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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까마우시 수상 가옥에서 드디어 '베트콩'을 만났다. 사진 왼쪽이 바이 할아버지, 오른쪽이 탄 할아버지다.
 베트남 까마우시 수상 가옥에서 드디어 '베트콩'을 만났다. 사진 왼쪽이 바이 할아버지, 오른쪽이 탄 할아버지다.
ⓒ 김성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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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듣던 '베트콩'을 만나러 가는 길은 멀었다. 여행 3일차였던 지난 7월 27일, 싸우 탄 할아버지와 바이 할아버지라고 불리는 베트콩 참전 군인을 만나기 위해 '명진 스님과 함께 떠나는 베트남 평화기행'에 참가한 일행은 1시간이 넘는 거리를 배로 달려야 했다.

그리고 도착한 까마우시 수상 가옥에서 마주한 베트콩 참전 군인의 모습은 우리나라 여느 시골 노인분과 다르지 않았다. 올해 70세로 이름이 '싸우 탄'이라는 할아버지는 마치 개구쟁이처럼 재미있는 표정을 가진 분이었다. 또 탄 할아버지보다 두 살이 더 많다는 바이 할아버지는 마치 시골학교 교장 선생님처럼 점잖고 다정함이 넘쳤다.

그러한 두 분을 마주하며 나는 잊었던 어릴 적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바로 내가 국민학교(현 초등학교)에 입학했던 우리나라 1970년 대, 그때 같은 동네의 한 아저씨에 대한 기억이었다. 베트남 참전 군인이었던 그 아저씨가 나에게 들려주었던 베트남 전쟁과 베트콩에 대한 이야기였다.

만나면 죽여야 할 집단 '베트콩'

아마 그 시절을 거친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익숙한 몇가지 구호가 있다. 예를 들어 '때려잡자 공산당, 무찌르자 김일성' 같은 반공 구호다. 그것처럼 그 당시 베트남 전쟁에 대한 이야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베트남 참전은 그때나 지금이나 자랑이었다. 그 아저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라는 노래가 유행했던 그때, 베트남 참전 군인이었던 아저씨는 어린 나를 붙잡고 자신의 무용담을 늘어 놓곤 했다. 돌이켜 보면 그 아저씨도 당시 30대 초반이나 되었을까.

그중 지금도 기억에 남는 몇 가지 기억은 차마 민망하여 입 밖에 꺼내놓기 어렵다. 가장 많은 이야기는 전쟁중 베트남 여자에 대한 무용담이었다.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으나 비탈진 땅 위에서 말뚝을 박은 후 그곳에 발을 지지한 상태에서 여자를 겁탈했다는 말은 지금까지도 생생한 기억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베트콩을 '잡아 죽인' 무용담이었다. 나와 내 또래 아이들이 관심을 갖고 바짝 다가서니 말하는 아저씨는 더욱 신났던 것 같다. 그랬다. 그 당시 베트콩을 죽였다는 것은 '사람이 사람을 죽인 행위가 아니라' 당연히 죽여야 할 적을 '아주 잘 죽인' 영웅담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을 의심한 적도, 또 그것이 나쁘다는 것도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공산당은 때려 잡고 김일성은 무찔러야 할 대상인 것처럼 베트콩 역시 그렇게 때려잡고 무찔러야 되는 존재라고 나는 배웠다. 그렇기에 당시 그 아저씨의 무용담은 듣고 있기에 거북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저 존경스럽고 용맹한 대한민국 참전 군인의 모습이었다.

그렇게 나는 성장했다. 아마도 그 시절에 나처럼 같은 유년기를 보낸 이들은 모두 비슷한 경험을 갖고 있지 않을까. 그리고 나는 그것을 망각했다. 우리나라가 베트남에 참전했다는 것도, 그때 그 아저씨에게 들었던 전쟁 과정에서의 일들이 사실은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는지 되새겨 본 적도 없었다.

까마우 수상가옥에서 만난 두 할아버지가 베트남 평화기행 참가단들에게 당시 일부 한국군의 잔인한 만행을 전하고 있다.
 까마우 수상가옥에서 만난 두 할아버지가 베트남 평화기행 참가단들에게 당시 일부 한국군의 잔인한 만행을 전하고 있다.
ⓒ 김성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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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잊었던 전쟁을 다시 만난 것은 내 나이 40대 중반을 넘긴 지난 7월이었다. 그곳에서 나는 베트남 전쟁과 참전 군인 베트콩을 마주하면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우리나라 베트남 전쟁 참전 군인 아저씨에게 들었던 베트콩은 사람이 아니었는데 그분들은 너무도 평범한 할아버지였기 때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1시간여에 걸친 간담회가 끝난 후 점심 먹는 자리에서 바이 할아버지는 연신 삶은 새우의 껍질을 벗겨 자신들의 전우와 국민을 가해했던 나라의 손님들 입에 일일이 넣어줬다. 새우 껍질 까는 것이 귀찮아 접시에 그대로 남기자 바이 할아버지가 직접 손으로 까준 것이다.

결국 일흔 두 살의 바이 할아버지 친절 앞에서 사람들은 입을 벌려 새우를 먹었다. 그렇게 바이 할아버지는 그 많은 새우의 껍질을 벗겨 모두의 입에 다 넣어 줬다. 나 역시 바이 할아버지가 입에 넣어준 삶은 새우를 씹었다. 그러면서 그때, 동네 베트남 파병 군인 아저씨가 나에게 들려줬던, 잊고있던 그 무용담을 떠올렸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나는 내가 무용담으로 흥미롭게 들었던 그 많은 이야기 속 베트콩 중 한 명이었던 바이 할아버지와 탄 할아버지에게 미안했다. 도대체 왜 이처럼 선량한 '베트콩'들을 우리는 '당연히 죽여야 할' 적으로 여긴 것일까.

베트남 전쟁은 무엇인가

베트남 전쟁의 시작은 1945년부터였다. 이때 베트남 독립 동맹의 지도자였던 호치민은 100년에 가까운 프랑스의 오랜 식민 지배를 거부하는 독립을 선포한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사람들은 모두 생명, 자유, 행복을 추구할 천부의 권리를 조물주로부터 부여받았다."

많은 사람들이 베트남 전쟁을 '이념전쟁'이라고 생각한다. 베트남전은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위하여 벌인 전쟁이다. 전쟁증적박물관에서 촬영.
 많은 사람들이 베트남 전쟁을 '이념전쟁'이라고 생각한다. 베트남전은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위하여 벌인 전쟁이다. 전쟁증적박물관에서 촬영.
ⓒ 김성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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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9월 2일 베트남 하노이 바딘 광장에서 호치민은 이렇게 독립선언의 서문을 읽었다. 호치민은 우리나라로 치면 '베트남의 백범 김구'같은 존재였다. 한편 호치민이 독립선언을 읽던 그날은 일본이 연합군에 항복 조인한 날이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베트남을 침략했던 일제가 패망하자 베트남 역시 우리나라처럼 독립을 선언한 것이었다.

하지만 베트남의 독립선언은 또 다른 전쟁을 불러왔다. 1946년, 베트남의 독립을 반대하는 프랑스가 다시 베트남을 침략했다. 프랑스의 속국으로 베트남을 계속 두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8년에 걸친 전쟁은 베트남의 승리로 끝났다. 이것이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년 12월 19일 - 1954년 8월 1일)이었다.

하지만 이날의 승리로 끝났어야 할 베트남의 비극이 그러지 못했다. 다시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었다. 베트남은 우리나라와 너무도 흡사한 과정을 답습했다. 자기 나라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했다. 1954년 제네바 협정 때문이었다. 소련과 미국은 베트남을 남과 북으로 분단시켰다. 그래서 북은 소련이 지원하는 공산주의가, 남은 미국이 지원하는 자본주의 정부가 들어섰다.

결국 비극은 1955년 11월 1일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부패한 남베트남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내전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고 이 내전은 1975년 4월 30일까지 계속되었다. 처음엔 내전으로 시작되었으나 이후 미국의 개입으로 국제 전쟁으로 비화된 이 전쟁. 이것이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으로 불리는 '미국에 의한 베트남 전쟁'이었다. 우리나라가 개입한 전쟁이 바로 이때였다.

이처럼 길고 긴 베트남 전쟁을 간단히 설명하는 것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전쟁을 매우 간단하게 설명하는 글이 있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베트남 전쟁'이라는 검색어로 어학 사전을 검색하면 나오는 설명이다.

베트남 전쟁 -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위하여 벌인 전쟁'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베트남 전쟁'을 검색하면 나오는 설명은 아주 간결하고 짧다.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위하여 벌인 전쟁' 어학 사전 설명이다.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베트남 전쟁'을 검색하면 나오는 설명은 아주 간결하고 짧다.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위하여 벌인 전쟁' 어학 사전 설명이다.
ⓒ 고상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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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이들은 베트남 전쟁을 이념 전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베트남은 이념 전쟁도 아니고 다른 나라가 개입해야 할 전쟁도 아니었다. 이러한 주장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바로 박정희의 '영원한 경호실장' 차지철의 주장이었다.

1964년 8월 미국은 스스로 조작한 '통킹만 사건'을 명분으로 베트남 전쟁에 본격 개입한다. 그러면서 우리나라에게도 베트남 전쟁에 파병할 것을 요구하고 나선다. 이유가 있었다. 황인종을 상대로 백인이 부당하게 개입한 전쟁이라며 '인종간 분쟁'이라는 비난이 일자 이를 모면할 길을 찾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한국군의 파병이었다. 즉, 황인종도 같이 싸워 달라는 것이었다.

박정희는 이러한 미국의 요구를 수용하기로 한다. 그때 외무장관이었던 이동원이 박정희를 찾아와 뜻밖의 제안을 하고 나섰다. "기왕 참전하기로 했으니 이참에 더 많은 참전 대가를 미국에 요구하자"는 제안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누군가 반대하고 나서야 하는데 반대하는 이들이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파병 논의 초기였던 1965년 당시, 우리나라에서 뜨거운 이슈는 베트남 파병이 아니라 박정희가 비밀리에 추진하던 한일 협정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야당 역시 미국의 외교 작업으로 '파병에 반대하지 않기로' 입장을 정리한 상태였다.

이처럼 아무도 반대하지 않자 난감해진 그때, 또 다시 이동원 장관이 아이디어를 냈다. "파병 반대를 꼭 야당만 하라는 법은 없다"는 묘안이었다. 이 말을 알아들은 박정희는 곧 바로 당시 국회 국방위원이었던 차지철을 부른다.

그리고 박정희로부터 "베트남 파병 반대 여론을 국회에서 주도하라"는 밀명을 받은 차지철은 그때부터 베트남에 대한 공부를 시작한다. 그리고 결과는 놀라웠다. 차지철, 그의 진짜 반란이 시작된 것이다.

차지철의 반란, 베트남 파병 끝까지 '반대'

애초 차지철은 베트남 전쟁 파병 찬성론자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그런 자신에게 "국회 내에서 파병 반대를 주도하라"는 박정희의 밀명을 받은 후 차지철은 당황했다. 하지만 차지철이 누구인가. 주군인 박정희의 명령이었다. 5.16 쿠데타로 시작된 그의 충성심은 죽을 때까지 한결 같았다.

차지철은 주군의 밀명을 잘 이행하기 위해 진짜 베트남 공부를 시작했다. 그러면서 차지철은 자신도 모르게 베트남에 매몰되기 시작했다. 몰랐던 진실을 알게 된 것이다. 특히 근 100년에 걸친 베트남의 항불 독립 전쟁은 차지철에게 감동적이었다고 한다. 군인 출신이었던 차지철로서는 식민 지배에 맞서 싸운 베트남의 역사가 남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가 지원하려는 당시 남베트남 정부의 실태는 최악이었다. 차지철이 봐서도 지켜줄 가치가 없는 정권이었다. 그랬기에 당시 공화당 국회의원이었던 차지철은 의원총회에서 "만약 파병 동의안이 국회에 상정된다면 나는 여당 의원이지만 분명히 반대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어지는 차지철의 발언이다.

"월남의 권력자와 부자들은 전부 자기 자식들을 외국으로 피난시켜 놓고 군대조차 보내지 않고 있어요! 그래 놓고 원군 요청을 한단 말입니까? 자기 나라 특권층 자식들부터 전선에 서게 한 뒤에 외국에 파병을 부탁해도 될까 말까 할 텐데 자기 자식들은 안전 지대에서 향락을 즐기게 해 놓고 우리나라 청년들을 나서게 한단 말입니까? 상정 자체가 국민 정서에 맞지 않습니다."

하지만 1965년 8월, 대한민국 국회는 베트남전 파병 동의안을 상정했다. 그리고 당시 굴욕적인 한일협정 조인에 반대하는 야당 의원들이 전부 의원직 사퇴로 불참했던 그때, 파병 동의안은 통과되었다. 그때 유일하게 단 한 명의 반대표가 나왔다. 사람들은 그 표가 차지철이라고 생각했다.

차지철의 베트남 참전 반대 논리는 분명했다. 첫째, 베트남 전쟁은 자국내 전쟁이니 다른 외국군이 개입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어학 사전에 나오는 그 말 그대로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을 위하여 벌인 전쟁'인데 그러한 전쟁에 우리나라 국군이 가서 죽을 이유가 없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한 전쟁에 8년 6개월 동안 32만여 명의 국군을 파병했다. 그리고 4407명이 전사하고 1만 7천여 명이 중상을 입었다. 또 우리만 죽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인 베트콩은 그보다 10배나 더 많은 수치였다. 공식 발표에 의하면 4만 1천여 명의 베트콩을 우리가 사살했다고 한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미국이 살포한 고엽제로 인해 수많은 참전 군인이 고통속에 살아왔다. 그리고 그 군인의 후손에게까지 그 고통은 대물림 되고 있다. 베트남 참전의 비극은 우리에게도, 또 베트남 국민에게도 계산이 불가능할 정도의 상처로 남았다. 차지철은 이러한 비극을 예상했던 것일까.

만약 그때, 차지철의 파병 반대 주장이 진짜로 이뤄졌다면 과연 어떠했을까. 사람들은 베트남 전쟁 덕분에 대한민국 경제가 발전했다며 파병의 공을 먼저 말한다. 실제로 대한민국은 베트남 전쟁 직전인 1964년 당시, 103달러에 불과했던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 10년후인 1974년에 5배를 넘겼다며 홍보한다.

하지만 베트남 전쟁 파병으로 얻은 결실만 이야기만 할 뿐 그 전쟁의 뒷그늘에서 우리가 한 잘못에 대해서는 여전히 인정하지 않는다. 과연 그것은 옳은 일인가. 언제까지 그럴 것인가.

개구쟁이 같은 탄 할아버지. 하지만 당시 한국군의 만행을 전할 때는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개구쟁이 같은 탄 할아버지. 하지만 당시 한국군의 만행을 전할 때는 표정이 금세 어두워졌다.
ⓒ 김성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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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콩이 말하는 '한국 참전 군인'의 기억

"그 당시 한국군은 지독했다. 다른 어떤 나라의 군인도 하지 않은 야만적인 행위를 너무도 많이 했다. 나는 당시 한국 군인이 한 일들을 용서할 수 없다."

개구쟁이 같은 탄 할아버지는, 그러나 당시 전쟁에서 총을 겨눴던 한국군의 당시 행적에 대해서는 미간에 힘을 줬다. 베트남 참전 군인이었던 베트콩의 입에서 듣는 또 다른 베트남 전쟁 이야기였다. 그때였다. 탄 할아버지의 말을 옆에서 듣고만 있던 바이 할아버지가 탄 할아버지의 말을 가로 막고 나섰다. 이제 그만 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듣고 싶었다. 도대체 그때, 이 땅 베트남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 베트콩 참전 군인의 입에서 그때 본 그들의 진실을 듣고 싶었다. 도대체 뭐가 지독했다는 것인지, 그 지독했다는 구체적 사례가 무엇인지 들려 달라고 나는 요청했다. 그러자 바이 할아버지의 눈치를 살피던 탄 할아버지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글로만 읽던 사례를 직접 베트콩 참전 군인에게 들으니 그 충격은 더욱 컸다. 모든 우리나라 참전 군인이 다 그랬다고는 믿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베트콩 참전 군인의 말이 사실이 아니기를 나 역시 바랐다. 정말 그러지 않기를 바랐다.

한국군의 잔인함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민간인을 죽이고 여인들을 집단으로 윤간한 후 불도저를 가져와 시신을 뭉갰다고 한다. 죽은 시체들이 쌓여있는 장면이다. 증적전쟁박물관에서 촬영.
 한국군의 잔인함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민간인을 죽이고 여인들을 집단으로 윤간한 후 불도저를 가져와 시신을 뭉갰다고 한다. 죽은 시체들이 쌓여있는 장면이다. 증적전쟁박물관에서 촬영.
ⓒ 김성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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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은 온 마을을 초토화 시켰다. 그때 한국 군인이 죽인 이들은 베트콩이 아니라 순수 민간인이었다. 한국군은 그런 민간인 중 남자는 보이는대로 다 죽였고 여자들은 집단으로 윤간했다. 그리고 그 행위가 끝나면 여자도 전부 죽였다. 그리고 죽인 민간인을 베트콩으로 보고했다.

하지만 한국군의 만행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미군도 우리 민간인을 학살했지만 대신 시신만은 그대로 뒀다. 그래서 죽은 시신이라도 거둬와 장례라도 치를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군은 달랐다. 그들은 마을 주민을 죽인 후 밤이 될 때까지 현장을 지켰다. 그리고 밤이 되면 불도저를 가져와 그 시신을 깔아 뭉갰다. 증거를 없애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사후 세계를 중시 여기는 우리 민족에게 그것은 더 큰 상처였다."

차마 다 옮길 수 없는 더 많은 이야기와 이야기들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탄 할아버지의 얼굴을 정면으로 마주 볼 수 없었다. 고백하자면, 솔직히 부정하고 싶었다. 내 나라 군인들이 그러한 행위를 했다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도 끔찍했다. 나는 어찌할 수 없는 충격과 당황스러움 앞으로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탄 할아버지가 들려준 말들은 사실 생소한 것이 아니었다. 내 어릴 적 참전 군인 아저씨에게 들었던 바로 그 베트남 전쟁 무용담 중 하나가 이것과 다르지 않았던 것이다. 다만 그때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당연히 죽여 마땅할' 베트콩에 대한 무용담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 대상이 베트콩이냐 민간인이냐는 차이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바이 할아버지가 다시 나섰다. 바이 할아버지는 좀 전보다 더 강한 톤으로 탄 할아버지의 말을 막아섰다. 바이 할아버지는 "지나간 이야기를 왜 그렇게 계속하냐?"며 "이제 그만 하라, 손님으로 온 이 분들이 무슨 죄가 있냐?"며 우리들을 둘러봤다. 우리들의 고통스러운 마음을 바이 할아버지가 엿본 것일까.

그러면서 이어진 바이 할아버지의 다음 말은, 그래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대한민국의 입장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바이 할아버지는 "그 당시 미국에 의한 경제적 예속 관계인 대한민국이 어찌 파병을 거부할 수 있었겠냐"며 그 잘못을 대한민국에만 물을 수 없다고 했다. 그 말이 더 부끄러웠다. 그리고 이어진 말.

"하지만 우리는 그 전쟁에서 미국과 대한민국을 이긴 승전국이다. 그러니 이젠 지나간 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제는 미래를 이야기할 때다. 대한민국과 베트남이 새로운 동반자로서 함께 희망을 가꿔 나갔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는 오늘 여기까지 온 대한민국의 손님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이제 이런 이야기는 그만하고 점심을 먹자."

바이 할아버지는 "그 당시 미국의 경제적 예속 관계인 대한민국이 어찌 파병을 거부할 수 있었겠냐"고 말했다.
 바이 할아버지는 "그 당시 미국의 경제적 예속 관계인 대한민국이 어찌 파병을 거부할 수 있었겠냐"고 말했다.
ⓒ 김성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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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이제라도 베트남에게 사과해야

바이 할아버지는 그만 하자고 했지만, 그러면서 새우 껍질을 까서 한 명 한 명의 손님에게 한 입이라도 더 먹여 환송하려고 했지만 나는 그날의 바이 할아버지 말을 잊을 수 없다. 피해자인 그들은 이제 그만하자고 했으나 가해자 나라의 국민 중 한 명인 나마저 선뜻 '그러자'고 말할 수 없다. 양심상 나는 아무 사과도 없이 '그냥 그렇게 그만 잊자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본을 향해 과거사를 사과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광복 70년을 맞이한 올해에도 우리는 그렇게 요구했다. 하지만 '일본의 총리' 아베는 올해 역시 제대로 된 사과를 하지 않았다. 우리나라 뿐만 아니라 일제 침략으로 고통 받은 다른 나라에 대해서도 일본은 진심으로 사과하지 않았다. 나는 그런 일본을 좋은 나라라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과연 우리는 어떤가. 우리 역시 베트남 전쟁 당시 행한 잘못에 대해 사과해야 옳지 않을까. 죽고 죽이는 전쟁 과정에서 빚어진 베트콩에 대해서는 그렇다 쳐도 베트남의 민간인을 집단으로 가해한 사실까지도 언제까지 외면하고 또 부인만 할 것인가. 왜 우리가 '일본과 전혀 다르지 않은' 잘못을 계속하려 하는가.

나는 우리나라가 일본의 사과를 요구하면서 당당한 나라가 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 나는 우리나라가 일본과 다른 높은 수준의 도덕성을 먼저 보여줄 것을 촉구한다. 우리가 일본에 기대하는 사과 수준처럼 과거 우리의 잘못에 대해 베트남과 베트남 국민에 사과하는 것이 그것이다.

바이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베트남 평화기행 중 만난 베트남 국민 중에서 우리나라에 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먼저 듣지 못했다.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돌아온 답은 너무도 충격적이었다. 사과하라고 한다 해서 우리나라가 사과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민간인을 집단 학살한 사실에 대해 인정조차 하지 않는데 사과를 요구한다 해서 하겠냐는 말이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유학 중인 우리나라 학생의 에피소드는 그래서 듣기에 민망한 일이었다. 일본인 친구에게 일본의 과거사 반성 태도를 비판할 때 내내 가만히 듣고 있던 그 일본인 친구가 우리나라 여학생에게 조용히 한마디 했다고 한다.

"그런데 너희 나라는 우리에게 사과를 요구하면서 왜 베트남 전쟁에서 있었던 잘못에 대해서는 베트남에 사과하지 않니?"

솔직하게, 그리고 정직하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것. 그것이 나는 '일본과 다른' 대한민국의 높은 도덕성이기를 진심으로 기대한다. 그래서 말하고 싶다. '미안해요. 베트남.'

까마우시 수상 가옥에서 마지막으로 헤어지던 순간 바이 할아버지는 '명진스님과 함께하는 베트남 평화기행' 참가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안아주셨다.
 까마우시 수상 가옥에서 마지막으로 헤어지던 순간 바이 할아버지는 '명진스님과 함께하는 베트남 평화기행' 참가자 한 사람, 한 사람을 안아주셨다.
ⓒ 김성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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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참전 군인의 만남. 맹호부대 참전 군인 명진 스님과 베트콩 참전군인 탄 할아버지가 환한 미소로 마주 했다. 진정한 화해는 진심어린 사과다. 미안해요 베트남.
 두 참전 군인의 만남. 맹호부대 참전 군인 명진 스님과 베트콩 참전군인 탄 할아버지가 환한 미소로 마주 했다. 진정한 화해는 진심어린 사과다. 미안해요 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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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명진 스님, #베트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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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 운동가, 재야인사 장준하 선생 의문사 및 친일 반민족행위자의 재산을 조사하는 조사관 역임, 98년 판문점 김훈 중위 의문사 등 군 사망자의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저서- 중정이 기록한 장준하(오마이북), 장준하, 묻지 못한 진실(돌베개), 다시 사람이다(책담) 외 다수. 오마이뉴스 '올해의 뉴스게릴라' 등 다수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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