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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렬한 태양과 끈적끈적한 습도, 8월의 필리핀은 우기답게 하루 한 차례 이상 소나기가 내렸다. 물방울이 대지를 적시고 나면 아주 잠깐 상쾌한 기분이 들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원래의 끈적끈적한 상태로 되돌아온다. 그 때문인지 거리에선 본 현지 사람들은 어른 아이 가릴 것이 없이 손 부채질에 여념이 없다.

기자는 지난 16일부터 21일까지 에코피스아시아 관계자들과 함께 필리핀을 방문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의 지원을 받아 진행한 혼농임업 사업과 지난해와 올해 적정기술을 활용해 재난(태풍) 대비용으로 설치한 빗물 저장시설 사용 현황을 모니터링하기 위해서다.

빗물 저장시설 사업은 환경부, 한국환경산업기술원(KEITI)의 지원과 국내에 있는 서울대 빗물이용연구센터, 에코네트워크와 현지의 아시안 브릿지 필리핀과 공동으로 진행했다.

필리핀 도시빈민들은 우기와 태풍 등으로 상습적으로 침수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저지대에 몰려 산다. 이때문에 매년 인명 피해 등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 하천변에 밀집한 주택 필리핀 도시빈민들은 우기와 태풍 등으로 상습적으로 침수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는 저지대에 몰려 산다. 이때문에 매년 인명 피해 등 사고가 끊이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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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선 우선 빗물 사업과 관련된 내용을 소개하고, 이후 혼농임업 사업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일행은 차를 타고 메트로 마닐라 행정 구역의 동북 끝 지점에 위치한 케손 시(市)의 바랑가이 바공실랑안에 들어섰다. 목적지는 바칼 시티오. 필리핀 행정구역명이 생소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다. 메트로 마닐라는 수도인 마닐라 시와 주변 여러 도시들이 결합한 형태인데, 우리로 치면 수도권이라 할 수 있다.

마닐라 시에 대통령궁과 상원이 있다면, 케손 시에는 하원, 법원, 행정기관 등이 몰려 있어 필리핀의 행정 거점도시이다. '바랑가이'는 우리로 치면 '읍·면·동'에, '시티오'는 '통·반'에 해당한다. 필리핀은 선거를 통해 바랑가이의 수장을 선출하는데, 체어퍼슨 또는 캡틴, 캐피타나(여성)로 불린다. '바공실랑안'과 '바칼'이 지명이다.

상습 침수 피해 지역에 살고 있는 빈민들

일행을 태운 차량은 바공실랑안 바랑가이 홀(우리나라로 치면 동사무소)에서부터 20여 분 동안 급경사길로 내려갔다. 도로가 좁아 더 이상 차가 갈 수 없는 곳부터는 걸어서 이동해야 한다. 낡은 주택들이 닭장처럼 붙어 있는 길을 따라 트라이씨클(자전거를 개조한 삼륜교통수단)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바칼 시티오 빈민밀집지역은 태풍 피해 회복도 더디게 진행된고 있다는 것이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단체 관계자들의 말이다. 2009년 태풍으로 피해를 입은 일부 주택은 공사가 중단된 채 거의 방치 상태에 있다
▲ 아직도 복구 중인 주택 바칼 시티오 빈민밀집지역은 태풍 피해 회복도 더디게 진행된고 있다는 것이 현지에서 활동하고 있는 단체 관계자들의 말이다. 2009년 태풍으로 피해를 입은 일부 주택은 공사가 중단된 채 거의 방치 상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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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 곳곳에 부서진 집들이 있다. 에코피스아시아 필리핀 지부 유정 간사에 따르면 2009년 9월 불어 닥친 대형 태풍 온도이(Ondoy)의 피해 흔적이라 한다. 바칼 시티오는 마리키나강 주변의 저지대로서 우기가 되면 물이 범람하는 일이 흔하게 벌어진다고 한다. 또한 한 해 평균 20여 차례 불어오는 태풍으로 인해 빈번하게 피해를 입는 지역이기도 하다. 오죽했으면 이 지역을 두고 '필리핀 재난의 수도'라고 부를 정도다.

저지대 대부분은 사유지지만, 갈 곳 없는 도시 사람들이 하나 둘 터를 잡았다. 전형적인 도시빈민들이다. 빈민들은 건기 때 땅 주인을 대신해 농사를 지어 집값을 충당하고, 다른 시기는 돈 벌이를 위해 도시를 배회한다. 직각으로 만들어진 강둑 위로 집들이 위태롭게 늘어서 있다. 강물은 먹물을 풀어 놓은 듯 시커멓고 여기저기 쓰레기들이 쌓여 있다.

"며칠 전 비가 와서 그나마 조금 깨끗해진 상태"라는 것이 유정 간사의 말이다. 하수처리시설이 전혀 없는 이 지역 상황을 그대로 보여준다. 도로를 따라 지름 10cm 남짓 주철관이 길게 이어져 있는 것도 눈에 들어왔다. 상수도 시설이다. 그나마 도시 지역이 끝나는 지점부터는 지름 2cm 크기의 비닐호스로 이어진다.

트라이시클이 분주히 왔다갔다하는 도로 한편, 비닐 호스로 이어진 상수도시설이 보인다. 일부 지점에서는 하수 시설에 상수용 비닐호수가 이어져 있어, 식수오염도 우려되고 있다
▲ 빈민가 상수도 시설 트라이시클이 분주히 왔다갔다하는 도로 한편, 비닐 호스로 이어진 상수도시설이 보인다. 일부 지점에서는 하수 시설에 상수용 비닐호수가 이어져 있어, 식수오염도 우려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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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비닐호스로 도시 지역 밖에 있는 빈민들에게 수돗물을 공급해 준다. 필리핀의 수돗물은 사정이 좋지 않다. 섬나라라는 특성 때문에 상수도 보급률은 43%(2013년 기준. KOICA 자료)에 불과하다. 대도시인 마닐라의 경우 80~90% 이상인 지역도 있지만, 일찍부터 민영화돼 수돗물 값이 꾸준히 상승하는 등의 문제가 있다.

더욱이 수돗물 품질에 대한 불신이 강하다. 유정 간사는 "필리핀에서 2년여 동안 활동하면서 수돗물을 그냥 마시는 사람은 단 한명 밖에 못 봤다"고 말한다. 실제 대형 마트에서는 500ml에서부터 20리터짜리 등 다양한 종류의 생수를 판매하고 있다. 마트 내에서 생수 판매 코너가 가장 큰 편이다. 시골 지역에서는 수돗물을 정수한 물을 판매하기도 한다. 문제는 빈민들에겐 생수 구입비용조차 적지 않은 부담이 된다는 점이다.

지하수조차 쓸 수 없는 지역

빈민밀집지역과 들판 길을 따라 20여 분 걸어 들어가서야 '바칼 빗물 이용 시설'이라는 안내판이 눈에 들어 왔다. 50㎡ 넓이의 벽돌로 된 집은 아이들 공부방으로 사용되고 있고, 담벼락에 붙어서 높이 약 2m, 폭 1m, 길이 2m 가량의 원통형 스테인리스 빗물 저장 시설이 있다. 빈민지역이라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철조망을 천장까지 친 것도 특이하다.

에코피스아시아 이태일 사무처장은 "이 마을은 빗물받이 지붕을 설치할 수 있는 마땅한 건물이 없어서 이 공부방에 설치하게 됐다"고 말했다. 6톤 규모의 이 빗물 통을 옮기는 데만 12명의 마을 사람들이 동원됐다. 아시안 브릿지 필리핀 보나 사무국장은 "길이 좁아 차량이 들어 올 수조차 없어 마을 사람들이 통을 들고 1시간 동안 산길을 넘어 왔다"고 전했다.

필리핀 메트로 마닐라에서 발생되는 쓰레기가 매립되고 있는 곳으로, 현지 단체 관계자에 따르면 원래는 1998년 사용이 종료돼어야 하지만, 현재도 계속 사용되고 있다. 그에 따라 침출수 등으로 인한 주변 지하수 오염도 우려되고 있다.
▲ 40년 넘은 쓰레기 매립장 필리핀 메트로 마닐라에서 발생되는 쓰레기가 매립되고 있는 곳으로, 현지 단체 관계자에 따르면 원래는 1998년 사용이 종료돼어야 하지만, 현재도 계속 사용되고 있다. 그에 따라 침출수 등으로 인한 주변 지하수 오염도 우려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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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방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며 빗물 저장 시설을 관리하고 있는 카필리안(25, 여) 선생은 "빗물은 식수로 쓸 정도로 굉장히 유용하다"며 흡족해 했다. 이전에는 물을 사먹거나 상태가 좋지 않은 우물을 사용해야 했다고 한다. 일부 우물은 가축 배설물 등으로 오염돼 피부병이 생기거나, 설사 환자가 발생하는 등 문제가 있었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이 마을에서 약 3km 위쪽에 'Payatas Dumpsite'라는 메트로 마닐라 쓰레기 매립장이 있다는 것이다. 220헥타르 규모의 이 매립장은 1970년대부터 사용됐으며, 1993년 이후부터는 메트로 마닐라에서 나오는 하루 평균 3000톤의 고형 쓰레기가 매립된다. 1998년 이후 운영을 중지하기로 했지만, 기자가 현장에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현재도 사용되고 있다.

보나 사무국장은 "2000년 7월에는 쓰레기 매립장 일부가 무너져 인근 마을 주민 300여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매립장 주변 하천 역시 침출수 등의 영향으로 까만 색이었다. 매립장 침출수는 지하수까지 오염시킬 가능성이 높고, 인근 지역까지 그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게 현지 관계자의 설명이다.

재난 대비형 시설, "더욱 확대됐으면"

이런 상황에서 소규모라도 빗물 이용 시설을 설치된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마을 주민들의 반응이다. 카필리안 선생은 "이전에도 빗물 저장 시설이 있었지만, 체계적인 관리가 안 돼 생활용수로만 사용했다"고 말했다. 에코피스아시아 등이 설치한 빗물 저장시설은 태양광으로 운영되는 정수장치를 설치해 주민들에게 신뢰도를 높였다.

마치 먹물을 풀어 넣은 듯 검은 물이 흐르고 있다. 이런 하천 제방 안쪽에  우물을 파서 사용하는데, 지역주민들의 건강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 매립장 주변 오염된 하천 마치 먹물을 풀어 넣은 듯 검은 물이 흐르고 있다. 이런 하천 제방 안쪽에 우물을 파서 사용하는데, 지역주민들의 건강이 우려되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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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물은 46명의 공부방 아이들에게 식수로 제공되고, 마을 사람들도 사용한다. 며칠 전 내린 비 때문에 빗물 통에 물이 가득 찼다. 빗물 맛은 어떨까? 태양광 전지에 연결된 스위치를 켜고 수도꼭지를 돌리자 맑은 물이 쏟아진다. 에코피스아시아 김원호 이사장은 "내 평생 빗물을 처음 마셔봤는데, 정말 달다"라고 평했다.

기자도 맛을 봤다. 밋밋할 거란 예상과 달리 단번에 단맛이 느껴졌다. 호주에서는 '클라우드 주스'라는 이름으로 커피 가격으로 빗물을 판매하고 있다고 하는데,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듯했다. 카필리안 선생은 "빗물은 우물보다 맛이 좋다"면서 "생수가 맛은 가장 좋지만 비싸기 때문에 가격을 생각하면 빗물이 가장 낫다"고 말했다.

한국의 적정기술로 설치된 바칼 시티오 빗물 음용수 시설에서 이곳 공부방을 다니는 한 소녀가 빗물을 받고 있다. 밋밋할 것이란 예상과 달리 빗물 맛은 매우 달달하다. 현지 주민들은 이런 빗물 음용수 시설이 더욱 확대 되길 소망하고 있다.
▲ 빗물을 받고 있는 소녀 한국의 적정기술로 설치된 바칼 시티오 빗물 음용수 시설에서 이곳 공부방을 다니는 한 소녀가 빗물을 받고 있다. 밋밋할 것이란 예상과 달리 빗물 맛은 매우 달달하다. 현지 주민들은 이런 빗물 음용수 시설이 더욱 확대 되길 소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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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일 사무처장은 "이곳에 설치된 빗물 이용 시설은 재난 대비 적정기술이라는 점이 특징"이라 말한다. 태풍 등 침수 피해를 받으면 상수도 공급이 중단되고, 외부에서 식수가 공급되기 전까지는 오염된 지하수를 사용할 수밖에 없다. UN OCHA(유엔인도주의조정국)와 같은 국제기구에서는 태풍 피해 지역에서 식수 문제를 가장 큰 문제로 지적할 정도다.

이럴 때 빗물 저장 시설의 물이 요긴하게 사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적정기술을 활용한 시설은 '빗물은 허드렛물'이라는 인식을 '마실 수 있는 깨끗한 물'로 바꾸는 계기가 됐다는 것이 이태일 사무처장의 평가다. 카필리안 선생은 "주민들의 빗물 선호도가 높다"면서 "추가적인 빗물 저장시설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편집ㅣ최유진 기자

덧붙이는 글 | 개인 블로그(blog.naver.com/ecocinema)에도 올립니다.



태그:#필리핀, #빗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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