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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먹을 호박알이 마당 한쪽에서 무럭무럭 익습니다. 알맞게 굵어지면 낫으로 서걱 베어서 신나게 국이며 볶음이며 해 먹어야지요. 다 함께 노래하는 밥상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우리가 먹을 호박알이 마당 한쪽에서 무럭무럭 익습니다. 알맞게 굵어지면 낫으로 서걱 베어서 신나게 국이며 볶음이며 해 먹어야지요. 다 함께 노래하는 밥상이 될 수 있기를 바라면서.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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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두 아이를 데리고 마당 한쪽에서 능금씨를 심습니다. 마침 어제 오늘 비가 와서 흙이 촉촉하게 젖었기에 손가락으로 땅을 쏘옥 눌러 넉 톨을 심습니다. 능금씨에서 싹이 틀 수 있을는지 없을는지 모릅니다. 다만, 우리 집 마당 한쪽에서 씨앗서 자라는 나무가 있기를 꿈꿉니다. 어린 나무를 장만해 키우는 나무도 사랑스럽고, 새가 눈 똥으로 자라는 나무도 사랑스러우며, 예전부터 이 시골집에서 자라는 나무도 사랑스럽습니다. 우리 집을 둘러싼 여러 사랑스러운 나무에 '씨앗 한 톨로 키운 나무'가 있으면 더욱 사랑스러우리라 생각해요.

"요 매화나무가 리츠 오빠 나무고, 요 단풍나무가 시라베 오빠 거, 가장 왼쪽에 있는 레몬나무가 내가 태어났을 때 심은 거야. 루카한테는 올리브가 어울린다고 엄마랑 얘기했거든." "올리브가 뭐야?" "이 모종나무 이름." (16∼17쪽)

'문득 바라보니, 루카가 어리광부리고 싶어하는 것 같기에, 엄마랑 둘이 샌드위치처럼 양쪽에서 꼭 안아 줬다.' (37∼38쪽)

오자와 마리 님 만화책 <은빛 숟가락>(삼양출판사, 2015) 여덟 째 권을 읽습니다. 만화책 <은빛 숟가락>은 '집에서 사랑으로 지어서 먹는 밥' 이야기를 다룹니다. 대단한 밥차림이라 하기 어려울 수 있고, 누구나 지어서 먹을 만한 밥차림이라 할 수 있는데, 한 집 사람들이 저마다 손을 거들어 이것을 함께 하고 저것을 같이 하면서 짓는 밥차림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한 집 사람들이 누리는 한솥밥 이야기를 들려주어요.

겉그림
 겉그림
ⓒ 삼양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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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 '집밥'

맛집 이야기라든지, 요리 대회 이야기라든지, 요리 솜씨를 겨루는 이야기라든지, 술안주를 찾는 이야기가 만화로 꽤 많이 나오는데, <은빛 숟가락>에서 다루는 '집밥'은 여러모로 사뭇 다릅니다. 밥 한 그릇이 마음을 달래는 이야기를 다루되, 온누리 모든 살림집에서 저마다 사랑을 담아서 짓는 밥 한 그릇에서 피어나는 이야기가 흐를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다루어요.

'처음엔 밥 먹기 전에 '잘 먹겠습니다' 하는 거랑, 밥 먹고 나서 '잘 먹었습니다' 인사하는 걸 까먹기도 했어. 나중에 배고파질 때를 위해 잔뜩 남겼다가 혼나기도 하고, 다음 식사가 언제가 될 지 모른다는 생각에 너무 많이 먹어서 배 아파지기도 했지만, 이제 괜찮아. 형네 집에서는 매일 아침도 점심도 저녁도 밥 먹는 시간이 꼭 있거든.' (22쪽)

'엄마는 제대로 밥 먹고 있을까? 엄마가 일을 쉬는 날, 늦게 일어나서 보울 가득 샐러드만 먹거나, 크리스마스 무렵엔 이틀 연달아 케이크만 먹던 날도 있었는데. 카나데 누나가 그런 건 영양이 치우쳐서 안 된대. 엄마도 이 집 아이였으면 좋았을 텐데.' (29∼30쪽)

<은빛 숟가락> 일곱 째 권에서 '루카'라는 아이는 '어머니 집'을 떠납니다. 이 만화책을 이끄는 주인공 사내인 '리츠'라는 젊은이는 '그동안 기른 어머니' 말고 '저를 낳은 어머니'가 있는 줄 고등학생 적에 처음으로 알았고, 고등학교를 마친 뒤 '저를 낳은 어머니'를 찾아가기로 했는데, '저를 낳은 어머니'한테서 사랑을 조금도 못 받는 채 밥도 으레 굶는 '동생 루카'를 만나요.

마음이 여리면서 착한 리츠라는 젊은이는 척 보기에도 제 동생인 줄 알겠는 아이한테서 등을 돌릴 수 없습니다. 날마다 손수 도시락을 싸서 '다른 집'에서 '저를 낳은 어머니'한테서 사랑을 못 받는 동생한테 가져다 줍니다. 도시락을 가져가는 길에 언제나 그림책도 챙겨서 책을 읽어 주고 여러 가지 놀이를 함께 해요.

밥이랑 국이랑 볶음을 다 마친 뒤 아이들을 불러서 수저를 놓으라고 얘기합니다. 아직 밥하고 국하고 볶음을 밥상에 올리기 앞서 작은아이는 젓가락놀이를 합니다.
 밥이랑 국이랑 볶음을 다 마친 뒤 아이들을 불러서 수저를 놓으라고 얘기합니다. 아직 밥하고 국하고 볶음을 밥상에 올리기 앞서 작은아이는 젓가락놀이를 합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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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어느 날 리츠라는 젊은이는 '저를 낳은 어머니'하고 이야기를 하기로 합니다. '루카라는 아이를 리츠라는 젊은이한테 맡겨' 달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러면서 루카라는 아이는 리츠가 사는 집으로 옮기고, 루카라는 아이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때에 제 끼니를 먹는 삶'을 누려요.

제때에 제 끼니를 처음으로 먹으면서 밥상 맡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도 처음으로 배우는 루카라는 아이는 마음 속으로 혼자서 생각합니다. '엄마도 이 집 아이였으면 좋았을 텐데.'

"루카의 책가방 멘 모습을 보면 분명 데려가고 싶어질 거야. 그리고 제대로 돌보지 못해서 또다시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겠지. 그러니까 당분간은 안 만나도 돼. 가끔 너한테서 이렇게 얘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좋아." (55∼56쪽)

'하지만 만일 지금 그 애가 상처받은 상태라면 뭔가 하고 싶어. 이제 와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지만, 내가 가드레일에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축 처져 있을 때에, 그 애가 손을 내밀어 준 것처럼.' (68∼69쪽)

달걀말이를 할 적에 마당과 뒤꼍에서 쇠무릎이랑 고들빼기랑 모시잎이랑 까마중잎 들을 골고루 뜯어서 잘게 썰은 뒤 섞습니다. 밥을 지을 적에도 모시잎을 잘게 썰어서 넣고, 멸치를 볶을 적에도 철마다 돋는 온갖 풀을 함께 볶습니다. 아이들하고 시골에서 서로 즐거우면서 아름답게 밥 한 그릇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달걀말이를 할 적에 마당과 뒤꼍에서 쇠무릎이랑 고들빼기랑 모시잎이랑 까마중잎 들을 골고루 뜯어서 잘게 썰은 뒤 섞습니다. 밥을 지을 적에도 모시잎을 잘게 썰어서 넣고, 멸치를 볶을 적에도 철마다 돋는 온갖 풀을 함께 볶습니다. 아이들하고 시골에서 서로 즐거우면서 아름답게 밥 한 그릇 누릴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 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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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는 아이입니다. 어른도 아이입니다. 몸뚱이와 키는 크더라도 어른도 아이와 똑같이 아이입니다. 아이도 사랑을 받으면서 자라고, 어른도 사랑을 받으면서 삽니다.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는 제대로 철들지 못하고, 사랑 받지 못하는 어른도 제대로 슬기롭지 못해요.

사랑이 흐르기에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서 씩씩하고 멋진 아이로 철이 듭니다. 사랑이 샘솟기에 어른은 기운차게 일하고 살림을 가꾸는 동안 아름답고 슬기로운 사람으로 우뚝 섭니다.

아이와 어른이 함께 먹는 밥 한 그릇은 '그냥 밥 한 그릇'이 아닙니다. 서로 사랑을 나누면서 기쁘게 이야기꽃을 피우는 밥 한 그릇입니다. 한 집에서 함께 나누는 밥 한 그릇은 '그냥 끼니 한 번'이 아니라 따사로운 마음이 오가면서 맑게 웃음잔치를 이루는 밥 한 그릇입니다.

"아까, 널 기다리면서 깨달았어. 가방 안에 늘 이 상자가 있었듯이, 내 마음속엔 네가 있었다는 것. 이제 상자 귀퉁이가 닳았고, 내용물도 전혀 대단한 게 아니지만, 늦어서 미안해. 생일 선물이야." (94∼95쪽)

밥상에 반찬을 많이 올려야 넉넉하지 않습니다. 값진 먹을거리를 늘 밥상에 올려야 즐겁지 않습니다. 어떤 반찬을 올리든 한솥밥을 오순도순 먹을 수 있을 때에 넉넉한 한 끼니입니다. 어떤 먹을거리를 나누든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먹을 수 있을 때에 즐겁습니다.

동무를 부르고 이웃을 부릅니다. 멀리 떨어져 사는 살붙이를 부릅니다. 차린 것은 얼마 없어도 밥상맡에 나란히 둘러앉습니다. 서로 마음으로 사귀는 아름다운 넋이기에 즐겁게 밥 한 그릇을 비웁니다.

"그거 말인데, 뭐, 이런저런 말을 하는 놈도 있겠지. 너 때문에 주전에서 누락되는 사람도 있을지 몰라. 하지만, 작은 내 동생을 보면서, 있을 자리라는 건 처음부터 존재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거라고 절실히 느꼈어." (144∼145쪽)

씨앗을 심어서 열매를 얻기까지 긴 나날이 듭니다. 남새 씨앗을 심어도 석 달을 기다리기 마련입니다. 나무 씨앗을 심으면 여러 해를 기다려야 합니다. 나는 '씨앗으로 키운 예쁜 배나무'를 만난 일을 늘 마음으로 되새깁니다.

대여섯 해쯤 앞서 골목집 한쪽에 마련한 마당에서 잘 자란 배나무를 본 적 있는데, 이 배나무를 돌본 할아버지는 '놀러온 아들이 준 배가 맛있어서 씨앗을 남겨서 심어 보았는데, 이렇게 잘 자라서 이제 이 배나무에서 배를 얻어.' 하고 말씀했습니다. 배씨 한 톨을 배나무로 키우기까지 얼마나 긴 나날을 얼마나 따순 손길로 어루만지셨을까요.

사람도 씨앗 한 톨에서 새로운 숨결로 자랍니다. 모든 짐승과 벌레도 알(씨앗)에서 깨어나서 새로운 목숨으로 삶을 짓습니다. 풀과 나무도 언제나 씨앗 한 톨에서 새롭게 자랍니다. 몸에도 씨앗이 깃들고, 마음에도 씨앗이 깃듭니다. 우리 몸과 마음은 아주 작은 씨앗에서 비롯하는데, 이 작은 씨앗은 가없이 너르며 깊은 바람이 되어 따스한 사랑으로 거듭납니다.

"우리 집에 와. 좁은 정원이지만 무리해서 농구대를 설치했거든." "어째서 그런 식으로 말해 주는 거예요?" "네가 농구를 좋아한다는 걸 아니까 그렇지. 그리고 또 하나는 나를 위해서야." (138∼139쪽)

밥을 다 지어서 밥상에 차릴 즈음 아이들을 부릅니다. 자, 수저는 너희가 놓아 주렴. 두 아이는 저마다 수저를 놓습니다. 어머니 수저와 아버지 수저도 아이들이 놓아 줍니다. 아직 아이들은 스스로 밥을 지을 줄 모르니 어버이가 도맡아서 짓습니다.

앞으로 아이들이 야무지게 자라서 손수 밥을 지을 무렵에는 내가 수저를 놓을 수 있겠지요. 밥을 먹자고 부를 수 있어서 기쁜 하루입니다. 밥상맡에서 수저 놀리는 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밥 한 술 뜰 수 있어서 즐거운 삶입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글쓴이 누리사랑방(http://blog.naver.com/hbooklove)에도 함께 올립니다.

책이름 : 은빛 숟가락 8
오자와 마리 글·그림
삼양출판사 펴냄, 2015.6.2.
5000원



은빛 숟가락 8

오자와 마리 지음, 삼양출판사(만화)(2015)


태그:#은빛 숟가락, #오자와 마리, #삶노래, #만화읽기, #만화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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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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