오매정에서 두 할머니가 쉬고 있다. 구선월(89·해남댁)·송정순(80·박매댁) 할머니다. 할머니들은 이순신이 머물면서 식량을 구해 간 마을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집 앞에는 500살 정도 돼 보이는 소나무 6그루가 서 있다. 양재평씨가 어렸을 때만 해도 소나무 20여 그루가 있었단다. 그 아래에 '절충장군수 전라도병마절도사 양공휘우급 유장비(折衝將軍守 全羅道兵馬節度使 梁公諱禹及 遺庄碑)'가 서 있다. 전라병마절도사 양우급의 고택임을 알리는 비석이다. 양우급은 양산원의 증손자다. 제주 양씨 종회에서 세워 놓았다.

양산원의 집 앞에 복원된 오매정에서 만난 박실마을 할머니들. 오른쪽이 해남댁 구선월(89), 왼쪽이 박매댁 송정순(80) 할머니다. 할머니들은 이순신이 머물면서 식량을 구해 간 마을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양산원의 집 앞에 복원된 오매정에서 만난 박실마을 할머니들. 오른쪽이 해남댁 구선월(89), 왼쪽이 박매댁 송정순(80) 할머니다. 할머니들은 이순신이 머물면서 식량을 구해 간 마을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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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원의 집 터 앞에 세워져 있는 ‘절충장군수 전라도병마절도사 양공휘우급 유장비(折衝將軍守 全羅道兵馬節度使 梁公諱禹及 遺庄碑)’다. 전라병마절도사 양우급의 고택임을 알리는 비석이다. 양우급은 양산원의 증손자다.
 양산원의 집 터 앞에 세워져 있는 ‘절충장군수 전라도병마절도사 양공휘우급 유장비(折衝將軍守 全羅道兵馬節度使 梁公諱禹及 遺庄碑)’다. 전라병마절도사 양우급의 고택임을 알리는 비석이다. 양우급은 양산원의 증손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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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이 집에서 충청도순변사를 지낸 윤선각에게 장계 7통을 써주었다. 장계의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이순신의 이후 행선지로 미뤄볼 때 바다로 나가겠다는 의지를 담은 내용으로 추정된다. 그 중의 몇 통은 선조 임금과 조정의 대신들에 보내는 것이지 않았을까 싶다.

이순신은 다른 군관들에게도 임무를 부여했다. 이순신은 여수와 하동 쪽에도 전령을 보냈다. 연해안에 진지를 구축하고 있는 왜군의 이동상황을 파악하는데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양산원의 집 터에 세워진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 재건로 안내판. 그 옆에는 복원된 오매정에서 마을 주민들이 쉬고 있다. 양산원의 집은 정유재란 당시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이순신이 군량미를 구하고 묵었던 곳이다.
 양산원의 집 터에 세워진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 재건로 안내판. 그 옆에는 복원된 오매정에서 마을 주민들이 쉬고 있다. 양산원의 집은 정유재란 당시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이순신이 군량미를 구하고 묵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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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원의 집 터 자리와 복원된 오매정 전경. 정유재란 당시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이순신이 군량미를 구하고 묵었던 곳이다. 마을 뒷산에 차밭이 있다고 다전(茶田)마을로도 불린다.
 양산원의 집 터 자리와 복원된 오매정 전경. 정유재란 당시 조선수군 재건에 나선 이순신이 군량미를 구하고 묵었던 곳이다. 마을 뒷산에 차밭이 있다고 다전(茶田)마을로도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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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 기사에 참고한 자료.
남도 이순신길 조선수군재건로 고증 및 기초조사(전라남도)
이순신의 수군재건 활동과 명량대첩(노기욱, 역사문화원)
명량 이순신(노기욱, 전남대학교 호남학연구원)

- 이 기사는 전남새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박곡마을, #박실마을, #양산원의집, #조선수군재건로, #보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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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찰이 일상이고, 일상이 해찰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전남도청에서 홍보 업무를 맡고 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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