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논픽션 작가 이범준은 최근작 <일본제국 VS. 자이니치>에서 일제 식민 시기 일본으로 건너간 조선인이 1945년 무렵 200만 명에 이른다고 보고했다. 일본 패전 후 많은 이들이 귀국했지만 60만 명은 돌아오지 못해 '자이니치(在日)'가 되었다. 오늘날 일본 전체 인구의 1퍼센트에 해당하는 100만 명의 자이니치들은 한국과 일본 사회 모두로부터 '버림받은 자들'과 같은 삶을 살고 있다.

오구마 에이지 일본 게이오기주쿠(慶應義塾) 종합정책학부 교수는 이 책 <일본 양심의 탄생>(동아시아  펴냄)에서 일제에 의해 강제 징집된 조선인 출신 일본군이 11만 6294명, 군속이 12만 6047명이이었다고 적고 있다. 조선인 출신 일본군 전사자와 행방불명자는 2만 2182명이었다고 한다.

일본은 1941년 하와이 진주만 공격으로 승기를 잡았다가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에게 대패한 뒤 1944년에 자살특공대인 가미카제 부대를 만들었다. 제해권과 제공권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일본 본토가 공습을 받게 되면서 취한 최후의 조치였다고 한다.

일본 민중들의 삶도 사지로 몰고간 '제국주의'

<일본 양심의 탄생> 겉표지
 <일본 양심의 탄생> 겉표지
ⓒ 동아시아

관련사진보기

정치평론가 전계완이 쓴 <일본, 다시 침략을 준비한다>에 따르면, 1944년 647개의 가미카제 부대가 세워진 후 1945년 8월 15일까지 3800명의 비행 연습생, 학도병, 장교 등이 제로센 전투기, 잠수 어뢰 가이텐(回天), 글라이더, 보트 등을 타고 미 군함으로 돌진했다. 마지막 비행에 모두 1026명이 올라 전사했는데, 그 중 조선인이 11~16명이었다고 한다.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은 자이니치, 조선인 일본군, 가미카제 특공대 조선인 희생자들은 호전적인 제국주의와 군국주의가 지배한 '일본의 20세기'를 증언하는 사례들이다.

<일본 양심의 탄생>은 1945년 20살 나이로 일본군에 징집된 후 전장에 나가 포로가 된 작가의 아버지 오구마 겐지가 '일본의 20세기'를 증언한 책이다. 평범했던 일본 서민이 온몸으로 살아낸 일생을 통해 조선 민중뿐 아니라 일본 민중의 삶을 사지로 몰아넣은 일본 제국주의를 '내부자'의 시선으로 비판한 다큐멘터리다.

오구마 겐지는 시베리아 포로수용소에서 풀려나 귀국한 뒤로 단 한 번도 군국주의자와 자민당에 투표하지 않았다. 그는 "나는 군인이었고 천황은 대원수였기 때문에 전쟁 책임이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하면서 쇼와 천황(1901~1989)이 의식이 있을 때 사과해야만 했고 사과를 받고 싶었다고 말했다. 72세에는 조선인 전우 오웅근의 전쟁피해보상을 위해 일본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오구마 겐지과 같은 '일본 양심'의 진정성을 믿어야 할까.

2013년 11월 일본의 대표적인 우익 잡지 <주간문춘(週刊文春)>은 한 특집 기사에서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한국은 그냥 어리석은 국가다"라고 폄하 발언을 한 사실을 보도했다. 전계완은 위의 책에서 '한국이 어리석은 국가'라는 말은 19세기 말 정한론을 주장한 후쿠자와 유키치(일본 1만 엔 권 지폐에 찍혀 있는 인물로 근대 개화사상의 아버지다.)와 16세기 말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했던 말이라고 한다. 영향력 있는 일본 우익 정치인들의 '혐한론'은 뿌리가 깊다.

침략 전쟁에 대한 일본인의 의식도 '위험한' 수준이다. 전계완은 2013년 말 <아사히신문>이 보도한 일본의 정치·사회 의식조사에서 20대 33퍼센트가 "과거 전쟁을 침략전쟁이라고 생각하느냐"라는 질문에 '그렇지 않다'고 응답했다고 보고했다. 30대 28퍼센트, 40~50대는 24퍼센트였다고 한다. 오늘날 일본의 대도시 거리에서는 일본 넷 우익을 대표하는 '재일(在日)의 특권을 용인하지 않는 시민 모임(재특회)'이 반 한국, 혐한을 외치며 애국을 역설하고 있다.

일본에는 '일본의 전도와 역사 교육을 생각하는 의원의 모임(의원의 모임)'이라는 의원 단체가 있다. 1995년 무라야마 담화가 나오면서 과거 역사를 사죄하고 청산하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자 이에 '대항'하기 위해 1997년 결성된 우익 성향의 의원 모임이라고 한다.

<한겨레>는 8월 19일자 '일본 자민당, 우익 교과서 채택 압력' 제하 기사에서 <아사히신문> 보도를 인용해 아베 총리와 가까운 이들 '의원의 모임'이 지난달 '더 좋은 교과서를 아이들에게 전하기 위해'라는 홍보책자를 만들어 자민당 소속 지방의회 의원들에게 배부한 사실을 보도했다.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통렬한 고발문학

우익 편향의 현 일본 집권층과 혐한 시위에 참여하는 '평범한' 일본인들이 일본의 '평균적인' 시민상일까. 작가 오구마 에이지는 "인간 사회란 일부 '좋은 사람'과 대다수 '나쁜 사람'으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고 보았다. 그는 인간은 누구라도 좋은 측면과 나쁜 측면을 갖고 있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나는 저의 아버지를 특별한 인간으로 생각하지 말아주셨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는 인생의 말로에서 만주 조선족 전 일본군과 함께 일본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일본인 중에도 양심적인 사람은 있겠지. 하지만 대다수는 그렇지 않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의 아들이기 때문에 그가 성인(聖人)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중략)

좋은 측면만을 보고 성인 대접하는 것은 나쁜 측면만을 보고 악인 취급하는 것과 같이 올바른 이해가 아닙니다. 저의 아버지가 한 행동은 가능성으로 보자면 어떤 일본인이라도 할 수 있는 행동입니다. 한 사람의 행동을 칭찬하기보다는 그런 가능성을 많은 사람에게 넓혀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5쪽)

작가의 말처럼 <일본 양심의 탄생>은 '성인'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일본과 일본인을 '절대악'처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일본에도 이런 '양심인'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하려는 책은 더욱 아니다. 일본의 대다수 민중을 궁지로 몰아넣은, 아시아의 무수한 민중들을 파탄에 이르게 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통렬한 '고발문학'이다.

며칠 전, 무력 충돌의 벼랑 끝에 선 남과 북이 '극적 합의'를 했다. '무박 4일'의 협상 결과 북이 지뢰 사건에 대해 사과하고 남이 대북 확성기 방송을 중단하기로 했다고 한다. 이번 사태의 배경과 경위가 무엇이든 인명 살상으로 이어질 수 있는 무력 충돌을 피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천만다행이다.

그 사이 한켠에서는 '전쟁 불사'를 외치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번 기회에 북한의 못된 버릇을 고쳐줘야 한다는 '응징론'부터 박 대통령을 '총사령관'으로 똘똘 뭉치자는 '국가주의'까지 동원됐다고 한다. 보수언론의 논조는 '전쟁 선동론'과 다름없어 보였다. 전쟁은 '불사'(不辭; 사양하지 아니하다, 마다하지 아니하다)할 수도 있는 그런 '숭고한' 것인가.

1994년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 직전 클린턴 행정부가 실시한 시뮬레이션에서 개전 24시간 내에 남북한 합쳐 150만 명의 사상사와 1주일 내 50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다는 결론이 났다고 한다.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남북 공멸로 이어질 뿐이다. 전쟁이란 게 이런 것이다.

전쟁은 한바탕 신나게 펼치는 '게임'이 아니다. 강양구 <프레시안> 기자는 "김정은보다 '전쟁광'이 더 무섭다"라는 칼럼(2015년 8월 24일자)에서 1996년 강릉 지역 무장 공비 침투 사건 당시 토벌 작전에 차출된 한 부사관의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사격과 주특기 등에서 못하는 게 없었던 '모범 군인'인 부사관은 당시를 "무서웠어"라는 한 마디로 회고했다고 한다. 조준 사격은커녕 연발로 해놓고 머리 위로 총구만 내놓고 사격을 했다고 한다.

작가는 머리말에서 자신의 아버지에게서 가장 깊은 감명을 받은 것이 '타자에 대한 상상력'이었다고 적고 있다. "나라가 다르고, 민족이 다르고, 출신지가 다르고, 학력이 다르고, 경제 상황이 다른 것 등에 따라 여러 층으로 단절"(7쪽)된 지금 세상에서 단절을 넘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강조하는 대목에서였다. 남북 대치 국면에서 거리낌 없이 전쟁 불사론을 외치고, '극혐주의', '혐녀' 등의 혐오 문화가 넘치는 우리 사회가 귀담아들어야 할 시선이 아닐까. '양심'에는 국적이 없기 때문이다.

<일본 양심의 탄생>(오구마 에이지 지음, 김범수 옮김 / 동아시아 / 2015.8.15. / 358쪽 / 1,6000원)

덧붙이는 글 | <일본 양심의 탄생>, 오구마 에이지 지음, 동아시아 펴냄, 2015.08.15., 1만 6천원.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싣습니다.



일본 양심의 탄생 - 한 일본인의 삶에 드러난 일본 근현대 영욕의 민중사

오구마 에이지 & 오구마 겐지 지음, 김범수 옮김, 동아시아(2015)


태그:#<일본 양심의 탄생>, #오구마 에이지, #오구마 겐지, #일본 제국주의, #극혐주의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학교 민주주의의 불한당들>(살림터, 2017) <교사는 무엇으로 사는가>(살림터, 2016) "좋은 사람이 좋은 제도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좋은 제도가 좋은 사람을 만든다." - 임마누엘 칸트(Immanuel Kant, 1724~1804)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