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텍스트(Text)에는 맥락(Context)이 있습니다. 문화 콘텐츠도 마찬가지입니다. 100% 정치적인 예술이 존재할 수 없듯이, 100% 순수한 예술도 없습니다. 문화 공연을 때로는 인문학적으로, 때로는 사회과학적으로 읽어봅니다. 마음에 안 들면 신랄하게 태클도 걸어보고, 재미있으면 '우쭈쭈' 칭찬도 합니다. 공연을 정치·사회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항상 성공하지는 않을 겁니다. 시도가 비록 재미(Fun)는 없더라도, 최소한 '뻔'한 리뷰는 쓰지 않으려 합니다. [편집자말]
조정은의 엘리자벳 뮤지컬 <엘리자벳>에서 주인공 '엘리자벳'을 연기한 조정은. 선녀는 날개옷을 입을 때가 제일 아름답다. 조정은이 깊은 내공과 고운 목소리로 자신만의 '아우라'를 지닌 배우임은 분명하나, 엘리자벳이라는 옷이 그녀에게 딱 맞는지는 호불호가 갈린다. 옥주현과 다른 매력의 엘리자벳임은 분명하다.

▲ 조정은의 엘리자벳 뮤지컬 <엘리자벳>에서 주인공 '엘리자벳'을 연기한 조정은. 선녀는 날개옷을 입을 때가 제일 아름답다. 조정은이 깊은 내공과 고운 목소리로 자신만의 '아우라'를 지닌 배우임은 분명하나, 엘리자벳이라는 옷이 그녀에게 딱 맞는지는 호불호가 갈린다. 옥주현과 다른 매력의 엘리자벳임은 분명하다. ⓒ EMK뮤지컬컴퍼니


"아침이면 감옥에서 눈을 뜬다. 무거운 족쇄를 차고 있는 것과 같다. 자유! 그건 나를 외면하고 저 멀리 떠났다."

사슬에 속박된 노예의 이야기 같지만, 아니다. 이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후였던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가 결혼 후 2주 만에 남긴 글귀라고 한다. 권력의 최정점에 있던 여인은 왜 그토록 자유를 갈망했을까.

무너져 가는 황혼의 제국이었지만, 여전히 제국이라는 틀 안에서 누릴 수 있는 건 많았다. 사치와 향락의 중심에 있던 황후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는 평생 한순간도 황후로서 행복하지 못했다. 누구보다도 아름다웠던 여자, 냉혹한 황제의 마음을 첫눈에 빼앗은 여인, 아들의 자살을 방조한 무정한 어머니, 결국 암살로 마감한 그녀의 생은 많은 이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한다.

뮤지컬 <엘리자벳>은 그래서 탄생했다. 실제 역사적 인물과 그의 일대기를 각색하고, 각 사실 사이의 구멍에 상상과 환상을 채워 넣었다. 역사와 창작을 넘나드는 비엔나 뮤지컬 <엘리자벳>이, 지난 6월 13일 서울 블루스퀘어에서 국내 세 번째 막을 올렸다. 오는 6일, 서울 공연을 종료하고 지방 공연에 들어설 예정이다.

실제 인물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모두 소화하다

최동욱의 토드 뮤지컬 <엘리자벳>에서 죽음역을 맡은 최동욱(세븐). 초연과 재연 때, 뮤지컬 배우 출신이 아님에도 인상적인 연기와 노래를 보였던 김준수·박효신과 비교하면 많이 아쉽다. 뮤지컬 배우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노력해야 할 점이 많다. 그러나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만큼은 확인할 수 있었다.

▲ 최동욱의 토드 뮤지컬 <엘리자벳>에서 죽음역을 맡은 최동욱(세븐). 초연과 재연 때, 뮤지컬 배우 출신이 아님에도 인상적인 연기와 노래를 보였던 김준수·박효신과 비교하면 많이 아쉽다. 뮤지컬 배우로 발돋움하기 위해서는 스스로 노력해야 할 점이 많다. 그러나 앞으로의 발전 가능성만큼은 확인할 수 있었다. ⓒ EMK뮤지컬컴퍼니


뮤지컬 <엘리자벳>의 주인공은 역사 속 실제 인물인 엘리자베트 폰 비텔스바흐(1837년 12월 24일~1898년 9월 10일)이다(엘리자베트의 철자 'Elisabeth'는 '엘리자베트'로 읽고 표기하는 것이 맞으나, 뮤지컬 내에서는 '엘리자벳'으로 쓰고 읽는다). 그녀의 아들인 루돌프의 일대기를 그린 뮤지컬 <황태자 루돌프>와 함께, 뮤지컬 <엘리자벳>은 비엔나 뮤지컬의 정수로 꼽힌다(관련 기사 : 19세기 오스트리아와 21세기 한국... 묘하게 닮았다?).

뮤지컬 <엘리자벳>은 엘리자베트 황후가, 황후의 자리에 오를 때부터 루케니에 의해 암살당할 때까지의 과정을 서술한다. 이 이야기에 '죽음(토드)'이라는 역을 집어넣어, 실제 인물의 역사를 판타지적으로 재해석한다. 죽어서도 100년이 넘도록 재판을 받는다는 설정의 암살자 루케니는, <노틀담 드 파리>의 구랭구와르처럼 극의 안과 밖을 오가며 엘리자벳을 조롱하고 이야기를 설명한다.

뮤지컬 <엘리자벳>은 평면적인 캐릭터들의 단선적인 이야기를 벗어나, 입체적인 인물들이 드라마틱하게 극을 이끌어 가게끔 역사를 변주한다. 킬링 넘버 하나를 꼽기 어려울 정도로 좋은 노래들이 많고, 대극장답게 의상이나 무대도 화려하다.

그러나 뮤지컬 <엘리자벳>이 매력적인 이유는 따로 있다. <엘리자벳>은 <마리 앙투아네트>와 달리 주인공을 단순히 미화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실제로 엘리자베트 황후는 그렇게 선한 캐릭터도 아니었고, 성군은 더더욱 아니었다. 소용돌이치며 급변하는 역사 속에서, 엘리자베트가 걸어온 행보는 그 명암이 뚜렷하다. 뮤지컬 <엘리자벳> 속 엘리자벳은 엘리자베트의 밝은 면만 취사 선택해서 만들어진 캐릭터가 아니다. 그녀의 밝은 면과 어두운 면을 하나의 인물에 모두 아우르며 투사해 완성된 인물이다.

뮤지컬 <엘리자벳>을 보고 난 관객은 그녀를 향한 이중적 감정을 갖게 된다. 평생 외로웠고, 자유를 갈망했던 그녀에게 연민을 보내면서도, 마냥 옹호만은 할 수 없는 그녀의 행동에 안타까워하고 미워하게 된다. 그것이 애정이든 증오이든, 엘리자벳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감정적으로 끌리게 되는 인물이다. 엘리자베트가 살아생전에 그러했듯이.

공동체에 반하는 개인의 자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공동체가 혁파의 대상이듯, 공동체 전체에 해악을 끼치는 개인 역시 방조할 수 없다. 인간은 독립된 단자로 존재할 수 없다. 동시에 거대한 구조를 유지하는 데 소비되는, 영혼 없는 부품이 될 수도 없다. 인간이 자유롭기 위해서는 독립적이어야 한다. 그러나 완전히 자유롭기 위해서는 동시에 타인과 관계를 맺으며 공동체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양 극단 사이에서 적당히 타협하며 줄타기를 하고 있다.

엘리자벳이 추구했던 자유는 개인의 자유이다. 강력한 권력을 휘두르는 대공비는 아이까지 빼앗아가며 괴롭히고, 황제는 정작 필요할 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궁정의 신료와 귀족은 자신을 무시하고, 궁중 예법은 자신을 옭아맨다. 황제의 사랑만을 믿고 궁에 잘못 발을 디딘 그녀는, 그녀를 강압하는 모든 것을 거부하기로 결심한다.


"난 싫어. 이런 삶. 새장 속의 새처럼. 난 당신의 소유물이 아니야. 내 주인은 나야. 저 하늘 저 별을 향해서 가고 싶어. 한 마리 새처럼 자유롭게 날아갈래. 난 싫어. 그 어떤 강요도, 의무들도. 당신들의 끝없는 강요 속에 내 몸이 묶인다 해도, 내 영혼 속 날개는 꺾이지 않아. 내 삶은 내가 선택해. 새장 속 새처럼 살아갈 수는 없어. 난 이젠 내 삶을 원하는 대로 살래. 내 인생은 나의 것. 나의 주인은 나야. 난 자유를 원해. 자유."

넘버(노래) '나는 나만의 것'이 주는 카타르시스는 크다. 나 자신의 인생이 나의 것임을 선언하는 이 장면을 계기로, 엘리자벳은 완전히 다른 캐릭터로 변모한다. 객체가 주체로, 소유물이 소유자로 바뀐다. 인생의 주인이 되기를 자처한 엘리자벳은 자신의 삶을 구속하는 모든 것을 방해물로 정의하고 이를 제거한다.

"난 승리했어. 나의 적들을 물리쳤어. 이 세상이 아닌, 나를 위해. 이제 나의 길을 갈 거야. 조종당하던 삶은 끝. 난 더 이상 인형이 아니야. 이제부터 난, 맘대로 춤을 출 거야. 시간, 장소, 음악까지 모두 내가 결정해. 내가 춤출 때, 누구와 춤출 지도 내가 정해."

엘리자벳이 다다르려는 '자유로운 인간'은 모든 사람의 꿈이기도 하다. 엘리자벳은 인간관계나 사회적 책무 따위는 던져 버리고, 심지어 이기적일 정도로 극단적인 자유를 추구한다. 우리가 함부로 그리고 온전히 '나 자신만의 자유'를 추구할 수는 없기에, 엘리자벳이 자유를 선언하고 쟁취하는 과정은 보는 이들의 욕망을 대리로 실현한다.

자신의 자유를 위해 방해되는 모든 것들이 그녀에게는 사슬과 족쇄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의 자유를 위한 투쟁의 무기로 '미모'와 '사랑'을 이용한다. 그녀는 유달리 미모에 집착했다. 그 미모마저 사라질 경우 자신이 무엇을 잃을지 본능적으로 알았기 때문이리라. 황후는 우유로 목욕하고, 신선한 송아지 고기를 피부 미용을 위해 사용했다.

최민철의 루케니 뮤지컬 <엘리자벳>의 루케니는 실제 엘리자베트 황후의 암살범을 보다 극화하여 재창조한 인물이다. 초연에서 이미 루케니를 소화한 전력이 있는 최민철은, '밀크'에서의 아쉬움을, '키치'의 환호로 상쇄시킨다.

▲ 최민철의 루케니 뮤지컬 <엘리자벳>의 루케니는 실제 엘리자베트 황후의 암살범을 보다 극화하여 재창조한 인물이다. 초연에서 이미 루케니를 소화한 전력이 있는 최민철은, '밀크'에서의 아쉬움을, '키치'의 환호로 상쇄시킨다. ⓒ EMK뮤지컬컴퍼니


"오! 배가 고파, 문을 열고 우유를 줘. 우유통은 오늘도 비어있어, 밤새 기다렸는데 소용없어. 우리는 굶고 누군 즐기지, 저 궁전 안에서."
"모든 우유는 그녀의 차지! 당신들의 황후 그녀 차지. 목욕 위해!"
"오, 말도 안 돼. 황후께서 그럴 리가! 배가 고파 죽어가 아이들이. 그런데 그 안에서 우유 목욕. 민중의 분노 보여줘야 해. 분노를 보여줘."


황후는 국민을 버렸다. 헝가리 독립을 지지하고 권위주의 대신 자유주의를 택했던 그녀였지만, 그녀의 사치와 향락은 민심을 떠나게 하였다. 헝가리 독립 지지도 실상, 이념적인 선택이라기보다는 황실에 반기를 들기 위한 도구에 더 가까웠다. 되찾아온 황태자도 마찬가지였다. 모성애나 아이에 대한 애착이기 전에, 황실로부터 자신의 자유를 보전받기 위한 수단이었다.

"아름다움과 화려함에 가려진 그녀. 그녀의 인생에서 남은 것은 뭐죠? 비밀을 말해줄까? 황후께선 사실 역겨운 이기주의자. 자신을 위해서 하나뿐인 아들을 이용하고 버렸지. 중요한 건 오직 그녀 자신만을 위한 자유. 황실을 씹어대면서, 스위스 은행에 비자금 빼돌려놨지."

루케니의 지적처럼, 그녀는 이기주의자가 되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그녀는 그토록 바랐던 자유를 얻었을까. 진정으로 자유로웠을까.

자유에 종속된 그녀, 연민과 증오의 캐릭터

옥주현의 엘리자벳 뮤지컬 <엘리자벳>의 엘리자벳으로 더블 캐스팅 된 옥주현. 2013년 재연 때에 이어 이번 삼연 때도 주인공을 맡았다.

▲ 옥주현의 엘리자벳 뮤지컬 <엘리자벳>의 엘리자벳으로 더블 캐스팅 된 옥주현. 이번 삼연 때도 주인공을 맡았다. 특유의 시원한 고음이 매력적이다. 이제는 당당한 한 명의 배우로 무대 위에 자리 잡았다. ⓒ EMK뮤지컬컴퍼니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미모, 아들, 헝가리 등 '자유롭기 위한 수단'에 종속됐다. '자유'라는 그 말에 강박적으로 집착하는 그녀는 역설적으로 자유롭지 못하게 됐다. 그렇게 그녀는 서서히 파멸의 길을 걷게 된다. 그 파멸을 모르는 건 궁궐 안의 위정자들뿐이다.

국회 설립에 대한 요구, 자유주의 사조의 확산, 이름만 남은 제국의 위기. 궐 밖 카페에 앉은 이들이 냉소와 불만을 터뜨릴 때, 오스트리아 황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헝가리 자치를 지지하며 얻었던, 엘리자벳을 향한 민중의 신뢰는 이미 깨진 지 오래.

정치적 자유주의를 꿈꿨던 황태자 루돌프는, 죽음의 꼬임에 넘어가 헝가리의 독립을 확약하는 밀서를 쓰고 민중봉기를 조직하려 하나 사전에 발각된다. 궁지에 몰린 루돌프는 어머니인 엘리자벳을 찾아가 도와달라고 간청한다.

그러나 이미 궁궐 생활에 질려 오랫동안 방랑해왔던 엘리자벳에게, 자신을 찾아온 루돌프는 사랑하는 아들이 아니라 자신을 다시 속박으로 밀어 넣을 기제에 불과했다. 얼굴을 보여달라 노래하는 루돌프를, 엘리자벳은 매정하게 무시한다.

전동석의 토드 뮤지컬 <엘리자벳>에서 '죽음' 역할을 맡은 전동석. 초연 때 루돌프를 연기했던 그는 재연 때부터 토드를 소화한다.

▲ 전동석의 토드 뮤지컬 <엘리자벳>에서 '죽음' 역할을 맡은 전동석. 초연 때 루돌프를 연기했던 그는 재연 때부터 토드를 소화한다. ⓒ EMK뮤지컬컴퍼니


죽음의 유혹에 넘어간 루돌프는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제야 엘리자벳은 자신의 이기적 자유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깨닫는다. 황제는 변함없는 자신의 사랑을 노래하며, 궁으로 돌아오라고 엘리자벳을 설득하지만, 이미 그녀는 너무 멀리 와 버렸다. 나라도, 정치도, 사랑도, 가족도 버린 그녀. 정신병원에 갇혀 자신을 황후라고 주장하는 환자를 부러워할 정도로, 그녀의 자유를 향한 갈망은 채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끝내 자유롭지 못했다. 스스로를 자유라는 새장 안에 가뒀기에.

결국, 그녀는 죽음의 품에 안기며 생을 마감한다. 어렸을 때 죽음으로부터 연장받았던 목숨, 한때는 죽음을 거부했고, 한때는 죽음에게 애원했던 그녀였다. 최후의 순간, 죽음을 통해 자유를 얻었다. 그러나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우리는 삶에서 자유와 행복을 찾는 이들이지, 끝내 죽기 위해 사는 허무주의자들이 아니다.

그녀가 차라리 황후가 되지 않았다면, 황제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면, 어렸을 적 그 여행에 따라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그녀는 외줄 타기와 승마를 즐기며, 세계 각지를 여행할 수 있었을까. 그녀의 아버지가 보냈던 삶처럼, 그녀가 갈망했던 자유로운 삶을 즐길 수 있었을까. 황제의 사랑은 원했지만, 황후 자리는 탐내지 않았던 그녀. 원치 않았던 소용돌이에 휘말린 그녀를, 단순히 매도할 수는 없다.

대공비 소피가 치아의 색마저 트집 잡으며 요구한 것처럼 '황후는 빛나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우리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이행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 역시 분명하다. 그 의무가 때로는 개인의 자유를 핍박한다. 쓸데없는 굴레에 맞서 투쟁해야 할 때도 분명 있다. 그러나 모든 의무를 거부하고 홀로 존재할 수는 없다. 위정자에게는 정치적 책무가 있다. 엘리자벳이 자신의 자유를 찾는 과정에서 다른 누군가는 자유를 혹은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자유를 옹호할 수 있을까.

자유는 인간이라는 종이 본질적으로 갈망하는 이상향이다. 엘리자벳은 그 자유를 추구하기 위해 끊임없이 싸웠고, 결국 실패했다. 그녀의 행동에 눈살을 찌푸리면서도 동정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녀가 원했던 것이 우리가 모두 원하고 있는 그 끝과 닮았기 때문이다. 이 증오와 연민이 뒤엉킨 캐릭터의 죽음에, 묘한 울림이 있는 이유다.

뮤지컬 <엘리자벳> 포스터 뮤지컬 <엘리자벳> 포스터

▲ 뮤지컬 <엘리자벳> 포스터 지난 6월 13일, 세 번째로 국내 관객을 찾은 뮤지컬 <엘리자벳이> 오는 9월 6일 성황리에 서울 삼연을 종료한다. 오는 9월 17일부터 대구, 창원, 대전, 수원 등 지방 공연이 예정되어 있다. 기획사는 "당분간 돌아오지 않을 뮤지컬 <엘리자벳> 마지막 관람의 기회"라고 홍보하고 있다. 이번 삼연이 끝나면 '당분간' 무대에 올라오는 일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 EMK뮤지컬컴퍼니



○ 편집ㅣ최은경 기자


뮤지컬 엘리자벳 옥주현 조정은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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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5월 공채 7기로 입사하여 편집부(2014.8), 오마이스타(2015.10), 기동팀(2018.1)을 거쳐 정치부 국회팀(2018.7)에 왔습니다. 정치적으로 공연을 읽고, 문화적으로 사회를 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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