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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실 채권을 소각해 장기 연체자를 구제하는 '한국판 롤링 주빌리' 운동이 '주빌리 은행'으로 거듭납니다. <오마이뉴스>는 지난해 8월 사단법인 희망살림과 함께 진행한 '부채 탕감' 기획으로 부실 채권 '땡처리' 실태와 약탈적 대출을 고발했습니다. 그 사이 '99%에 의한, 99%를 위한 빚 탕감 프로젝트'로 792명의 빚, 51억 3400만 원이 사라졌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주빌리 은행 출범을 앞두고 다시 '부채탕감 기획 시즌2'를 진행합니다. [편집자말]
이재명 성남시장-박원순 서울시장
 이재명 성남시장-박원순 서울시장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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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아직 어려서 제 이름으로 오는 편지를 보면 반가웠어요. 제게 빚을 갚으라고 보낸 편지라는 건 몰랐어요. 아빠가 빚을 남기고 돌아가셔서 우리에게 유산으로 남아 엄마가 힘들어해요."

3살 때 죽은 아버지에게 카드 빚 4500만 원을 물려받은 초등학교 1학년 이아무개군이 법원에 제출한 파산면책 진술서 일부다. 이군은 오른손을 못 쓰는 장애인 어머니와 초등학교 5학년인 누나와 함께 기초생활수급자로 살면서도 7년 동안 카드빚 독촉에 시달려야 했다.(관련기사: [다음 펀딩] '빚 갚으란 편지' 받은 초등학생 남매)

'한국판 롤링 주빌리'에 기름 부은 성남시

이들은 다행히 서울시 금융복지상담센터 도움으로 파산 면책을 받았다. 이처럼 지난 2013년 6월부터 지난해 8월까지 15개월간 파산 면책된 사람은 321명, 부채 규모로는 580억 원에 이른다. 서울시에 이어 경기도 성남시에도 지난 3월 금융복지상담센터가 문을 열었고 3개월 만에 100억 원 넘는 파산 면책을 신청했다. 이재명 성남시장이 지난해 9월 '99%를 위한, 99%에 의한 빚 탕감 프로젝트(한국판 롤링 주빌리)'에 동참한 게 계기가 됐다.

'롤링 주빌리'는 일정 기간마다 빚을 탕감해 주던 성경 속 '희년'을 뜻하는 말로, 지난 2012년 미국 '오큐파이 월스트리트(월스트리트를 점령하라)' 운동 당시 155억 원어치의 부실 채권을 매입해 탕감해 준 데 이어, 지난해엔 대학생 학자금 채권 40억 원어치를 소각했다.

한국에서도 사단법인 희망살림이 이어받아 지난해 4월 처음으로 117명의 빚, 4억 6700만원어치를 소각해 화제가 됐다. 여기에 성남시가 기름을 부었다. 지난해 4월부터 8월까지 3차례에 걸쳐 소각한 부실 채권 규모는 260여 명, 16억 원어치 정도(채권 원금 기준)였지만, 지난해 9월 성남시가 가세하면서 792명, 51억 3400만 원어치(2015년 1월 기준)로 급증했다.

성남시에서 주도해 지역 시민사회단체와 종교계, 기업계까지 모금 운동에 동참한 결과다. 그사이 성남시에서만 3700여 만 원을 모아 486명의 빚 33억 원어치를 탕감했다. 이어 지난 7월에는 성남시기독교연합회에 속한 교회 30여 곳에서 모은 헌금 1억여 원을 기부했다. 이를 기념하려고 성남이 연고지인 프로축구팀 '성남FC'는 '롤링 주빌리'를 새긴 유니폼을 입고 뛰고 있다.

27일 '주빌리 은행' 출범... "원금 7%만 갚으세요"

지난 7월 8일 경기도 성남시 탄천종합운동장에서 열린 프로축구 성남FC 경기에 앞서 성남시 기독교연합회에서 모금한 1억여 원을 빚 탕감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성남시와 사단법인 희망살림에 기부하고 있다. 가운데 이재명 성남시장, 오른쪽 제윤경 희망살림 상임이사.
 지난 7월 8일 경기도 성남시 탄천종합운동장에서 열린 프로축구 성남FC 경기에 앞서 성남시 기독교연합회에서 모금한 1억여 원을 빚 탕감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성남시와 사단법인 희망살림에 기부하고 있다. 가운데 이재명 성남시장, 오른쪽 제윤경 희망살림 상임이사.
ⓒ 희망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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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부금은 오는 27일 출범하는 비영리단체인 '주빌리 은행'을 만드는 밑거름이다. 이재명 시장과 유종일 KDI 국제정책대학원 교수와 함께 공동 은행장까지 맡았다. 주빌리 은행은 지금까지와 달리 빚을 100% 탕감해 주던 방식에서 벗어나, 채무자에게 채권 원금의 7%까지 형편껏 갚도록 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관련기사: [카드뉴스] '빚'에 허덕이나요? 이제 7%만 갚으세요)

희망살림 상임이사로 롤링 주빌리 프로젝트를 이끌어온 제윤경 에듀머니 대표는 지난 20일 "그동안 빚을 모두 탕감해 주면서 '도덕적 해이'란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면서 "주빌리 은행에서 원금 3~5% 정도에 매입한 장기 연체 부실 채권을 채무자에게 7% 정도 형편껏 갚게 하고 그 차액으로 더 많은 부실채권을 매입하는 데 쓸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렇다고 일반 대부업체처럼 채무 독촉을 하겠다는 건 아니다. 채무자 형편이 되는 대로 일부라도 기한 없이 갚게 하되, 사정이 정 안 좋으면 모두 탕감해 주기로 했다. 이를 위해 제 대표 자신이 지난 7월 한국대부금융협회에서 대부업 교육을 받고 1인 사업자로 등록까지 했다.

제 대표는 최근 펴낸 <빚 권하는 사회, 빚 못 갚을 권리>(책담)에서 "나는 주빌리 은행을 만들어 사람들을 빚으로부터 자유롭게 해주는 꿈을 실천하기 시작했다"면서 "채권시장에 직접 뛰어들어 채권을 매입해 괴롭히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해줄 것"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실제 금융사 대출 채권 소멸시효는 5년이지만 채권 시장에서 7~10년 지난 장기 연체 부실 채권도 활발히 거래된다. 대출자가 5년 이상 원리금을 연체하면 빚을 갚지 않아도 되지만 은행은 소멸시효가 완성된 채권을 대부업체에 매각하고, 대부업체는 온갖 편법을 동원해 소멸시효를 연장해 왔다.

소멸시효를 넘겨 7~10년 넘게 장기 연체한 부실 채권은 수차례 손바꿈하며 원금의 1~3% 수준까지 떨어진다. 하지만 채권자는 여전히 채무자에겐 원금 100%에 가까운 상환을 요구한다. 앞서 초등학생 채권 추심 사례처럼 이 과정에서 채무자 본인이 사망한다고 빚 독촉이 멈추는 건 아니다. 심지어 카드 빚 14만 원을 돌려받겠다고 채무자가 사망한 지 5년 넘게 독촉한 사례도 있었다.(관련기사: 14만 원 받겠다고... 죽은 채무자 독촉한 '독한 추심')

2013년 8월 말 현재 국내 채무불이행자는 350만 명 정도이고 채무 상환이 사실상 불가능한 장기채무자도 114만 명에 이른다(한국금융연구원). 서울연구원과 에듀머니가 지난해 3월 부채 보유자 903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10명 중 4명이 채권 추심을 경험했고, 이들 가운데 4명 중 3명 꼴로 정신적 고통, 생명의 위협, 가족·직장생활 곤란 등 피해를 호소하고 있었다.

채권자보다 채무자 중심으로... 부실 채권 매각 방식 제도화 움직임

빚 탕감 프로젝트가 확산되면서 채권자 중심이었던 부실채권 매각제도를 채무자 중심으로 바꿔야 한다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국회 입법조사처는 지난 6월 '이슈와 논점' 보고서(채무자 중심의 부실채권 매각 제도를 위한 개선과제)에서 현재 금융회사 내부규정으로 돼 있는 부실채권 매각 기준과 절차를 법령으로 만들자고 제안했다. 적어도 파산·면책과 사망자 채권, 소멸시효 완성 채권, 개인회생 절차 등이 진행 중인 채권은 매각할 수 없게 하자는 것이다.

이에 금융감독원에서도 지난 8월 초 은행 등 금융회사 행정지도를 강화해 소멸시효가 완성된 채권 매각을 제한하겠다고 밝혔다.

특히 홍정아·조대형 입법조사관은 "채권 추심 행위가 사회적 정당성을 넘어 채무자의 인간다운 삶을 침해하거나 권리 남용에 해당하는 경우 규제할 필요성이 있다"면서 채무자 소득이 중단되면 일시적으로 채권 추심을 중단하는 등 채무자 보호 방안을 제시했다. 아울러 부실채권이 어떻게 거래되는지 채무자가 알 수 있도록 매각 이력관리 제도 도입도 필요성도 제안했다.

앞서 책에서 제윤경 대표는 "시민들의 모금을 통해 오래 연체된 채권들을 매입해 구제하는 사업인 주빌리 은행은 특정 채무자만을 구제하고자 하는 프로젝트는 아니다"라면서 "궁긍적으로는 제도적 안전망이 마련돼야 하지만 당장 구멍 난 틈에서 벌어지는 금융의 약탈적인 행태를 함께 지적하고 개선하고 틈을 메우는 것부터 시민들과 함께 하려 한다"고 밝혔다.

지난해 4월부터 올해 1월까지 이어진  '99%에 의한, 99%를 위한 빚 탕감 프로젝트' 성과. 모두 7차례에 걸쳐 792명의 빚, 51억 3400만 원이 사라졌다.
 지난해 4월부터 올해 1월까지 이어진 '99%에 의한, 99%를 위한 빚 탕감 프로젝트' 성과. 모두 7차례에 걸쳐 792명의 빚, 51억 3400만 원이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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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주빌리은행, #부채탕감, #롤링주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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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사회부에서 팩트체크를 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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